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호 교수(철학박사)는 현재 한국개혁장로회(KRPC) 실로암교회 담임목사이며, 한국개혁장로회신학교 교장이다.

이광호 목사의 "코로나19, 교회와 성도의 자세" 

목 차 

 

1. 시작하는 말

2. 극한 전염병 발생 가운데도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

3.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재앙과 하나님의 징계

4. 고통 가운데 허락되는 실제적 은혜

5. 재앙에 대한 교회와 교인들의 대응 자세

6. 교회와 공예배에 관한 문제

7. 맺는 말

이광호 교수(철학박사)는 현재 한국개혁장로회(KRPC) 실로암교회 담임목사이며, 한국개혁장로회신학교 교장이다.
이광호 교수(철학박사)는 현재 한국개혁장로회(KRPC) 실로암교회 담임목사이며, 한국개혁장로회신학교 교장이다.

1. 시작하는 말

‘코로나-19’는 2019년 12월 중국 후베이성 우한시에서 처음 생겨난 변종 바이러스다. 갑작스레 발생하여 중국을 휘몰아친 ‘코로나-19’는 곧이어 한반도에 들어왔으며, 2020년 2월 18일 대구의 신천지 집단에서부터 확진자들이 급격히 증가하자 일순간에 전국을 혼란의 도가니로 몰아갔다. 감염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그와 같은 바이러스는 이제껏 경험하지 못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전국이 비상사태에 들어갔으며 급기야 2월 23일 주일(主日)에는 상당히 많은 기독교회들이 주일 공 예배를 일시 중단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한두 주간이 지나면 잠잠해질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오히려 그 상황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증폭되어가자 점차 공 예배를 중단하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으며 지금은 한 달 이상 공 예배로 모이지 못하는 교회들이 많아졌다.

공 예배를 중단하는 대응책으로 교회 대신 개별 가정에서 화상을 통해 온라인 예배를 보는 교회들이 많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개 교회가 그렇게 하기 힘든 경우에는 기독교 방송을 통해 개인이 원하는 설교를 듣는 것으로 대체하기도 했다. 이제 그 기간이 점차 길어짐으로써 상당수 교회들은 당황스러워하는 것을 보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아직도 언제쯤 이 위기의 상황이 끝나게 될지 예측하기조차 어려운 지경이 되어버렸다.

거기다가 신종 바이러스로 인해 일반 초중고대학교에서도 개학을 늦추어야만 했다. 국가에서는 초중고등학교가 3월 초에 개학해야 할 것을 늦추어 3월 23일로 개학일을 연기했다가 또다시 4월 6일로 연기하게 되었다. 이것 마저도 나중에 어떻게 되어 갈지 확실히 알 수 없는 형편이다.

‘코로나-19’ 확진 판정을 받은 당사자와 그 가족들은 직접적인 고통을 감내해야만 하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바깥출입을 자제하며 외출시에는 마스크를 끼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다른 사람과 악수를 하는 것도 거의 중단되었으며, 함께 식사를 하거나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것도 피하는 것이 일반화 되어버렸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가 특별히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에 연관되는 것들이다. 많은 교회들이 자발적으로 주일 공 예배를 중단하는 경우가 생겨나다가 급기야는 정부에서 예배 중단을 위한 ‘행정 명령’을 내리기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기독교 내부에 심각한 분열과 반목이 생겨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그 책임소재를 두고 상이한 주장을 펼치면서 자기와 다른 견해를 가진 자들에 대한 반목이 시작되었다. 즉 그것이 현 정부의 실책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와도 연관되어 있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보다 심각한 문제는 이런 비상시국에 주일 공 예배 모임을 지속하는 것이 바람직하냐 아니면 중단하는 것이 옳으냐 하는 문제에 관한 상이한 견해들이다. 물론 공 예배를 지속하는 교회와 목회자들을 두고 무책임한 태도로 심하게 비난하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공 예배는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지속되는 것이 옳다고 이해하는 자들이 있다. 그들은 서로 자기의 주관적인 주장을 내세우면서 자기와 다른 입장을 보이는 자들을 무지한 자로 여기며 맹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주일 공 예배를 모이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각 성도들이 가정에서 시행하는 화상을 통한 온라인 예배를 장려한다. 그에 반해 이런 어려운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도 주일 공 예배 모임을 지속해야 한다는 자들은 주일 공예배를 완전히 중단한 채 시행하는 온라인 예배를 정상적인 공예배의 일환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무서운 역병 앞에서 교회적 어려움이 실제적으로 대두된 것이다.

