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구 박사(전 총신대, 대신대 총장)

나는 목사로서 52년 동안 신학교 교수를 하면서도 여러 가지 일을 감당했다. 나는 농촌개척교회도 했고, 군목도 했고, 총신에서 교목도 했고, 총신대학교회를 개척해서 13년간 목회도 겸했었다. 특히 교수하면서도 사목(社牧)도 5년 가까이 했는데, 「벽산 그룹의 회장 김인득 장로님」의 초청으로 중앙시네마(극장)에서 매주 토요일에 본사 사원들의 전도를 위해서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를 했었다. 그 기간에는 벽산그룹 계열사인 용산의 <한국 스레트>와 영등포의 <동양물산>에서도 전도 설교를 했다.

1970년 중반에는 기업에서 예배를 드리는 것 즉, 직장예배를 드리는 것은 벽산그룹이 유일했다. 오늘날은 한국에 전국직장예배 연합회가 있을 정도이지만, 당시 벽산 그룹의 예배는 직장예배의 원조격이었다. 특히 승동교회 김인득 장로님의 부인 윤현의 권사의 열심으로 이 일이 이루어졌다. 그런데 이 사역을 전에는 C.C.C운동의 윤남중 목사가 얼마간 도왔으나, 나의 귀국 후 총신 복직과 동시에 그 역할이 내게 맡겨지게 되었다. 
 
지금부터 45년전에 된 일이지만, 벽산그룹 사원들은 토요일 아침 출근 한 시간 전에 와서 예배부터 드리고 나서 업무를 시작하는데, 그룹본사 직원들에게는 여간 부담스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직원들은 그룹 회장의 지시사항이니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예배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모임이든지 믿음의 성도들은 5% 내외인데, 신 불신간에 모두 예배에 참석 하도록 하는 규정은 다소 무리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회장의 방침이니 누구든 감히 항명할 수도 없었다.

나는 총신대의 교수로서 그 일을 하면서,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할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참으로 감사했다. 문제는 사원 대부분이 불신자들이지만 그냥 교양강좌 비슷하게 말할 수는 없고, 좋은 기회이니 그들에게 성경을 알아듣기 쉽게 강해했었다. 누가 내 설교를 듣고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우직하게 복음을 그냥 전했다. 본사 직원들의 학력은 대부분 대졸 이상이어서, 거기에 맞춰 설교했지만, 영등포의 동양물산에는 당시에 이른바 단순노동자들이 모여 있는 데서도 나는 우직하게 성경을 전했다. 영등포의 이른바 공돌이 공순이(이 말은 그들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고 당시에는 그리 불렀다는 뜻이다) 앞에는 나의 총신의 제자인 이계자 전도사의「특별 찬양자」를 대동하기도 했다. 그 찬양 중에는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 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라는 가스펠 송이 먼저 그들의 심령을 움직였다. 나도 그들에게 듣기 좋은 말로 설교 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할 수는 없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주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소망이며 위로자 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성경대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복음적 설교 방법이 불신자들 앞에 무슨 효과가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도 가끔은 하기도 하였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우격다짐으로 그룹의 회장의 지시사항으로 직장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나 같은 신학대학 교수가 설교하는데도 열매가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감사하게도 직장예배에 참석하던 사람 중에는 나의 미련한 설교를 듣고 중생의 체험을 얻고, 후일 신학교에 들어가 목사가 되었고, 총회의 임원까지 지낸 분도 있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저 성경을 해석하여 가르쳤을 뿐인데, 그 변화의 뒤에는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것이다. 사실 나는 설교만 거의 60여년 가까이 했었다. 내 메시지의 모두가 청중들에게 모두 먹혀 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불신자들 앞에서 설교해도 100명 중에 몇 명은 정확히 그들의 마음 밭에 복음이 떨어져 큰 변화를 일으킨 것을 직접 보았다. 나는 이것을 「복음의 유탄(流彈)」이라고 부른다. 

현대는 너무나 목회 기술이 발전되고, 설교자들 중에는 엔터테인먼트를 사용하여 청중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고, 설교자 자신도 잘 모르는 철학적 연설을 하면서, 설교 하려고 하는 목회자들이 적지 않다. 나는 평생 신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설교는 쉬워야 하되 중학교 2학년 정도 수준의 말로 성경을 강해하고, 마치 생선 가시를 세심하게 발라 내듯이 본문의 뜻을 정확히 증거하고 성경을 하나님의 구속사적 안목에서 보면서 설교한다면 그 다음 몫은 성령께서 움직일 것이다」라고 가르쳤다. 지금도 나는 설교자가 먼저 <말씀의 포로>, <성령의 포로>, <은총의 포로>가 된다면 전도의 미련한 방법도 열매를 맺는다고 확신한다.

나는 오래 전에, 사당동 총신대학 옛날 건물의 강당에서 <칼빈주의 사상>을 강의 했었다. 옛날 총신의 구관 강당은 복도에서 안으로 들여다 볼 수는 없었지만, 복도에서도 교수의 강의하는 목소리는 들린다. 나는 강의할 때 언제나 확신에 넘치는 말로 뜨겁게 강의했다. 마치 설교를 하듯 말이다. 진리를 증거하는 데는 냉냉한 논리로 말 할 수 없었다. 그런데 바깥 복도에서 내 강의를 몰래 듣던 청소부에게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그분은 말하자면 <복음의 유탄>을 맞은 셈이다. 몇 년 후에 어느 잡지에 실린 「한만영 전도사의 고백」을 여기 실어본다.

「할렐루야! 주님의 은혜를 감사합니다. 저는 청소부였습니다.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청소 하던 중, 정성구 교수님의 강의를 우연히 듣게 되었는데, 어찌나 그 말씀이 달고 오묘했던지 그날 저는 “하나님, 저도 저런 강의를 들을 수 없나요?”라고 되뇌이면서 청소 일을 했습니다. 2년 후 수원신학교를 가게 되었고, 고 전윤기 목사님과 함께 봉사하다가 올 해 새신자 심방 전도사로 임명 받게 되었습니다. 목사님 목회아래 평신도 사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아름다운 용인제일교회에서 섬기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 드리며 순종하며 충성할 것을 다짐합니다」

오랜 후에 나는 그의 간증문을 읽고「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다」는 말씀을 다시 깨달았다. 미련한 전도의 방법으로 성령께서는 지금도 일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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