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이런 삶을 살았는가?

본헤럴드에 미국의 시사뉴스를 담당했던 故 이병덕 뉴욕 특파원(75세, 뉴저지연합감리교회 권사)께서 지난 10월 1일(현지시간) 오전 소천되었습니다. 아울러 10월 4일 주일 오후 4시에 뉴저지연합감리교회에서 장례식이 거행되었습니다. 故 이병덕 권사가 2006년 발간했던 간증문을 게재합니다. 가시는 길에 주님의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기도합니다. <편집자 주> 

기독교인으로서 성령을 받는다는 것은 진정한 기독교인의 징표이자 목표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는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깊이 받아들여 성령의 도움으로 죄를 회개하고 거듭나서 새 사람 (예수님의 제자)이 되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또한 이 새 사람은 그의 생명의 본질이 아가페 사랑이므로 아가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며, 그렇지 못할 때에는 그 생명을 잃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 동안 파란만장한 제 삶 속에서 그러한 과정이 어떻게 진행되었는가를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특히 한때 성공한 사업가였던 사람으로 한국교포의 성공사례가 되기도 했던 사람이 왜 이토록 진정한 구원과 아가페사랑에 집착하면서 예수님의 제자(양육자)로서의 관계를 이어올 수 있었는지 설명하고자 합니다. 그리하여 왜 아가페 사랑을 실천해야 하는지, 또 어떻게 아가페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는지, 또 아가페 사랑의 삶이 특별한 은사가 아니라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면 누구든지 제대로 알고 결단을 하여 그 삶을 살아야 하며, 또한 가능하다는 것을 증거하고저 합니다.

억울하면 출세하라!

저는 1945년에 한국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 났습니다. 국민학교 (요즘 초등학교) 재학시 아버지께서 세상을 떠나셔서 가세가 갑자기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고 진주 중학교에 진학하였읍니다. 일학년 수료후 대구로 이사하여 중학교를 계속했으나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학업을 계속할 수가 없어서 중학교 2학년 중간에 학업을 포기하고 고입검정고시를 치러서 합격하였습니다. 취로사업장에 나가다가 그것도 여의치 않아서 신문배달을 하면서 신문보급소에서 합숙하며 연명하였습니다. 저는 공부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신문을 배달하면서 틈틈이 공부하여 단 1년 만에 대입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동료 친구들 보다는 3년이나 먼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대입검정고시 최연소자 영예도 받았습니다.

그때까지의 경제적 궁핍으로 인한 저의 생활고는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생존연명의 수준이었으며 가족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살아야만 했던 비참한 인생 드라마였습니다. 다행히 밤낮으로 여러해 동안 신문배달을 열심히 한 덕분에 어머니를 찾아서 함께 모시고 살 수가 있었으나 이미 어머니는 병에 걸리어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대구 외곽 마구간 옆 추운 방에 누어서 신음하고 계시는 지경이었습니다. 그 옆에서 저는 이불을 뒤짚어 쓰고 서울공대에 진학하기를 목표로 공부를 하였습니다. 

기필코 미국에 유학을 가서 성공하자!

그러던 중에 미국 뉴져지 주로 보낼 고등학교 교환학생 장학생 (미국측 전액부담) 남녀 각 1명씩을 선발한다는 신문공고를 보고 응시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검정고시를 했기 때문에 고등학교에 다닐 필요도 없었지만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를 진학할 수 없었던 외톨이 고학생 신분으로 외로움을 이기면서 응시했던 것입니다.
다니는 고등학교 교장선생의 추천이 있어야 응시 자격이 생기므로 고등학교 문턱에도 가보지 못한 저로서는 절망이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하기위해서는 좌절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디어가 떠 올랐습니다. 대학입학 검정고시 합격자는 고등학교 교장선생 대신 검정고시위원장이었던 경북대학교 총장의 추천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났습니다. 총장님의 추천으로 드디어 시험을 치렀습니다.