지금은 ‘코로나-19’가 팬데믹(pandemic) 상태가 되어 전 세계를 큰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과 이탈리아를 필두로 전 유럽이 심각한 혼란에 빠져 있으며, 미국을 비롯한 북미와 남미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에도 ‘코로나-19’로 인한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다. 이제 전 세계 어느 나라도 이 역병으로부터 자유로운 나라는 없다. 우리는 이와 같은 분위기 가운데서 영원한 천상의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성도로서 어떤 고백과 신앙인의 자세를 가져야 할지 올바르게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된다.

2. 극한 전염병 발생 가운데도 존재하는 하나님의 섭리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에서 나타나는 재난에 연관된 다양한 현상들에 대한 근원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지진이나 화산폭발 등과 같은 자연 현상들 뿐 아니라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신종 바이러스 역병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의 모든 위기 상황이 단순한 우연 혹은 자연발생적인 사건에 지나지 않는지 혹은 그 이상의 의미가 그 가운데 내포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구약 시대의 다양한 역병들은 하나님의 의도에 연관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성경이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 가운데 살아간 다수의 건전한 성도들과 신학자들은 성경의 교훈을 좇아 초대교회 시대나 중세교회 시대의 역병 또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존재했다는 사실을 믿었다. 따라서 이에 대해서는 초첨단 과학 시대인 21세기에 발생한 역병은 그렇지 않다고 단정지어 판단해서는 안 된다. 과거에 그런 것들이 하나님의 섭리와 연관되어 있었다면 오늘날 우리 시대 역시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는 역병을 비롯한 모든 재앙을 하나님께서 직접 일으키셨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론 특별한 경우 하나님의 의도적인 징계와 심판이 그와 같이 나타나 실행될 수도 있다. 하지만 필자가 여기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 역병이 비록 자연 현상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을지라도 그 가운데 하나님의 섭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우리 시대의 형식상의 기독교인들 가운데는 성경에 계시된 여호와 하나님을 실제로 역사하는 신이 아니라 인식 속에 존재하는 관념의 신으로 대체시키고 있다. 우리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절대 진리라는 사실을 믿고 있다면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 하나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자기 자녀들을 지켜 보호하시는 분으로 증거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머리카락 하나까지 헤아리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마10:30). 그리고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다(마10:29). 또한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의 발걸음 하나하나를 세심하게 인도하며 보호하고 계시는 분으로 증거되고 있다(시37:23,24; 잠20:24). 그는 지금도 살아계시면서 항상 성도들을 눈동자 같이 지켜 보호해 주신다(신32:10; 시17:8).

그러므로 우주 만물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은 항상 자신의 섭리에 따라 이 세상을 돌아보고 계신다(골1:15-17). 그는 세상과 그에 속한 모든 것들에 대한 영원한 통치자일 뿐 아니라 그것을 보존하는 가운데 자기 자녀들을 지키시며 인간의 역사를 운행해 가신다(시66:9).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해서는 특별한 섭리와 더불어 그의 적극적인 간섭이 따르게 되는 것이다.

