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복음 12장, 요한복음 14-16장

콘스탄티노플 신조(381년)

Credimus in unum Deum Patrem omnipotentem; factorem coeli et terrae, visibilium omnium et invisibilium.

Et in unum Dominum Jesum Christum, Filium Dei unigenitum, natum ex Patre ante omnia saecula, Deum de Deo, Lumen de Luminequem, Deum verum de Deo vero, natum [genitum], non factum, consubstantialem Patri; per omni facta sunt; qui propter nos homines et [propter] salutem nostram descendit de coelis et incarnatus est de Spiritu Sancto ex Maria virginine et humanatus [homo factus] est; et crucifixus est pro nobis sub Pontio Pilato [passus] et sepultus est; et resurrexit tertia die [secundum scripturas]; ascendit in coelum [coelos], sedet ad dexteram Patris; interum venturus, cum gloria, judicare vivos et mortuos; cujus regni non erit finis.

Et in Spritum Sanctam, Dominum et vivificantem [vivificatorem], ex Patre [Filioque] procedentem, cum Patre et Filio adorandum et conglorificandum, qui locutus est per sanctos prophetas.

Et unam, sanctam, catholicam et apostolicam ecclesiam. Confitemur unum baptisma in remissionem peccatorum. Expectamus resurrectionem mortuorum et vitam futuri saeculi. Amen.

우리는 한 분 하나님 믿습니다,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 모든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창조하심을, 그리고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아버지께로부터 영원토록 출생하신, 하나님에서 나온 하나님, 빛에서 나온 빛, 참 하나님에서 나온 참 하나님, 출생하셨지만 창조되지 않으며, 아버지와 동일실체입니다. 그를 통해서 모든 만물이 창조되었습니다. 그는 우리와 우리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땅으로 오셨습니다. 성령으로 인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성육신하시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에서 고통과 죽으심 그리고 장례되었습니다. 성경대로 사흘에 부활하셨고, 승천하시어 아버지 보좌 우편에 앉으셨습니다. 그는 산자와 죽은자를 심판하시기 위해서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 그의 왕국은 영원할 것입니다.

그리고 주(主)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고(혹은 발출하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리고 한 거룩하고 보편적이며 사도적 교회를 [믿습니다]. 죄사함을 이루는 한 번의 세례를 알며, 죽은자들의 부활과 오는 세대의 생을 소망합니다. 아멘.

우리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아멘.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독생자, 참 하나님으로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아멘. 아버지의 사랑과 성령의 감동과 감화가 넘칩니다. 아멘.

3조 신앙은 성령 하나님 고백입니다. 니케야 신경(325년)에서는 “그리고 성령을 [믿습니다]”라고 짧게 고백하였습니다. 그런데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그리고 주(主)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비교적 긴 문장으로 구성하였습니다. 1조와 2조 신앙과 비교해서 3조 신앙이 많으 보완된 것입니다. 니케야 신조(325년)에는 교회조가 없고, 호모우시온(homoousion)에 대한 명확한 확인과 아나떼마(Anathema, 저주)가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는 교리가 수동적 성격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325년과 381년 사이에 어떤 일이 발생하였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사도신조와 믿음의 규칙(regula fide), 니케야 신조,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325년 니케야 공회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주도적이었다는 평가를 뉴먼과 샤프가 밝혔습니다. 그런데 김소일은 공회의에 참석한 부제가 그렇게 활약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제언하였습니다. 공의회 진행에 관해서 구체적인 자료가 없기 때문에 추측을 해야 합니다. 아타나시우스는 328년에 33세의 나이로 알렉산드리아의 대주교가 되어 45년 동안 사역하였는데, 사역 기간 중에 5번 대주교좌를 박탈당하였고, 유배와 도피 생활이 17년이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 이해를 확정하였고, 신약성경목록 27권을 제언하였습니다.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는 아타나시우스를 “교회의 기둥”(Columna Ecclesiae)이라고 칭송하였습니다.

