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선 목사는 “성경이 표준이라는 생각에 있어서의 오류”라는 글을 자신의 블러그에 개제했다(https://blog.naver.com/largo3357/221976046515, 2020년). 장대선 목사는 장로파 정치 원리에 입각하여 장로파 교회를 이루려는 좋은 장로파 사역자이다.

성경의 자증성은 성경이 해석과 권위를 스스로 증거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진리를 구체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증하는 권위, 공신력을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 장 목사는 프랑스 신앙고백서(제5조)에서 “(중략) 세 가지 신조, 즉 사도신조,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고백하는 것은 이 신조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매우 일치하기 때문이다”와 벨기에 신앙고백서에서 “우리는 세 신조, 즉 사도 신조,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를 기꺼이 받아들이며, 또한 고대의 교부들이 합의한 것 중에 이 세 신조에 일치하는 신조들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제시했다. 16세기 종교개혁가들은 고대교회 신조를 권위로 수용한 것이다. 모든 개혁파의 신앙고백서는 고대교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개혁된 교회와 역(逆)-개혁 교회의 차이는 고대교리와 연속성에서 극명하게 차이를 갖고 있다. 칼빈이 개혁파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가장 철저하게 교황주의의 오류를 파악하고 지적하면서 고대교리에 부합되도록 한 것이다. 칼빈은 고대교리에 부합하도록 교회의 전통이 아닌 성경 해석으로 확립했다. 오직 성경으로 고대교리의 정당성을 증명한 것이다. 고대교리의 정수는 “그리스도의 신성(homoousion)”이다. 고대교회의 모습은 하나님과 이웃에게 겸손과 헌신이다. 가난한 이웃을 돕기 위해서 헌신한 것이 고대교회의 모습이다.

그런데 “오직 성경”이 5 sola에 포함된 종교개혁의 핵심가치로 여겨진다. 종교개혁은 오직 믿음과 오직 성경으로 기독교를 개혁한 것이다. 새로운 종교를 창안한 것이 아니라 고대교회와 고대교리를 복원하며 일치되도록 개혁한 것이다.

루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됨의 체계인 “이신칭의”를 창안한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15장에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유대인이나 이방인 모두 성령을 주심과 믿음으로,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얻음을 확립했다. 그것은 교회가 창안한 것이 아니고, 주 하나님께서 만민에게 구원을 선언하신 것을 고백하고 확증한 것이다. 계시에 의해서 확립된 주 예수의 구주되심(행 15:11)을 교회에서 부정할 수 없었다.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하다고 고백하는 방법 외에 계시에 순종할 방법이 없었다. 인간이 이해하는 방편이 아닌 계시에 근거하여 인간의 이성이 순종하여 고백하며 경배한 것이다. 자유주의 시대까지 이성의 무오류성을 견지했지만, 현대시대에는 이성의 낭만적 진보를 희망하고 있다. 교권이 이성을 통제하는 것이 부당하다. 자유자가 종의 멍에를 메는 것은 부당하지만, 또한 자유자가 방종자가 되는 것도 부당하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이 자기를 알도록 자기계시를 문서인 성경으로 주셨다. 성경은 개혁된 교회와 로마 카톨릭(동방 정교회)이 같지 않다. 이단적인 집단들은 자체로 성경을 번역하여 사용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많은 번역된 성경들이 있다. 성경은 하나님을 알기 위한 유일한 수단이다. 성경으로 하나님을 아는 방법은 교파나 사역자 간에 일치하지 않는다.

장대선 목사는 성경(원규범, norma normans/the rule that rules)과 신조(규범된 규범, norma normata/a rule that is ruled)를 묶어서 제시했다. “오직 성경”은 “구호”가 아니라, “해석된 산물”을 평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오직 성경”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목사”에 주목하도록 한다. “목사만 성경을 해석할 수 있는가?”라고 반문할 수 있지만, 목사는 설교를 위해서 반드시 성경을 해석해야 하고, 그 해석 산물은 인준을(노회와 교회 그리고 만민에게, 딤전 4:12) 받아야 한다. 만인제사장주의에서 만민이 성경을 해석해서 설교하라는 선언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목사나 성도가 하나라는 것이다. 그래서 개혁된 교회는 목사와 성도가 동일한 수준으로 성찬에 참여하지만, 목사와 장로가 집례하는 방편으로 차이가 없지는 않다. 성경 해석도 유사하다. 목사가 성경을 해석하여 설교하지만, 성도가 목사의 성경 해석에 대해서 이의(異意)를 제시할 수 있다(장로를 통해서). 그리고 목사는 성도의 이의에 대해서 명확하게 답변해야 할 공적 의무를 갖고 있다.

이의를 제기할 때에 가장 먼저 고려할 것은 “교리”이다. 목사가 윤리 설교를 한다면 교리 내용은 부재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에서 구원을 얻을 생명의 교리를 밝혀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많은 교회에서 문제가 발생하는데, 자신이 수 년 동안(그 당시에는 문제점을 파악하지 못한) 문제된 목사의 설교에 동의했던 것에 대한 성찰한 부분을 찾아보지 못했다. 설교가 쉬었다면 중세 로마교회가 복음전함을 포기하고 미사로 전환하지 않았을 것이다.

해석이 없는 “오직 성경”이라는 구호는 무익하다. 자유주의의 구호도 “오직 성경”이었고, 신천지의 구호도 “오직 성경”이다. 성경은 본문 자체에 유익이 있지 않고, 해석된 성경 본문에서 유익을 얻을 수 있다. 성경 암송이 유익한 것이 아니라, 암송된 성경 말씀이 빠르고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유익한 것이다. 그런데 성경 본문을 해석해서 교리에 부합된 해석 산물을 만들 수 있는 사역자가 몇이나 될까? 필자는 구술이 아닌 문장으로 성경해석의 산물을 제시하기를 추구하고 있다. 설교문장이 아닌 성경 본문을 해석한 문장을 제시하기를 추구하고 있다. 성경을 해석한 문장은 원리적이고, 설교문장은 해석과 적용으로 구성하기 때문이다.

“오직 성경”의 권위를 인정할 권위체는 성령이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내주로 산다. 필자는 좋은 목사가 아닌 그리스도인 목사를 사모하라는 내용으로 영상을 찍기도 했다. 칼빈은 성경해석에서 성령을 내적교사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끈으로, 교회에서 성도의 교통과 표지를 현실화시키는 하나님으로 제시했다. 성령이 없으면 그리스도인이나 교회, 그리고 성경 해석은 성사되지 않는다.

“오직 성경” 자체로는 어떤 권위를 형성시킬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해석한 성경 본문”은 교리에 의해서 검증을 받아야 하며, 내적 교사이신 성령으로 조명과 인도를 받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성경해석자”에게는 구원의 유익을 기대하기가 거의 어렵고, 기대하지 않아야 한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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