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의 2차 전도 여행은 1차 사역에서 설립했던 지역을 시찰한 뒤에 아시아에서 계속 활동하려고 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런데 주의 영께서 마게도냐 지역으로 인도하셨다. 사도 바울은 해상교통을 이용해서 내압볼리에 도착해서, 빌립보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주께서 자주 장사 루디아를 만나게 하셨고, 빌립보 감옥의 간수를 구원하셔서 마게도냐의 첫 교회 빌립보 교회를 설립하셨다. 

1. [행 17:1-9] 데살로니가 전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암비볼리, 아볼로니아를 거쳐서 데살로니가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있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3주 동안(세 안식일) 회당에서 성경을 강론했다(2절). 그는 성경으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했고, 그 그리스도가 예수라고 증거했다(3절). 구약에서 그리스도를 기다리도록 훈련시켰고, 그리스도의 직무를 예수께서 감당하셨다. 이 구도는 유대인을 대상으로 하는 복음 전도 내용이다. 바울이 전도한 내용은 데살로니가전서를 보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데살로니가전서는 바울의 초기 서신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에서 발생한 종말에 관한 이해에 대한 대처를 위한 서신이었다. 즉 데살로니가 바울은 복음 전체 체계를 전했다.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귀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따랐다(4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시기를 하여 소동을 일으켰다. 그들이 예수가 가이사의 종 빌라도에 의해서 처형되었기 때문에, 예수를 증거하는 것은 가이사의 명을 거역하는 것으로 고발했다(7절). 예수께서 정치범으로 처형되셨기 때문에, 제자들도 동일한 정치범 집단이다. 십자가는 로마의 반역자에게 주어진 형벌이다. 반역자의 이름을 믿으라고 가르치는 것은 반역의 동일선상에 있는 것이다. 야손이 바울과 실라를 받아드렸다는 이유로 많은 고초를 당했다(7절). 그들은 야손이 가이사의 명령을 어기고 예수를 왕(βασιλέα, king)라고 했다는 것이다(7절). 데살로니가 사람들과 관원은 소동하여 구금시켰지만, 보석금을 지불하고 풀려났다(8-9절). 반역죄를 보석금을 받고 해제할 수 있는 경우는 없을 것이다. 밤에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는 베뢰아로 보냈다(17:10a)

2. [행 17:10-15] 베뢰아 전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야반(夜半) 도피로 베뢰아로 이동했다(10절). 베뢰아에도 유대인의 회당이 있어 거기에서 전했다. 먼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구도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너그러워서 마음으로 힘써 성경을 상고했다(11절). 헬라인의 귀부인들이 믿었으며 남자도 적지 않았다(12절). 데살로니가 유대인들이 베뢰아 회당에서 활동한다는 소식을 듣고 베뢰아로 원정해서 소동을 일으켰다(13절). 형제들이 바울과 실라를 바다로 보냈고, 실라와 디모데는 거기 머물렀다(14절). 바울은 인도하는 사람과 함께 아덴으로 갔고,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아덴으로 오도록 지시했다(15절).

베뢰아인들이 성경을 간절한 마음으로 상고한 것은 매우 특이한 일이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처럼 구약성경이 지시하는 그리스도가 예수라는 것을 믿었다. 구약성경을 열심히 읽으면 오실 메시아(그리스도)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 있다. 신약성경은 오신 메시아(그리스도), 승천하신 메시아, 그리고 다시 오실 메시아(재림하시는 그리스도)까지 지시했다. 우리는 구약의 그리스도를 기다리던 1세기 유대인이나 회당에 있는 이방인이 아니다. AD 2세기 유대인들에게는 우선권이 없다고 이해해야 한다. 1세기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서 지시하는 죄를 구원할 메시아(그리스도)를 기다리지 않고,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실하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남은자까지 먼저 구원을 얻을 복음을 전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정의인데, 전혀 핑계할 수 없는 수준까지 인내하시며, 언약대로 시행하시는 주님이시다. 유대인들은 회당에서만 율법을 들었으며, 회당 밖에서는 이방인들과 차이없이 세상 탐욕으로 살았을 뿐이다. 유대인들은 BC 587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어도 회개하지 않았고, 1세기까지 회개하지 않고 있었다. 여호와의 신실하심은 그들을 끝까지 인내하셨는데,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한 것은 결코 인내할 수 없는 사안이다(마 21장). 포도원의 주인은 먼저된 종들만이 포도원을 경작하는 것이 아니라, 포도원의 울타리를 헐어 모든 이가 포도원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셨다. 그 모든 이에는 독생자를 죽인 유대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유대인에게 먼저라는 구도는 사라졌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에게 예수 구원을 증거하는 방법은 전도의 미련한 방식뿐이다(고전 1:18).

