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두려움 그 자체뿐이다.” 대공황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한 카리스마 넘치는 연설이다. 코로나19가 창궐하는 요즘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인들은 ‘길가메시’ 이야기에 등장하는 괴물 훔바바를 무서워했다. 그리스 신화에서 두려움에 해당하는 ‘φόβος’(포보스)는 강력한 신이다. 그리스 신화의 두려움과 공포의 신(神) Phobos에서 나온 말이다. Ares의 아들이다. 전쟁의 신이다. 공포를 자아내는 모습을 하고 있다. 두려움은 압박감과 불안을 조성한다. 두려움을 없애는 일은 필요하다.
Edvard Munch는 ‘절규’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두려움을 그렸다. 겁에 질린 남자의 눈과 입, 피를 떠올리게 하는 붉은 구름, 꿈틀거리는 검푸른 바다, 사선 방향의 다리로 소름 끼치도록 오싹한 감정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게 해주었다. 두려움은 이 세계 안에 만연해 있는 힘이다. 혼자 남을 두려움, 남들과 다른 행동을 할까의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주위 시선에 대한 두려움, 실패할 두려움, 거절당할 두려움, 경제적인 두려움, 초대의 두려움, 외국어를 못 배우는 두려움, 인기가 없을까 두려움, 단점이 남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움 등이다. 성경에서 두려움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맨 처음 언급된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한다. “내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창 3:10). 두려움 그 자체가 또한 죄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다(레 26:17; 신 28:25, 66).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두려움에 사로잡혔기에 재능을 사용하지 못하였다(마 25:25). 두려워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계 21:8).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두려움 혹은 경외에서 비롯되는 샬롬은 두려움을 물리치는 가장 강력한 맞수다. David D. Burns는 ‘패닉에서 벗어나기’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두렵다’. 두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실제 외부 상황이 아니다. 내 ‘생각’이다. ‘두려움을 생각하는 내 마음’을 바꾼다. 두려움을 생각하는 방식이 바뀐다. 다양한 자극을 ‘두려움’으로 인식하는 사고방식 또한 바뀔 수 있다. 왜 불안과 두려움을 느끼는가. 과거의 상처와 연관된 비논리적 사고에서 비롯된다.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면 공포를 느끼는 방식 또한 바꿀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에서 ‘두려움’은 성도들에게 사용될 때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다(11:18; 14:7; 15:4; 19:5). 땅의 거민들에게 사용될 때는 심판에 직면하여 갖게 되는 공포를 가리킨다(11:11; 18:10, 15). 위험이나 불안을 과도하게 느끼고 이를 피하려는 증상을 포비아, 즉 공포증(恐怖症)이라 부른다.
1. 두려워하지 말라
한국프로야구 롯데자이언츠의 최초의 외국인 감독은 Jerry Royster이었다. 개막전이 시작되자 1루측 덕아웃에 있는 화이트보드에 적었다. ‘No Fear.’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환상 중에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는 네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창 15:1) 서머나 교회에게 말씀하시는 그리스도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다. 장차 임할 고난을 인하여 두려워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의 특징 중 하나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합당한 존경과 경의를 바치는 것이다(창 20:11).
그리스도는 임박한 고난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다. 그들의 상황이 더 나빠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신자들이 직업 길드에서 배척된다. 재산을 잃는다. 빈곤함을 경험한다. 어떤 사람들은 옥에 던져진다. 심지어 순교를 한다. 둘째 사망은 당하지 않는다. 신자들은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참고, 딤후 3:12). 삼구(三懼)는 밝은 임금이 나라를 다스림에 응당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세 가지 일을 말한다. ‘한시외전(韓詩外傳)’에 공자(孔子)의 말로 인용되어 있다. “첫째는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 그 허물을 못 들을까 염려하고, 둘째는 뜻을 얻고 나서 교만해질까 걱정하며, 셋째는 천하의 지극한 도리를 듣고도 능히 행하지 못할까 근심한다(明主有三懼. 一曰處尊位而恐不聞其過, 二曰 得志而恐驕, 三曰聞天下之至道, 而恐不能行).” 바울은 고난과 약속 두 가지를 터득하였다. 환난에 직면한 그리스도인의 균형감각이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 8:18). 현재 고난과 장차 올 고난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다. 영광이 올 때까지 인내할 과정이다.
임박한 고난의 위협은 두려움을 야기한다. 믿음의 공동체 구성원들은 고난을 당할지라도 버림을 받지 않을 것이다. 고난을 당하지만 부활을 통해 생명으로 나아갈 것이다. 두려움을 이겨내야 한다.
“두려워하는 이들에겐 시간이 매우 빨리 지나간다.” 셰익스피어의 글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성경에 자주 등장하는 주제다. 박해 서신들 속에서 계속 언급되고 있다. 1:17에 ‘두려워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μὴ̀ φοβοϋ̈’(메 포부)는 통상적이고 관용적 표현이다. 서머나 교회에 주시는 ‘두려워 말라’에 해당하는 ‘μὴ̀δεν φοβοϋ’̈(메덴 포부)는 앞으로 겪을 고난들 중 어느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이다.