3. 이 세상에서 발생하는 재앙과 하나님의 징계

‘코로나-19’가 확산되어 갈 때 다수의 사람들은 저마다 책임소재 밝히기에 열중하며 주관적인 발언들을 쏟아냈다. 그것은 문제 해결을 위한 방편으로서가 아니라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를 찾아내 비난을 퍼붓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 가운데는 상당수 기독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어서 그와 동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여간 주의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관점은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근본적인 문제 인식의 결여와 자기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확신이 깔려있기 때문에 생겨나게 되는 양상이다. 그런 사고를 하게 되면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부분적으로나마 그 원인이 자기에게도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게 된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바는 그 책임 소재는 ‘나와 우리’에게도 어느 정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들의 책임소재를 묻는 데 지나친 집착을 보이게 되면 그것이 자신과 함께 동시대 인간들의 죄 때문이라는 입장을 부인하거나 소홀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교훈에 포함된 기본적인 윤리 질서가 파괴되는 위기의 세상 가운데서 그에 대한 별 문제 의식없이 적응하고 타협하면서 타락한 세상에 익숙해져 가는 것은 하나님께 저항하는 성격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인간들이 겪게 되는 재앙은 진리를 소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성격이 존재하지 않는지 겸손하게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일반적인 책임 소재를 되풀이하여 언급하는 것과 현상적인 문제의 발단과 시발지를 찾아 빠른 해결을 위한 노력을 기울이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어디에서부터 그 바이러스가 창궐했는지 어떤 경로를 통해 확산되었는지 확인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은 바람직한 자세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국가 기관이든 개인이든 특정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는가에 대하여 여론을 통해 몰아가는 것은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모든 문제가 완료되었을 때 사회적으로 그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판단과 유동적인 여론에 지나치게 편승하게 되면 자기에게는 그에 관한 아무런 책임도 없다는 선에 머물게 될 우려가 따른다. 그 재앙이 만일 하나님의 징계와 연관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우리’에게도 일정 부분 존재하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그에 저항하는 삶과 행위는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타락한 세상을 탐닉함으로써 주님의 몸된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리에 서 있다면 그것도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4. 고통 가운데 허락되는 실제적 은혜

우리가 겪고 있는 재앙이 하나님의 징계와 연관된 성격을 지니고 있다면 심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우리에게 ‘복’(福)이 될 수 있다. 이는 물론 그 재난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임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보호와 지키심의 은총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라면 소극적인 의미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징계로 볼 수 있다.

지혜로운 자들은 힘든 고통의 시기가 닥치고 무언가 중요한 것들을 상실할 때 거기에 머물지 말고 더 소중한 것을 얻을 수 있는 기본자세를 갖추어야만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당연히 이런 고통의 시간을 보내면서 보다 큰 교훈을 얻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야만 고통 가운데서도 성숙한 신앙인의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극한 위기의 과정을 겪으면서 나약하기 그지없는 인간의 한계를 배우게 된다. 평온한 시기에는 사람이 열심히 일하고 성실하게 살면 그것으로 안정되고 좋은 삶을 살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평상의 삶을 크게 뒤흔드는 불안한 시기를 보내면서 그게 아니란 사실을 분명히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통해 근원적으로 이 세상 어디에도 ‘안전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다. 잠시 지나가는 풍요로운 현상들 가운데서 기쁨과 즐거움을 누리려 했지만 아무런 보장성이 없다는 점을 깨닫게 된다. 그에 대한 분명한 인식을 하는 것만으로도 고통 가운데서 얻는 값진 교훈이 될 수 있다.

그와 더불어 우리가 깊이 깨달아야 할 바는 ‘죄’(罪)에 대한 구체적이며 본질적인 실상이다. 그리고 극도로 타락한 시대에 살아가면서 세상의 것들로 말미암아 교만에 빠져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한 회개의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이 곧 성도들에게 허락된 ‘진정한 복’이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어려움에 맞닥뜨릴지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살펴봄으로써 죄를 뉘우쳐 회개하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지혜를 소유해야 한다. 