3. [행 17:16-34] 아덴 전도. 바울의 아덴 전도는 실패, 성공 등 여러 평가가 있다. 바울은 아덴에서 마음이 격분했다(παρωξύνετο, 16절). 격분했다는 표현이 부정적으로 이해된다면 실패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회당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 아덴에서도 먼저 회당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러나 장터에서도 사람들을 만나 변론했다(διελέγετο, 17절). διελέγετο는 합리적으로 대화를 이끌었다고 이해할 수 있는 어휘이다. 바울은 다소에서 수학했기 때문에 헬라 철학에 대한 지식이 충분하다고 이해한다.

우상의 도시(만신전, Pantheon의 도시)에서 바울은 격분했다(16절). 아테네는 철학의 도시였지만 우상의 도시였다. 장터에서 아테네에 있는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학파 철학자들과 변론했다. 그들은 바울을 아테네의 아레오바고로 이끌어서 바울이 변론하도록 이끌었다. 아덴에 있는 스토아 학파(금욕, 이성, 행복)와 에피쿠로스 학파(쾌락, 경험, 행복)의 사람들과도 변론이 발생했다. 바울은 뜻하지 않게 회당이 아닌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할 수 밖에 없었다(19절).

사도 바울이 전한 아덴 설교는 22-31절까지이다. 바울은 “알지 못하는 신(THE UNKNOWN GOD)”에게라는 신전의 기명을 접촉점으로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리고 인간이 만든 신전에 신이 거주할 수 없음을 변증했다. 그리고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all mankind life and breath and everything)을 주는 주님을 전했다(25절). 모두가 하나님께 비롯된 사람들이지만 창조주가 아닌 우상을 섬기는 것을 지적했다(27-29절). 그리고 회개와 부활을 전했다(30절). 바울의 전도를 들은 아테네 사람들은 죽은자의 부활에 대해서 조롱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리고 바울은 아덴을 떠났다. 그러나 아덴의 몇 사람이 바울에게 와서 믿었다(34절). 바울은 접촉점과 철학적 관계로 전하려고 노력했다고 볼 수 있다. 바울의 아덴 설교는 변증 설교(Apologetic Preaching)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아테네에 교회가 설립되었고, 지금은 희랍정교회의 본산으로 정교회의 중요한 요지이다. 그리스는 비잔티움의 한 지역이었고, 오스만 제국(터키)에게 빼앗긴 이후로 지금까지 갈등하고 있다. 가장 민감한 지역은 구브로(키프로스) 섬이다.

바울은 회당이 아닌 아레오바고에서 복음을 전하는 첫 경험이 발생했다. 그리고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함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전하는 자의 담력이라는 것을 결정했다(참고, 고전 1장). 우리는 복음 전함에 많은 연구, 전략 회의를 한다. 그러나 복음 전함에서 가장 확고한 것은 전하는 자에게 있는 복음의 확증이다. 그러면 전하는 자를 주께서 사용하여, 자기 백성을 그에게 보내셔서 구원하실 것이다. 복음 전함에서 필요한 것은 접촉점이 아니라 전하는 자의 담력(거룩과 지혜)이다.

아테네에 현존하는 에텍테이온. 바울은 판테온뿐만 아니라, 에텍테이온도 보았을 것이다. 바울이 보았을 것 같은 건축물이 현존한다. 바울은 우상덩어리로 보았고, 건축전공자의 눈에는 놀라운 건축물일지도 모른다.
아테네에 현존하는 에텍테이온. 바울은 판테온뿐만 아니라, 에텍테이온도 보았을 것이다. 바울이 보았을 것 같은 건축물이 현존한다. 바울은 우상덩어리로 보았고, 건축전공자의 눈에는 놀라운 건축물일지도 모른다.

4. 전능하신 하나님, 전하는 자가 없으면 듣는 자가 없습니다. 죄인이었던 저를 구원하였으니, 전하는 자로 주의 말씀을 듣는 자에게 세우소서. 양심과 내게 주신 지식으로 주의 말씀을 전하겠나이다. 주께서 쓰실 만한 도구로 성숙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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