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아들의 비유

오늘 본문은 두 단락으로 되어 있다.


앞 단락(23-27)은 유대교권주의자들이 예수의 권위에 도전하고 있다. 


네가 무슨 권위로 이런 일을 하느냐 또 누가 이 권위를 주었느냐”(23)라고 물었다.

,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께 이런 질문을 했을까? 성전을 관리하는 주체인 종교지도자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시장으로 변한 성전을 보고 둘러엎으셨다. 또한 열매 맺지 못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자 나무가 말라죽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22)고 하셨다.

이 사건에 대해서 종교지도자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무슨 권세로 이렇게 했느냐? 누가 너에게 이런 권위를 주었느냐? 따지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전이 성전의 기능을 잃어버린 것을 보고 거룩한 분노를 가지셨다. 그리고 장사하는 모든 사람들을 내쫓았다.

종교지도자들이 이런 상황을 보고 어떤 마음을 가져야 바른 마음인가? 우리들이 기도하는 성전을 잘못 관리해서 시장으로 만들었으니 미안합니다. 성전을 다시 잘 관리하겠습니다. 성전의 기능을 회복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해야 한다. 이것이 유대종교지도자들이 가져야할 마음의 자세이다.

그런데 유대교권주의자들은 오히려 예수를 향해서 누가  너에게 이런 권세를 주었냐고 몰아세우고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예루살렘 성전에서 그들은 자신의 주머니를 채우고 있었다. 성전 고유의 목적인 예배보다, 시장 상인들로부터 자릿세를 받고, 돈 바꾸는데 이익을 얻고, 짐승을 팔며 이익을 추구했다.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무리들을 내쫓고 둘러엎었다. 그것이 기분이 상한 것이다. 자신의 이익에 손해를 끼친 것이다. 누가 너에게 성전에 와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라 했느냐? 누구로부터 그런 힘을 받았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이런 불한당 같은 사람들이 1세기에만 있었을까? 아니다.

오늘날 현대교회는 더 많을 것이다. 교회가 자신의 이익을 얻는 주머니 창구로 사용한다면 그것은 유대교권주의자들과 똑같은 불한당이다.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배를 채우고, 사업의 통로로 사용하고, 온갖 협잡꾼들이 난무하고 있다. 오늘날 현대교회에서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교회에서 자신의 이익을 얻는 무리들이 서로 싸우는 경우가 많다.

예수님이 대답 대신에 유대교권주의자들에 물었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로부터 왔느냐 하늘로부터냐 사람으로부터냐”(25).

유대교권주의자들은 참으로 교활하다. 요한의 세례가 어디서부터 왔는지 모른다고 한다. 어느 한쪽을 말했다가는 논리적 함정에 빠지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왔다고 하면 어찌하여 그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고, 사람으로부터라고 하면 사람들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기 때문에 백성들이 무섭고, 그래서 유대교권주의자들은 모른다고 했다.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고 순수하지 못한 것을 보고 교활하다고 한다. 교권주의자들은 과거나 지금이나 참으로 교활한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타락한 종교인들은 교활한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지혜라고 한다. 교활한 것은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다. 겉은 선하고 속은 악한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입으로는 믿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주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기도하십시다 라고 말하면서 속으로는 음흉한 계략을 꾸미는 무리들이다.

믿음은 성경의 말씀을 가감하지 않고 순수하게 따르는 것이다. 자기 입맛에 맞게 재단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말씀앞에 자신을 늘 비추며 살아가는 것이 바른 믿음이다. 자신의 이익에 손해가 나도 손해를 감수해서라도 바르게 살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선과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이다. 잘못했다면 용서를 구하는 것이 바른 신앙이다. 죄를 지었다면 회개하고 돌아서는 용기가 바른 신앙이다. 이렇게 삶 가운데서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이 종교인으로 전락하지 않는 길이다.

유대종교인들이 처음부터 교활한 신앙인이 아니었다. 그들도 처음에는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고 예배하며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쳤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타협하고, 적당하게 거래하고, 이웃보다는 자신의 이익이 점점 눈에 들어오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타락의 원흉이 되고 만 것이다. 말씀은 입에만 있고, 마음은 재 밥에 늘 가 있다 보니 어느새 콘크리트처럼 굳어버린 종교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오늘 본문의 두 번째 단락은 두 아들 비유이다(28-32).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고, 맏아들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이고, 둘째 아들은 세리와 창녀를 상징하고 있다.

아버지가 맏아들에게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했다. 네 가서 일하겠습니다. 하고 맏아들은 가지 않았다. 둘째 아들은 처음에는 포도원에 가서 일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후에 뉘우치고 포도원에 갔다.

예수님이 물었다. 둘 중에서 누가 아버지의 뜻대로 하였느냐? 둘째입니다.

예수님이 왜 두 아들의 비유를 유대교권주의자들에 하고 있는가? 그 이유는 당신들이 맏아들이라는 것이다. 맏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상속을 받는다. 맏아들과 같이 온갖 기득권과 종교적 특혜를 다 누리면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같이 말하지만 전혀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내신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세례요한의 말도 믿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말씀에도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하고 죽이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 아들과 같은 세리와 창녀들은 반항적이고 율법에서 벗어난 삶을 살지만, 뉘우치고 세례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예수님은 두 아들의 비유를 이렇게 결론을 맺었다.

세리와 창녀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31).

우리는 두 아들의 비유 말씀을 통해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

첫째는 성도들은 입으로만 주여 주여 하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성도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만 천국에 들어간다(7:21).

둘째는 하나님앞에서 모든 죄를 회개하면 된다. 늦는 것은 없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지 않았다. 그러나 뉘우치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했다. 하나님앞에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모든 불의로부터 깨끗하게 용서해주신다(요일1:9). 이것이 아버지의 사랑이다. 아버지의 용서는 한계가 없다. 그것이 십자가의 사랑이다.

셋째는 하나님 나라는 혈통이나 지식이나 모태신앙으로 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말씀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으로 가는 나라이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말씀의 해설자요, 하나님 나라의 유업을 얻을 자라고 자처했다. 하나님 나라는 교만으로는 절대로 가지 못한다. 하나님 말씀에 겸손하게 순종했던 세리와 창녀들에게 주어졌다.

신앙이란 믿는 것이다. 누구를 믿는가? 바로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같은 말이다. 말씀을 계시라고 부른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하나님으로 나타난 것이 계시이다. 드러난 계시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의 길이다.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서울신대신학박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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