5. 재앙에 대한 교회와 교인들의 대응 자세

지상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은 재앙 앞에서 과연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가? 어떤 미증유의 재앙이라 할지라도 무조건 두려워해서도 안 되며, 그것이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맹신적 왜곡된 신앙을 가져서도 안 된다. 동일한 시대 동일한 형편 가운데 처해있는 연약한 이웃을 기억하는 가운데 올바른 자세를 유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모든 성도들은 어려운 재난을 당할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지혜로운 처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것과 분명한 차이가 나며,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무조건 칭찬과 인정을 받고자 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한다. 즉 그런 것을 통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려 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런 논리라면 여호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상 종교들이나 불신자들이 더 나은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은 이상한 논리가 성립된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잘못해도 된다는 말이 아닌 것은 당연하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교회와 세상 가운데서 마땅히 실천해야 할 고유한 의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에 속한 성도들이 기독교 초기부터 많은 오해와 더불어 심한 박해를 받아온 사실을 기억하고 있다. 초대교회와 중세 시대 교회들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시대에도 교회와 성도들은 세상 사람들로부터 끊임없는 오해를 받아왔다. 그것은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로부터 세상의 시대적 상황에 동조하지 않은 채 비협조적이라는 데서 발생하는 문제들 때문이었다.

초대교회는 로마제국으로부터 엄청난 오해를 샀다. 심지어는 교회가 시행하는 성찬식에 연관된 오해로 인해, 기독교회에 속한 자들은 비밀집회를 하며 불건전한 밀의(密儀)를 행한다는 소문이 나돌기도 했다. 그들이 매 주일 정기적으로 모여 인육(人肉)을 먹는다는 식으로 소문이 퍼져나갔던 것이다. 그와 같은 일이 발생했을 때도 교회는 굳이 그에 대한 적극적인 해명을 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로마 제국의 네로 황제는 로마시에서 일어난 대화재사건에 대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누명을 씌웠다. 황제의 욕망과 더불어 정치적인 돌파구를 마련하기 위해 로마를 불타게 했으며 기독교인들을 그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이다. 당시 로마 제국이 기독교인들에게 부당한 누명을 씌워 엄청난 박해를 가할 때도 교회는 그들에게 좋은 평가를 받고자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는 대신 고통을 택했다.

오늘날 우리 역시 세상에 살아가는 불신자들로부터 인정과 칭찬을 받기 위해 무언가를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성경과 믿음의 선배들이 보인 교훈에 충실하게 살기 위해 애쓸 따름이다. 따라서 ‘코로나-19’로 인해 심각한 위기의 국면에 처한 우리도 그와 같은 마음가짐을 가져야만 한다.

물론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경우에도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쳐서는 안 된다. 그와 더불어 여전히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무서운 재앙을 비롯한 어떤 힘든 문제가 발생할 때 그에 대한 반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는 교회와 그에 속한 성도들은 현실적인 재앙이나 질병 감염에 대한 불안감보다 천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본질적인 의미에 더 큰 비중을 두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다.

6. 교회와 공예배에 관한 문제

참된 신앙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배경으로 한 고백과 그것을 기초로 한 삶이 실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단순한 개인의 종교적인 신념이 아니라 공교회를 통해 드러나는 고백적 언약이 필수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관념적 신앙에 머물게 되며 시대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주관적인 신앙에 빠지기 쉽다.