성령에 대한 논의는 『세라피온에게 보낸 서한들』(Epistulae ad Serapionem)에서 나타납니다. 아타나시우스가 3차로 유배되었을 때에 이집트 수도사들과 함께 지내던 356-362년 사이에 이집트 델타 지역 트무이스(Thmuis)의 주교 세라피온(Serapion)의 질문에 답변하며 왕래한 네 차례의 서신들입니다. 당시 이집트에서는 성경을 비유적(알레고리칼)으로 해석하며, 성령이 무로부터 나온 피조물, 즉 천사들 중에서 최고 위치에 있는 천사라고(근거 히 1:14) 주장한 트로피키(Tropici) 들이 있었습니다. 아리우스 집단은 성령을 두 위격과 다른 한 위격, 셋째 능력, 최고 원인으로부터 나온 셋째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리겐의 부류는 성령을 성부의 요청에 의해서 성자에 의해 만들어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조명과 성화의 원천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다음으로는 마케도니아주의자들(Macedonians) 또는 성령훼방파(Spirit against fighters, Pneumatomachians)입니다. 마케도니아주의자들은 성령을 하나님과 피조물의 중간 위체 있다고 보았습니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는 세라피온(Serapion of Thmuis)에게 보낸 서신에서 성령을 하나님과 다른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부류에 대해서 반박하였습니다. 성령도 성부와 성자와 동일한 하나님이심을 변증하였습니다. 첫째, 트로피키들의 부당한 성경 해석을 밝히며, 성경에 성령께서 삼위(아버지, 아들, 성령)로 제시됨을 제시하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 본체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신(발출) 하나님이시며, 생명과 성화를 부여하십니다. 이 아타나시우스의 주장이 콘스탄티노플 신조에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Dominum et vivificantem). 둘째로 삼위(triad)는 영원하며, 한 동일실체이고, 나눠질 수 없습니다(분할불가). 삼위, 아버지, 아들, 성령께서 한 실체로 분할불가하시기 때문에, 성령도 동일실체입니다. 신학에서는 본체는 분할불가하며, 위격은 구별되는 것으로 정리하였습니다 그럼에도 콘스탄티노플 신조에서는 성령을 동일실체라고 고백하지는 않았고, 아버지(와 아들)에게 발출하신 것으로,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일한 영광을 받으실 위격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셋째, 성령은 피조물에 생명을 부여하여 완성하시는 주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과 함께하도록(partakers)로 만들기 때문에, 신성을 가진 특성이 틀림없습니다(고전 3:16이하). 만약 성령이 피조물이라면 우리가 하나님 안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무한한 간격은 피조물이 절대로 접근하거나 연합시킬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타나시우스는 성령이 피조물이라는 주장(Tropici)을 부정하며, 하나님이라고 변론하였습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학은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이 계승하여 정립하였고,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회의에서 완결하였습니다. 첫째 신학자는 대 바실(Basil the Great, 329-379)입니다. 바실은 375년에 성령론(De Spiritu Sancto)을 정립하였고, 379년에 소천되었습니다. 바실의 성령론은 30장으로 구성하였고, 성령에 “동일실체”라는 어휘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바실은 소천하기 전 콘스탄티노플 대주교에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를 세웠습니다. 바실의 신학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azianzus, 바실의 친구)와 닛사의 그레고리우스(Gregory of Nyssa, 바실의 동생)가 정립하였고, 공교회 문장으로 확립하였습니다.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은 성령론을 체계화하여 삼위일체의 관계까지 정립하였습니다.

갑바도기아 신학자들은 반(半) 아리안인 마케도니우스(Macedonius)로 형성된 마케도니아주의자들(Macedonians) 또는 성령훼방파(Spirit against fighters, Pneumatomachians), 성령의 신성을 부정하고, 단순하게 하나님의 능력으로 평가한 것입니다. 고대교회의 아리우스(예수의 신성 부정)와 마케도니안(성령을 능력으로 평가함)의 주장을 계승하는 집단은 “여호와의 증인”입니다. 참고로 한국에서 형성된 기독교 이단은 한국의 가치를 강조하며 한국 땅에 토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국에서 형성된 이단도 유사한 패턴입니다. 정통 기독교는 땅에 강조가 없으며, 땅에 정착을 목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 에베소 교회 등이 소멸되었지만, 주께서 오시기 전까지 이 땅위에 교회가 존재할 것이라는 확신을 갖고 있습니다.