검정교복에 반짝반짝 빛나는 교표가 달린 모자를 쓰고 의젓하고 여유롭게 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이 너무도 부럽고 혼자서만 군복을 염색하여 준비한 사복을 입고 앉아있자니 온 수험생들의 눈총이 저에게 쏠리는 듯한 초라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저에게 약이 되었는지 대구를 포함한 경상북도의 영재들과 경쟁하여 수백 대 일의 경쟁을 뚫고 세 차례의 단계별 시험을 거처 남자 1명의 미국 교환학생 장학생으로 선발되는 영예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했던 어린시절부터 저는 미국에 가서 성공하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고, 마침 저에게 기회가 주어진 것이며, 저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확실히 제 것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후에도 병역문제 등 출국하는데 난관이 많았으나 우여곡절 끝에 하늘의 도움으로 미국 뉴저지 땅에 도착하게 되었습니다 (1964년). 그 것이 저의 미국생활의 시초가 된 것입니다. 저는 이곳 뉴져지에 도착하기 전부터 유명인사가 되었고 겨우 옷 한벌 걸치고 온 한국의 소년이 뉴져지 미국인 기독교인들의 후원 속에서 러드포드(Rutherford) 고등학교 12학년 (senior class)을 성공리에 마치므로 러드포드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게 되었던 것입니다. 한국의 신문배달 가난뱅이 고학생이 감당할 수 없는, 아니 꿈에만 가능한 가슴벅찬 감격의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 후 스티븐스 공과대학에 다닐 수 있도록 장학금을 약속 받고 병역의무를 다하기 위해 한국으로 잠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유학가서 출세해야 되겠다는 어렸을 때의 목표가 드디어 실현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귀국하자마자 저는 제일 먼저 대구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던 집을 다시 찾아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을 회상하며 어머니의 아들이 미국 교환학생 의무를 잘 마치고 돌아 왔다고 어머니의 한을 풀어 드렸습니다. 사실 어머니는 막내인 저를 제대로 먹이고 가르치지도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을 지닌 채 제가 미국유학시험에 합격하자마자 미국으로 떠나는 것도 보지 못하시고 돌아가시고 말았던 것입니다. 저는 그 당시 어머니의 쓰라린 마음을 헤아릴 때마다 눈물을 흘리곤 합니다.

성공이 나의 하나님이었다!

물론 미국의 유학생활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인 집에서 살면서도 영어는 쉽게 배워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 군대문제로 한국에 돌아갔다가 다시 들어오는데도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다시 미국에 들어와 대학에 다니는데 미국 연방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자 외국학생에게 주는 장학금이 중단되어 유학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돈 한푼 없는 저로서는 한국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온 것입니다. 이때 저는 죽어도 미국에서 죽겠다는 각오로 비즈니스에 도전했고, 사무실 하나 없는 한국인 대학생에게 하늘은 기적 같은 기회를 허락하셨습니다.

30대에 성공한 사업가가 되어 꿈을 이루다!

드디어 1970년부터 당시 세계적인 유통회사였던 시어스로벅 (Sears Roebuck)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되어 트럭 타이어 관련 무역비즈니스를 시작하였고 1975년 (당시 30세) 부터는 성공한 사업가의 반열에 진입했으며 트럭 타이어 이외에도 군용차량 및 발전소 설비 물류 사업을 비롯해 생명보험 사업 등 여러 회사를 소유하고 경영하는 최고경영자가 되었습니다. 한국의 재벌기업들과 비즈니스를 하게 되어 한국에 나가게 되면 VIP중의 VIP대접을 받으면서 승승장구했습니다. 재벌회사들의 최고경영자들을 비롯한 한국정부의 고관들이 저의 상대였으며, 전두환 대통령 워싱턴 방문 때에는 그의 경호지원을 저희 회사가 전담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업상 여러가지의 치명적인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심각했던 것은 한국에서 수입해온 타이어가 품질이 갑자기 나빠져 수천만불 상당의 클레임이 발생하게 되었습니다(1982 – 1983년). 이 타이어의 제조사와 그 수출을 대행한 한국의 모 대기업체(K사)는 이 클레임을 책임지면 회사 문을 닫거나 타사에 인수 처분되는 위험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에게는 K사에게 지불할 거액의 외상대금을 현찰로 갖고 있었지만 오히려 저는 그 회사로부터 수천만 불을 더 받아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24년 전 그 당시의 수천만불은 지금의 수 억불의 가치와 같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그 거액의 외상대금은 제가 K사로부터 받아야 할 클레임비용의 일부로 챙기면 그만인 상황이었습니다. 저는 제조사나 K사가 망하든 말든, 그 회사들의 임원들이 감옥에 가든지 말든지 그 돈으로 자손 대대로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동안 제가 사업에 성공할 수 있도록 저의 사업을 많이 도와 준 회사들인데 이 불행한 일로 인해 만명이 넘는 종업원들과 그 가족들이 길거리에 내몰리는 것을 그냥 볼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일년 동안이나 고민한 끝에 제 스스로 파산의 십자가를 지기로 하고 그 제조사와 K사로 향하는 미사일 폭탄을 제가 대신 맞기로 선택했던 것입니다. 제가 현금으로 갖고 있던 그 거액의
외상대금을 그 대기업에게 그냥 되돌려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무렵 저는 40대 초반이었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시 재기할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이 넘쳐 있었습니다.