이 세상에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피로 값주고 사신 하나님의 몸된 교회이다. 그리고 교회의 가장 소중한 필수적인 사명은 매 주일 언약 가운데서 하나님을 공적으로 경배하는 일 곧 공예배이다. 이는 개별적인 판단에 따른 행위가 아니기 때문에 개인의 경험적 취향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지상 교회는 도저히 피할 수 없는 불가피한 극단적 외부 상황이 아니라면 스스로 공예배를 포기하려는 입장을 가져서는 안 된다. 현재의 교회를 존재케 한 역사적 신앙이 계승되어 온 중심에는 매 주일 시행되는 언약적 공예배가 존재하고 있었다. 따라서 지금처럼 심각한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도 지상 교회는 세상의 이목이나 인간들의 일시적인 판단으로 인해 공예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런데 현재 한국 기독교 가운데는 우려할만한 일들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경기도에서는 지난 3월 17일 도내 137개 교회에 대하여 주일 예배를 제한하는 ‘행정 명령’을 내렸다. 만일 그 명령을 어기게 되면 교회를 강제 폐쇄할 뿐 아니라 300만원의 벌금을 물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서울시에서는 그 며칠 후인 3월 20일, 다가오는 주일(3월 22일)부터 교회와 예배에 대한 ‘지도 감독’을 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그리고 그에 불복할 경우 집회 금지를 위한 ‘강제 명령’을 내리겠다고 했다. 또한 예배 강행으로 인해 바이러스 확진자가 발생하게 될 경우 해당 교회에 대하여 진단, 치료, 방역 등에 들어간 모든 경비에 대한 구상권을 청구할 것이라고 했다.(★이는 교회에 대한 협박성 논조에 지나지 않는다. 이 말이 타당성을 띠기 위해서는 모든 경우에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한다. 먼저 심각한 감염이 발생한 신천지 집단에 대한 구상권을 청구해야 하며, 공직자들이 공무 중에 감염되었다면 그에 대한 구상권도 청구해야 한다. 그리고 요양보호소 등 집단 시설에 대해서도 동일한 적용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 교회에만 그런 요구를 한다면 교회에 대한 협박성 행정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교회는 그것이 실제로 적용되는 것과 상관없이 정부의 어처구니없는 그런 논리를 받아들일 수 없다.)

급기야는 국가 차원에서 3월 22일 주일부터 전국적으로 시행될 특별 수칙과 더불어 행정 명령을 내렸다.(★국가가 제시하는 일곱 개 수칙은 <예배당에 들어가기 전 발열, 기침, 인후통 유무 확인>, <마스크 착용>, <손 소독제 비치>, <신도들 간 2m 이상 거리 유지>, <식사 제공 금지>, <예배당 소독> <예배 참석자 명단 작성> 등이다. 이런 사안은 정부가 교회에 명령을 내릴 것이 아니라 협조를 요청할 수 있는 문제이다. 그리고 이 가운데 <2m 이상 거리 유지> 조항은 이해하기 어렵다. 만일 그렇다면 일반 관공서나 자동차와 기차 등의 승객들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예배 참석자 명단 작성> 요구는 쉽게 동의하기 어렵다. 그것은 사생활 공개와 개인 정보유출에 해당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범죄혐의가 없는 상태에서 그와 같은 보고를 강제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 교회의 경우 앞서 언급된 두 가지 사항 이외에 대해서는 국가의 요구와 무관하게 그동안 철저히 시행해오고 있다.) 

물론 그 대상에는 기독교회의 주일 공예배가 포함되어 있다. 정부가 제시한 수칙을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 그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경찰복 차림의 경찰과 공무원이 교회 내부로 들어와 모든 상황을 검증한다고 발표했다. 이는 교회가 국가의 간섭 아래 있다는 의미가 되며 어떤 이유에 의한 형식이든 간에 국가가 행정 명령권을 가지고 교회의 공예배를 지도 감독하는 형국이 된다.(★국가는 3월 22일(주일)부터 4월 5일(주일)까지 15일간 한시적 기한을 정해 행정 명령권에 근거한 주일 예배를 지도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서 세 번의 주일을 포함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이는 형식적으로 볼 때 교회를 겨냥하고 있는듯한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우리는 어떤 사유와 형태로든 국가가 교회를 상대로 특별한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 교회가 범죄와 연관된 실정법을 어기지 않는 한 교회에 대한 국가의 명령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공예배 시간에 불신자인 경찰과 공무원이 들어가 감독을 한다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위기를 겪는 지금의 경우, 교회를 향해 협조 요청을 할 수 있는 사안에 대하여 국가가 굳이 명령을 내린다는 것은 책임 공직자들의 지극히 어리석은 판단에 지나지 않는다.