콘스탄티노플 신경 3조 성령에 관한 문장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리고 주(主)시며 생명을 주시는 성령을 [믿습니다].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시고(혹은 발출하시고)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시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 성령은 주(主)시며 생명을 주십니다. 성령을 믿습니다. 그럼에도 성령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믿음을 주시는 생명의 주이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께서도 독자적으로 사역하지 않으시고, 성령께서도 독자적으로 사역하지 않으십니다. 영원에서 예정된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주이십니다.

둘째,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에게서 나오(혹은 발출하시고)십니다. 아버지께서 근원이시고, 아들은 출생(발생發生, generatio)하시고, 성령은 나오심(발출發出, processio[spiratio])하십니다. 이 문장은 필레오케 논쟁(Filioque-Streit)으로 교회사에서는 중요합니다. 381년 문장에 서방교회에서 ex Patre procedentem(아버지에게서 나오시며)에 Filioque(아들)을 첨언하여 수정하기를 제언하였기 때문입니다. 서방교회의 톨레도에서 필레오케를 첨언한 문장으로 수정을 제언하였습니다(447년, 589년). 동방 교회에서는 per(통해서)를 첨언해서 해소할 것을 제언하기도 합니다(qui ex Patre per filium, 2차 니케아 공의회, 787년). 이 한 단어 때문에 1054년에 교회가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로 나뉘게 됩니다. 1965년 12월 7일에 상호 파문 선언(Videt Deus et judicet)을 취소하였다고 합니다. 서방교회와 동방교회는 분열 원인을 분석하며 교리상 차이를 인정하며 화합하는 구도를 확립하였고, WCC(세계교회들회의)를 형성하였습니다. 1054년에 필레오케 논쟁이지만, 사실상은 교회 수위권(primatus) 논쟁으로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수위권을 주장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필리오케 논쟁이 종료되었다고 하지만, 서방과 동방이 상호 교리 논쟁을 떠나 아가페 원리로 하나되는 것을 추구하기 때문에 교리 차이는 유지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지금도 정교회에서는 필레오케가 없으며, 천주교에 문장에는 있습니다. 장로파는 서방교회 전통에 있기 때문에 필레오케를 수용하고 있습니다. 동방교회는 아버지의 한 위격의 유일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고, 서방교회는 성경에 아들께서 보내신 부분이(요 14:26, 요 15:26, 빌 1:19, 행 5:3-4 등등) 많이 있기 때문에 필레오케를 첨언을 제언하는 것입니다. 단일발출(single procession)과 이중발출(double procession)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깊은 사색으로 진행될 때에는 중단하고 성경으로 복음전파로 돌아올 것을 제언합니다. 교회사에서 “깊은 사색(deep/all speculation)”은 “헛된 사색(idle speculation)”으로 진행됩니다. 깊은 사색이 되었다는 것은 논쟁이 발생된 때 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에게서 나오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셋째, 성령은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경배 받으시고 함께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성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아버지와 아들과 함께 동일하게 영광을 받으십니다. 성령께서 사람에게만 생명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창조 세계를 풍성하게 합니다. 현대신학에서 생태신학(Ecological Theology)이 있는데, 성령을 과도하게 부각시키며, 아버지와 아들을 낮추는 경향이 있습니다. J.I 패커(J. I. Packer)는 “조명등(floodlight)”이라고 표현했고, 데일 브루너(Dale Bruner, 1932-)는 성령을 “거룩한 수줍음(holy shyness)”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성령의 나타남은 성령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중보자 신앙에서 아버지와 성령의 영광이 함께 있다고 훈련하고 있습니다.