2. 앞으로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귀는 자신의 앞잡이를 이용해서 서머나 그리스도인 중 일부를 ‘옥에 던져’ 넣을 것이다. ‘십 일 동안’ 지속될 것이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예언이면서 격려다. ‘~하지 말라’에 해당하는 ‘μηδείς’(메데이스)는 강조의 의미다. 결코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말라’이다. 뇌는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두 가지 신경 시스템이 존재한다. 낮은 시스템(low road)과 높은 시스템(high road)이다. 전자는 임박한 고난에 대한 정보를 시상(thalamus)을 통해 판단한다. 편도체에 전달된다. 부정적이거나 위험한 요소에 반응을 보이도록 돼 있다. 후자는 시상을 통해 대뇌피질로 전달된다. 고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연관시킨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을 기반으로 최적화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앞으로 받을 고난이 남아 있다는 음성을 들어야 한다. 피할 수 없다. 두려움은 미지의 것이나 불가해한 것에 대한 인간적인 반응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도 들어야 한다. 고난 있고 두려움도 있다. 그 두려움의 상태에 머물러선 안 된다. 고난이 종종 하나님의 최우선적인 계획, 목적, 능력의 맥락에서 일어난다. 두려워하지 말고 받아들여야 한다.
임박한 박해와 종말에 대한 기대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순교와 마지막 날과 연계되어 있는 것과 같다.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의 노랫말이다.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한마디로 ‘웃프다’. ‘웃기다’와 ‘슬프다’를 합한 말이 ‘웃프다’다. 웃기지만 왠지 눈물이 나는 복잡한 감정을 드러낼 때 유용하다. 웃기지만 서글픈, 복잡한 심경발로다. 그야말로 참으로 ‘웃픈’ 일이다. 장차 임할 고난을 생각하면 슬프다. 낙심이 된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용기를 가져야 한다. 두려워말아야 한다. 그리스도 자신도 서머나 교회와 같은 고난을 경험하셨다. ‘죽었다고 살아나셨다.’ 십자가 없이는 왕관이 없다. 죽음이 끝이 아니다. 고난 너머에 영광이 있다. 사탄은 시험을 한다. 슬픔을 준다. 배후에 하나님이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다.
‘웃프다’로 표현하는 ‘웃픈 현실’은 대개 어이없으면서 한심한, 황당하면서 괴로운 현실이다. ‘웃픈’ 현실이 벗어날 수 없는 현실임을 느끼기에 ‘웃픈 감정’은 결국 아픔으로 남는다. 장차 고난은 슬픈 현실이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웃는 것 이상의 메시지다. ‘웃프다’는 부정적이다. 슬프다에 방점을 찍는다. 장차 받을 고난과 두려워하지 말라는 후자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우한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을 Pandemic, 즉 세계적 대유행 병이라 선언했다. WHO의 전염병 경보 총 6단계 중 최고 단계이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일어날 일을 두려워한다. 확진자는 졸지에 ‘우리’에서 분리된다. ‘위협 세력’이 된다. 즉각 강제 격리된다. 감염 의심만 보여도 자가 격리 된다. 격리는 공포를, 공포는 혐오를 낳는다. 혐오는 차별과 폭력으로 이어진다. 바이러스가 주는 육신의 고통보다 두려움이 주는 마음이 환자를 무너뜨리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암 통보를 받으면 으레 허무감과 분노, 자책,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마음이 약해져 삶의 의지를 잃고 만다는 얘기다. 시편에서 사람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자연의 재난과 질병의 목록을 열거하고 있다. 시편 91:6절에서 역설적으로 노래한다.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그 이유를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라”는 것이다.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은 일사병이나 열에 지치는 병일 것이다.
우한 코로나는 쉽게 사그라들기 어렵다. 풍토병으로 정착하거나 계절성 감염병으로 갈 가능성이 크다. MERS는 국내에서 퇴치됐다. 중동에선 산발적으로 발생하는 풍토병이 됐다. 홍콩 독감과 신종 플루는 해마다 찾아오는 계절독감화했다. 더 두려운 것은 사르트르 말처럼 “타인이 지옥이다(L'enfer, c'est les autres).” ‘봉쇄’ ‘격리’ ‘결핍’이라는 조건이 너는 나한테, 나는 너한테 지옥이 된다. 이것이 “타인이 우리를 판단하는 잣대로 우리 자신을 판단한다”는 원래 뜻이다. 앞으로 ‘타인 혐오’보다 무서운 ‘자기 모멸’에 빠질 수도 있다. 물질도 생명체도 아닌 바이러스는 여기까지 인류를 물고 늘어질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 환경과 역경이 아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다(시 111:10). 정직함의 열쇠다(잠 8:13). 하나님의 명령을 지킬 수 있는 원동력이다(겔 12:13).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람들의 특징이다(시 147: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