일반적인 논리에서 볼 때도 이는 공평하지 않은 처사라 할 수밖에 없다. 정교분리를 원칙으로 하면서, 교회는 어떤 경우라 할지라도 국가에 대하여 그에 상응하는 행동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도 교회는 국가의 퇴폐적인 행태에 대하여 명령은커녕 구속력 있는 실제적 요구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 아닌가?

국가가 반성경적인 동성애와 동성 결혼을 허용하거나 장려한다고 할지라도, 교회는 그에 대한 명령은커녕 비판조차 할 수 없는 나라들이 얼마든지 많이 있다. 또한 국가가 어린 학생들에게 성경에 반하는 진화론을 가르쳐도 교회는 그에 대한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이와 같은 불합리하고 잘못된 것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어도 지상 교회가 가지는 물리적인 힘이 전혀 없다. 따라서 교회가 국가에 명령을 내리지 않듯이 국가도 교회를 향해 일방적인 명령을 내려서는 안 된다.

‘코로나-19’의 확산으로 인한 위기의 분위기가 조성되자 공예배를 일시 중단한 다수의 교회들에서는 화상을 통한 온라인 예배를 활성화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성도들이 회집하는 온당한 공 예배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공예배는 원칙적으로 성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며 성찬의 의미에 참여하는 가운데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많은 교회들이 채택하는 온라인 예배가 되풀이될 경우 나중에 닥치게 될 의외의 부정적인 문제를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잖아도 우리 시대에는 건전하다고 할 수 없는 소위 ‘가나안 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개체적 교회 공동체에 속하는 것을 거부하는 자들이 많이 생겨난 상태이다. 자칫 잘못하면 온라인 화상 예배를 통해 교회의 공예배에 참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의주의적인 사고에 빠질 수 있는 길을 틔워주게 된다.

교회의 지도자들은 지금의 상황이 극한 전염병으로 말미암은 매우 특별한 경우라고 말하지만 미성숙한 교인들에게 자기변호를 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게 될 우려가 따른다. 장차 교인들 가운데는 편의주의에 빠져 자기가 속한 교회를 향해 가정에서의 모임을 위한 온라인 예배 중계를 요구할지 모른다. 나아가 이미 기독교 방송에서 시행하는 다양한 설교를 들으며 집에서 예배를 보는 것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주장하는 자들은 많이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이로 말미암아 확대 발생할 수 있는 역기능에 대해서는 여간 깊은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매 주일 시행되는 공 예배에서는 교회 가운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더불어 성찬과 축도에 연관된 공적인 의미 실현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각 개인 성도가 머리에 떠올리는 관념적 기억과는 구별되는 개념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공적으로 경배하는 주일 공예배는 성도들의 실제적인 회집을 전제로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한국의 많은 교단 교회들은 지난 2월 23일부터 공 예배를 중단하면서 국가적 위기를 맞아 질병 차단을 위해 자발적이자 선제적으로 예배를 중단한다는 선언을 했다. 그와 같은 상황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확산되어 가고 있는 형국이다. 그렇게 시작된 주일 공예배 중단이 한달 반 가까이 되어 벌써 여섯째 주일을 눈앞에 두고 있다.