넷째, 성령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고 계십니다”입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령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는 구조를 밝혔습니다. 이것은 고대교회 열광주의에 대해서 엄격하게 거부함을 표현한 것입니다. 고대교회의 대표적 열광주의는 몬타니즘(Montanism)입니다. 2세기에 몬타누스(Montanus)에게서 시작된 체계로 금욕, 열정, 신앙의 정절, 순교를 강조하며, 천년기론(임박한 종말 강조)으로 구도화시켰습니다. 몬타니즘은 터툴리안(Tertullian, ?155-?230)이 가입할 정도로 위력적인 세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성령 하나님은 자기 말씀을 선지자들을 통해서 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선지자 직분이 있습니다. 구약의 선지자는 오실 메시아를 말씀했고, 선지자 예수는 자기가 메시아임을 말씀했고, 신약의 선지자들은 오신 메시야를 말씀했습니다. 특이하게 우리는 prophet을 “예언자(預言者)”가 아닌 “선지자(先知者)”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성경에서 선지자가 하신 예언(prophesy)은 단순하게 미래의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성경에서 미래의 일을 예시한 것은 선지자의 권위를 증명하는 것이고, 선지자의 일은 율법의 기능, 몽학선생의 기능을 정상적으로 하기 위함입니다. 실체이신 메시아께서 오신 뒤 몽학선생의 기능은 종료되었습니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도 선지자 직분이 있었는데, 신약의 선지자는 미래의 일이 아닌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사역을 성경 본문에 의거하지 않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은 성경 본문을 암송하는 것이 일반이기 때문에, 유대인을 위한 사역에서는 선지자 기능이 유효하였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선지자인 아가보와 빌립의 네 딸이 미래의 일을 예견하며 만류하는 것을 거부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행 21:7-14). 계시가 완료된 후,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없어진 경우(먼저 유대인의 법칙이 아닌 시대)에는 비문자적, 성경을 떠나서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참고로 불신자에게 복음을 전도할 때에 성경 본문이 없이 진행하지만, 교회에 들어와서는 반드시 성경을 읽은 뒤에 복음을 듣습니다. 불신자에게 성경을 읽히며 복음을 전도하는 것은 일반적인 방법이 아닐 것입니다. 성경은 신자가 읽어 유익을 얻을 말씀입니다.

우리시대에 거짓 집단들은 성령 이해에서 큰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충만하면 그리스도의 이름이 충만한 것으로 등식화시켰습니다. 성령충만한 증거는 그의 입에는 예수 그리스도가(엡 5:18), 그 행동에서는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는 것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참고 갈 5:22-23). 강력한 능력이 성령충만의 증거로 전혀 사용할 수 없습니다. 신비한 현상이 성령능력이 아닙니다. 성령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지금 선지자, 예언하는 자는 성경말씀을 읽고 말하는(per verbo, cum verbum) 목사입니다(계 1:3). 목사라도 성경없이 능력을 행하면 부당합니다. 우리는 직분의 권위가 아닌 복음의 내용에 순복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현상의 능력이 아닌 오직 복음의 내용, 성령께서 주시는 그리스도의 증언에 순복합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계 2:7, 11, 17, 29, 3:6, 13, 22).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은 “교회의 사자”가 역할을 수행합니다.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성경을 따라서 성령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정립하였습니다. 중세 로마 교회는 성령께서 하시는 말씀을 중지하고, 성찬을 중심으로 한 예전으로 전환시켰습니다.

우리는 중보자 신앙,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아버지와 성령께 합당하게 영광을 돌립니다. 아들의 이름이 가득하면 아버지의 영광이 가득합니다. 아들의 이름을 증언하시는 일과 성도를 거룩하게 하시는 일을 성령께서 하십니다.

참고, 창조의 영으로 성령은 공교회 신조에서 고백하지 않습니다. 창조주 하나님, 성자 하나님을 고백합니다. 창조의 영으로 성령은 지혜와 지식의 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신자는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는 하나님께 성령을 구하는데, 성화에서는 거룩이지만, 창조에서는 창조 질서를 파악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창조의 영으로 성령께서 창조 세계 체계를 파악하여 생존하며 정립할 수 있는 지혜와 지식을 주십니다. 이 성령은 다르게 구할 것이 아니라, 오순절 성령께서 내주하심으로 이루십니다. 그럼에도 구하고 구하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고 구하는 자에게 사랑이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후히 주십니다. 구하는 내용이 곧 믿음의 수준이 될 것입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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