비상사태가 수습되면 즉시 공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사태에 직면하여 전광석화같이 공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많다. 그리고 매주 행정당국으로부터 예배를 중단하라는 전화에 시달리는 목회자도 많다. 지난 주일만 하더라도 경기도는 56% 정도의 교회가 공예배를 드린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에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종교집회금지 긴급명령을 발표하는 것을 만지작거리다가, 지난 3월 11일 경기도 기독교지도자 긴급간담회에서 타협안을 제시했다.

즉 마스크 착용 등을 이행하는 조건으로 예배 등을 허용하기로 했다. ①입장시 체온체크, ②출입시 손소독, ③예배시 마스크착용, ④예배시 2m 거리두고 앉기, ⑤예배 전후 방역 등 예방수칙을 잘 지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런 천재지변과 같은 비상상태에 주일예배를 중단하고 온라인으로 예배드리는 것은 개교회의 당회나 목회자가 결정할 일이다. 정부의 정책에 호응하여 만일의 사태를 예방하는 것은 결코 누구를 탓할 일은 아니다. 교회마다 형편과 입장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온라인 예배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합당한 것으로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주일예배는 기본 4가지 조건인 주일ㆍ성찬식 ㆍ성도ㆍ목사라는 조건을 갖추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위 온라인 예배는 예배의 기본 4가지 조건이 충족이 되지 않기에 예배로 볼 수 없다. 특히 칼빈주의 개혁주의 신앙노선에서는 예배가 생명이다. 참 예배는 반드시 예배의 두 기둥인 설교와 성찬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흔히 초대교회 예배를 가정예배 또는 회당예배라고 부른다. 기독교가 공인되어 예배당을 갖기 전 과도기적으로 가정 또는 회당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던 것에서 유래한다. 여기서 가정예배란 말을 가족끼리 드리는 예배로 오해하기 쉽다. 가정예배란 가족끼리 모여서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가정예배란 성도의 집에서 몇 명이 되었든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을 가리킨다. 

가정예배란 말을 오해해서, 공동체예배 대신 가족예배 또는 개인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 같이 말하는 것은 형용모순(oxymoron)이다. 엄격한 의미에서 예배란 공동체 예배에만 사용될 수 있는 말이다.

한국 기독교는 공예배 논쟁으로 교회들이 갈팡질팡하고 있다. 교단마다 각 당회가 알아서 결정해야 할 일이라고 한다. 그러나 당회 안에서도 목사와 장로간에 의견 차이가 생기기도 한다. 목사마다 입장이 다르기도 하다. 예배당에서 드리는 공예배를 당분간 가정에서 가족예배나 온라인으로 드리는 경우가 많다. 사실 공예배를 이렇게 쉽게, 선제적으로 대대적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중단, 변형한 사례는 종교개혁 500년 역사 이래로 정말 보기 드문 일이다.

분명한 것은 가족예배나 온라인 예배는 예배가 아니다. 따라서 비상사태가 수습되면 즉시 공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그것도 빛의 속도로 말이다. 집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정당화되거나 습관화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만인에게 찾아오는 죽음을 피하다가 영생의 길을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또 신천지처럼 영생의 길을 잘못 찾아가서 마귀의 수족이 되는 일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금이야말로 깨어 기도할 때이다.

한편 가정 자체도 결코 안전하지 않다. 가톨릭 안동교구 순례단원 아들 때문에 30명이 감염되었다. 한국땅 어디고 안전하지 않다. 안전이 그리도 중요하다면 우리는 평소 예배당도 가지 말아야 한다. 현재 가정, 직장, 정부, 지하철, 버스, 식당 어느 곳 하나 코로나19로부터 안전한 곳은 없다. 신천지와 중국인들이 도처에서 감염시키는 중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언제까지 자가격리만 하고 있을 것인가?

불과불 우리는 불완전과 공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마스크를 쓰고 활동 할 수 밖에 없다. 다른 일상활동은 그냥 놔두면서 예배당 공예배만 드리지 말라고 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다른 활동이 불가피하다면 성도들에게 공예배도 불가피하게 중요하다. 노약자나 어린아이를 키우는 젊은 부부들이 대체예배 드리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 그러니 마스크 쓰고 예배당에 가는 사람들을 비판하지 말라! 

(마 13:33~43)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사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이는 인자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요,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추수 때는 세상 끝이요 추수꾼은 천사들이니, 그런즉 가라지를 거두어 불에 사르는 것 같이 세상 끝에도 그러하리라
인자가 그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 나라에서 모든 넘어지게 하는 것과 또 불법을 행하는 자들을 거두어 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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