필자가 목회하는 실로암교회에서는 그동안 공예배 모임을 지속해왔다. 앞으로도 자발적인 공예배 중단은 없을 것이다. 주일 공예배를 통한 교회의 실제적 중심체는 지속적으로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우리 교회에서는 인터넷을 통한 설교 중계가 아니라 해당 주일날 공 예배에 참여하지 못하는 성도들의 가정에 공예배 순서지와 설교문, 장로의 대표기도문 등을 보내주고 있다. 그것을 중심으로 가장(家長)이 가정에서 예배를 인도하며 설교문을 대독하도록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에서 회집하여 공 예배를 보는 성도들의 모임을 기억하며 그에 간접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다수 교인들은 형편에 따라 실제 주일 공예배에 참여하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각 가정에서 예배를 보며 본 교회의 주일 공예배에 간접 참여하기도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로 연결된 교회 공동체의 구심점 있는 공예배를 구체적으로 염두에 두는 가운데 위기의 상황 중에서도 주일 공예배가 지속되는 것이다.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바는 앞으로 현재의 위기 상황보다 훨씬 심각한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과 같은 주일 공예배 중단을 시도했던 교회들 가운데는 한두 주일 정도면 끝날 것이라 기대했던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벌써 다섯 주일이 넘어버렸다. 앞으로 이와 같은 상황이 몇 달간 혹은 그 이상 지속이 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또한 우리가 특별히 경계해야 할 점은 공예배를 가볍게 여기면서 이른바 생활 예배를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는 굳이 주일날 교회를 통한 공예배에 참석하지 않아도 일상생활 가운데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논리이다. 이에 대해서는 여간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자칫 실체적 유기체로서 개체 교회를 무시하는 무교회주의를 장려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지금의 극한 위기의 상황에서 그와 같은 주장을 하게 된 이유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온전한 주일 공예배와 분리된 상태에서는 올바른 생활 예배가 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매 주일 언약 가운데서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공예배를 소중히 여기며 그에 성실하게 참여할 때 비로소 성도들의 삶 가운데서 생활 예배가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교회에 속한 성숙한 성도라면 주일 공 예배와 분리된 생활 예배가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7. 맺는 말

타락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인간들에게는 항상 다양한 재난들이 존재해 왔다. 이는 세상에 있는 교회와 성도들도 그와 동일한 위기 가운데 처해 있었음을 말해주고 있다. 14세기 이후 중세 유럽에서 발생했던 페스트(Pest)는 전 유럽인들과 교회와 성도들 가운데 심각한 문제들을 야기했었다.

당시 믿음의 선배들은 극단적인 위기의 상황 가운데서 온전한 신앙을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고통스러운 위기를 영적인 측면에서 보아 발전적인 기회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견디기 쉽지 않은 위기의 상황을 거치면서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그 신앙 정신을 계승할 수 있어야만 한다.

우리가 결코 잊지말아야 할 바는, 앞으로 이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고 할지라도 교회가 처신해야 할 근본적인 자세가 유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지금처럼 무서운 역병으로 나타날지 아니면 끔찍한 전쟁으로 나타날지 알 수 없다. 나아가 대규모의 산발적 화산폭발이나 대지진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뿐만 아니라 심한 기근이나 홍수 등을 통한 자연 재해, 혹은 인간들이 그동안 만들어낸 과학 문명이 부메랑이 되어 무서운 재앙으로 되돌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그렇지만 분명한 사실은 인간들의 역사 가운데는 그와 같은 끔찍한 역병 재앙들이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인류는 그동안 다양한 형태의 재난을 수없이 많이 경험해 왔다. 특히 우리는 근래에만 해도 돼지 역병, 조류 독감, 광우병 등을 통한 재해의 무서움을 맛보았다. 그런데 앞으로 개와 고양이를 통한 무서운 인수(人獸) 공동의 전염병이 생겨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현재 겪고 있는 위기 가운데서 지상 교회는 장차 발생할지 모르는 그에 대한 최소한의 대비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번 ‘코로나-19’가 발생한 후에도 인간과 동물 간의 상호 전염에 대한 염려로 말미암아 두려운 마음을 완전히 떨치지 못하고 있다. 얼마 전에는 홍콩에서 애완견이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보균한 사실이 발표되었다. 짐승이 보유한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직접 전염된다는 보고가 없다고 하니 우선은 다행이기는 하다. 그렇지만 만일 애완동물을 통해 인간에게 악성 바이러스가 감염이 된다면 그것은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엄청나게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 분명하다.

