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집회 발 코로나19 확진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나타난 공통된 현상 중 하나가 자기 동선을 말하지 않거나, 거짓말을 한다는 것이다. 광화문발 감염은 한 지역이 아니라 전국적 현상으로 충격이다. 교회 신자라면서 거짓말을 할 수 있을까? 그리스도인의 말은 GPS보다 더 신뢰할 수 있는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GPS 검증이 들어가면 다 나타날 일인데 왜 자기 동선을 말하지 않을 것일까? GPS 검사가 들어가는 몇 일 시간에 확진자가 증가하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한다. 정부의 강압 혹은 거부감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 있겠지만, 거짓말 금지는 주의 계명에 관한 것으로 정부 관계보다 상위 개념이다.

교회 신자라고 하면서 현 정부에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모습도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거짓말을 하는가? 그 거짓말로 인해서 피해받는 이웃을 생각하면서 그러한 일을 행할 수 있을까? 그들은 이웃의 안전에 대한 배려가 없는, 오직 자기 목적에만 집중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은 다각적인 환경에 대해서 인식하고 판단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사고는 복잡해야 한다. 어린 나이에는 한 가지 사고를 위해서 집중적으로 들어가는 돌파력이 필요하고, 나이가 들면 복합적인 사고를 하면서 통합시킬 수 있는 사회 구조가 좋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현재 모습은 나이든 어르신들께서 한 가지 목적에 집중하는 독특한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그 한 가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은, 그들이 그렇게 싫어하고 거부하는 사상의 행동과 일치한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우리 사회의 교육 체계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사회는 교육을 취업과 생활 안정을 위한 도구로 생각했다. 교회는 교육을 교회 성장의 방안으로 생각했다. 교육은 수단이 아니라 목표이다. 교육을 통해서 어떤 사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통해서 바람직한 인간을 구현해야 한다. 취업, 교회성장, 사회정의를 통해서 바람직한 인간을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바람직한 인간은 어떤 규범에 의해서 성취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됨은 긴 시간과 긴 협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국민이 정상적인 판단 체계를 갖출 수 있도록 국가는 교육 체계를 이루어야 한다. 좋은 기능인 배양이 교육 목표가 되는 것은 매우 부당하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명제를 잘 숙지해야 한다. 그래서 “거짓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성립될 수 있는 명제가 아니다. 거짓말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은 거짓말하는 그리스도인에 대해서 착각하면 안 된다. 기독교는 속이는 사람보다 속은 사람에게 책임을 주는 구도이다. 그것은 사람은 자유자이기 때문에 어떤 것에 지배되지 않는다. 즉 속이는 사람 탓이라면 그 속이는 사람에게 종속되기 때문에, 종속되는 것보다 차라리 자유롭게 과오에 대한 책임을 택한다.

사람은 절대로 거짓말을 하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프레임을 만든다. 프레임 안에서 행하는 행동은 정의가 된다. 그 프레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면, 그 프레임 안에서 행하는 행동은 언제나 정당하다. 자기 프레임이 없는 사람이 없다. 그러나 자기 프레임이 타인의 감정이나 상태에 피해를 줄 수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 때 자기 프레임의 정진을 멈출 것인가? 더 강력하게 정진시킬 것인가? 다른 프레임과 충돌 혹은 피해에 상황에서 자기 프레임의 정당성을 과도하게 주장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훈련되지 않으면 비굴하게 되고, 과도하게 왜곡된 훈련이 들어가면 피해에 아랑곳하지 않는 정신세계를 구축하게 된다.

신천지의 특징은 거짓말이었다. 그것을 ‘모략’이라고 했다고 한다. 이번 광화문 집회 발 거짓말의 특징은 ‘애국’일까?

대한민국은 사상, 표현의 자유가 있다. 그것이 재산상 물리적 피해가 없다면 최대한 보장되어야 한다. 비판의 자유가 있다면 비판 받을 책임도 있다. 주장만 있는 주장은 자유가 아니라 고집이고 억지다. 고집과 억지를 통제하는 것은 사회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우리 사회는 파랑색만 존재할 것이 아니고, 빨간 색만 존재할 것도 아니다. 7색이 존재해야 하는데, 그 색이 함께 했을 때 검은 색이 아니라 빛이 되어야 한다.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한다. 타인의 피해를 고려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그리스도인, 자기주장만하는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다. 결과가 선하면 모든 과정이 선하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다. 결과가 좋지 않더라도 과정에 충실한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자기가 피해를 보면서도 정직하게 말하는 사람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치인들이 거짓말을 하지 않으려고 말을 돌리는 것을 보라. 정치인들도 그러한데, 거룩한 그리스도인이라면서 담대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이 정당하겠는가?

우리는 교회에서 거짓말이 속출하는 시대에 있다. 교회 사역자로서 감당하기 쉽지 않은 사례이다. 그래서 외람된 표현일지라도 모두에게 교회와 거짓말을 병행시키는 것을 인정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거짓말하는 그리스도인 혹은 교회”는 성립할 수 없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사기꾼이 자기를 사기꾼이라고 인정하는 사기꾼이 어디 있을까? 프로 사기꾼은 자기가 사기꾼이라고 인정한다. 그래도 빠져나가지 않기 때문이다. 신천지도 유사하다. 처음부터 자기 정체를 밝히고 교육했다면 그들이 거기에 들어갔을까? 하나님의 뜻과 대한민국 역사는 관계성이 성립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개인의 계획도 자기 뜻대로 하신다고 말씀하셨다(잠 16:9). 그런데 인간들의 군상인 국가에 대한 경륜은 그보다 훨씬 더 심오하지 않겠는가?

단순한 거짓말 몇 마디로 빠져 나갈 수 없는 사안이 있다. 거짓말이 얼마 가지 못해서 탈로날 것인데도 거짓말하는 것은 더욱 더 이해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은 선한 거짓말에도 가슴을 저미며 회개한다. 정직하고 양심적인 폭거를 정당하게 생각할 그리스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거짓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성립되지 않은 어휘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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