자기정체성 (Self-Identity)에 대한 회의!
 
저는 1972년 뉴저지연합교회의 창립멤버였고, 1974년 김해종 목사님의 주례로
우리교회에선 처음으로 결혼식을 치렀으며, 교회창립 후 십여 년 동안 우리 가족과 처가족이 함께 열심히 교회를 잘 다녔습니다. 교회를 다닌 지는 20여 년이 되었지만 예배당에 들락날락했을 뿐 진정한 자아 곧 자기정체성(identity)에 대한 확신을 가지지 못하고 영적으로 방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 인생의 근본적인 의문에 대해서 시원한 답을 찾지 못하고 늘 마음 한구석에 의구심을 안고 살았습니다. 그야말로 인생의 바닥에서 미국에 건너와 성공한 청년 사업가가 되었다가 하루 아침에 망해버린 이 삶의 여정을 보면서 인생의 근원적인 질문을 이번에는 더 심각히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누구란 말인가? 도대체 인생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어디로 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가? 등등의 근원적 질문을 어릴 때 부터 수년간 스스로 물어 왔던 참이었습니다. 물론 가족들이나 주위 분들은 빨리 비즈니스를 회복하고 다시 옛날의 영화를 위해 재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이제 40대 초반의 사람이 왜 저렇게 가만있는지 의구심을 가지기도 했을 것입니다.
 
인간이 왜 이렇게 악한가?
 
저는 비즈니스를 하는 동안 인간의 악의 면모에 대해서 너무나도 많은 것을 보고 겪었습니다. 제가 겪은 비즈니스의 세계는 한마디로 지옥의 전쟁터와 같았습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죽이지 않으면 안되었고 오히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는 온갖 머리를 굴려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목표를 쟁취해야 하는 것이 일상적인 것이었습니다. 나름대로 비즈니스를 하셨거나 하시고 계신 성도님들은 이미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만, 비즈니스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양심이고 도덕이고 부모고 형제고 친구도 없는 현실이고, 그런 상황에 항상 처해있는 비즈니스 책임자들은 엄청난 불안감과 위기감으로 인한 엄청난 스트레스에 늘 시달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알코올이나 심지어는 마약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가지 못하는 기업가를 여럿 보았으며, 저 자신도 비즈니스 스트레스로 매년 병원 응급실에 5번이나 실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특히 비즈니스 하는 사람들의 기만과 술수, 이중성과 탐욕, 그리고 모든 친구나 가족들까지도 비즈니스에 이용하려는 의도가 너무도 몸에 익숙해있는 사람들을 많이 겪어 보았습니다. 왜 이리도 인간이 악한지요? 제가 이 악한 인간들과 계속해서 싸우며 살아가야 한단 말인가? 하는 질문이 제게는 안고 씨름해야 할 화두가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인간의 악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더 이상 비즈니스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렇게 악하게 살지 않으면 비즈니스에서 성공할 수 없으며, 악하게 살지 못했기 때문에 제가 배신을 당하고 비즈니스가 파산되는 지경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계속>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