만일 앞으로 개와 고양이 등 애완동물을 통한 또 다른 변종 바이러스가 생겨나 인간들에게 감염시킨다면, 어떤 일이 발생하게 될지 여간 신중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앞서 언급한 돼지, 닭, 소 등은 인간들과 분리된 채 별도의 공간에서 사육되는 동물들이다. 하지만 개와 고양이는 인간들이 반려동물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채 인간들의 삶의 공간인 집안과 방안에 들어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상태이다.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지만 만일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인류는 그 전에 경험하지 못한 엄청난 혼란에 빠질 것이 틀림없다. 개와 고양이는 언제든지 밖에 내다 버릴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은 상상을 초월하는 인간들에 대한 감염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이미 우리는 개에게 마스크를 씌워 가슴에 안고 다니는 사람들을 쉽게 보고 있지 않은가? 특히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에 대한 선제적 대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상식적이고 신실한 교회라면 굳이 국가가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이미 질병 예방을 위한 중요한 수칙 내용들을 잘 지키며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우리는 교회와 그에 속한 목사 장로들이, 국가와 그에 속한 공직자들보다 판단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이웃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교회가 훨씬 더 민감하게 그 고통에 반응한다. 따라서 국가에서 보낸 경찰이나 공무원들이 성도들을 점검하는 것보다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직분자들이 훨씬 더 정확하게 점검할 수 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위기 상황 가운데서 ‘코로나-19’보다 훨씬 무서운 근본적인 죄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상적인 바이러스를 통한 역병이 아무리 무섭다고 할지라도 본질에 해당되는 죄보다 무섭지 않다. 역병은 매우 고통스럽지만 언젠가는 지나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의 죄성은 그렇지 않다. 우리는 극한 위기의 시기를 보내며 죄에 빠진 인간에 연관된 문제점을 분명히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타락한 세상은 어떤 형태로든 하나님의 교회를 끊임없이 위협하고 있다. 사탄은 지상 교회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리를 허물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악의 세력은 지금과 같은 무서운 역병을 비롯한 다양한 재앙을 통해 성도들의 모임을 방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악한 자에게 속한 자들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교회의 무리를 극도로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진정으로 경외하는 성도들은 이 힘든 위기의 과정을 거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사탄의 계략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있어야만 한다.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과연 누구와 싸워야 하고 무엇을 방어해야 하며 어떤 가치관을 소유해야 하는지 분명한 입장을 유지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심각한 위기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방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상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와 같은 위기의 상황에 대하여 지나치게 불안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한편 잘못된 신념에 근거하여 ‘그 정도는 별 것 아니다’는 식의 무모한 사고와 행동을 하는 것도 위험하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을 기억하는 가운데 신중한 자세를 가지되 보다 중요한 본질에 대한 관심과 영원을 향한 소망을 소유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 예배를 지속하는 교회와 성도들을 국가에 대한 비협조적인 무리로 간주하는 일방적인 공격은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예배 중단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멀리 보지 못하는 어린 교회와 성도들에게 잘못된 힘을 실어주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같은 주장은 시대에 편승한 개인적인 종교 신념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지상 교회를 위한 올바른 자세라 말할 수 없다.

만일 지금과 같이 예배를 중단하는 일이 앞으로 몇 달간 혹은 일 년 이상 지속된다면 교회는 와해 되지 않을까? 물론 우리는 그와 같은 긴 기간 동안 이 위기의 상황이 종결되지 않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 주일이건 한 달이건 일 년이건 교회가 그 본질적인 의미를 알고 실현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게 다루어져야만 한다. 역사를 섭리 가운데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극한 위기의 상황 중에 올바른 대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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