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구 상에서 가장 "사회적인 생물은 바로 사람이다."라고 아리스토텔레스가 정의했는데, 개미에 대하여 과학적으로 연구한 곤충학자에 의하면, 사람보다 개미가 더 사회성이 강하다고 한다. 손톱깎이로 잘려나간 새끼손가락 손톱보다도 더 작은 개미가 사람보다 훨씬 더 월등한 사회 친화적 존재라는 것이다.

내가 사는 춘천에 화목원(花木園)이 있다. 이곳엔 우리나라 모든 산림목과 각종 화초와 산야에 사는 동식물들, 그리고 다양한 곤충류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에 개미들의 생활과 생태를 그림으로 현실감 있게 전시되어 있어 개미의 공동체생활 단면이 한눈에 확 들어 온다.

옛날 고려 신종때 서기 1198년, 60년간의 권세를 누린 최장의 세도가문 최충헌의 노비 `만적`이란 종이 난을 일으켰는데, 그가 내건 슬로건이,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그만이지 왕후장상의 씨가 어찌 따로 있다더냐."였다. 이처럼 인간의 외모는 어리고 젊고 늙고의 서열은 있어도, 신체적으로 귀천의 차별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런데 곤충류에 속한 개미사회엔 서열과 맡은 일이 태생적으로 정해져 있다. 아주 작은 개미들도 자기들이 공동체생활을 할 터를 정할 때, 우선 빗물이 덜 들어 올 곳을 정한다. 그 작은 개미가 어떻게 집터를 볼 줄 알까? 그리고 집터를 정했으면 땅굴을 파낸다. 통로를 열면서 여왕벌 집, 일벌 집, 애벌레 집, 음식저장창고, 배설물 및 쓰레기저장고를 아주 주도면밀하게 한다. 개미의 종류도 일개미, 병정개미, 수개미, 여왕개미, 등 다양하다. 이들은 선천적으로 자기에게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한다.

퓰리처상을 받은 책 "개미 세계의 여행"을 보면, 앞으로의 지구는 사람이 아니라, 개미가 지배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참 흥미로운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지난날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고 살았다.

그래서 백문이불여일견(百聞而不如一見)이란 말도 나왔었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의 눈이란 거 정말 믿을만한 게 못 된다. 우선 우리의 눈으론 볼 수 없는 미생물의 세계를 보면 세균성 박테리아가 있고, 세균보다 더 작은 코로나바이러스와 같은 미생물의 경계 선상에 있는 것들도 있다. 아무튼,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개미들의 희생정신과 분업 능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실제로 개미는, 굶주린 동료를 절대 그냥 놔두는 법이 없다. 그 비결이 무엇일까?

개미는 두 개의 위를 가지고 있는데, 그중 하나는 자신을 위한 ‘개인적 위’이고, 다른 하나는 ‘사회적 위’라는 것이다. 동료 개미가 먹지 못해 쓰러지면 다른 동료가 두 번째 위에 비축해 두었던 양분을 토해내 먹인다는 것이다. 한문으로 개미’의(蟻)’자는 벌레 ‘충虫’자에 의로울 ‘ㅡ’자를 합한 이름이다. 우리 인간의 위도 개미처럼 두 개의 위를 가지고 있다면 어찌 될까요?

그랬다면 인류는 개미처럼 사회성이 더 강하고, 굶주림의 고통도 몰랐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딱 하나의 위만 주셨다. 그래서일까?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은 굶주림의 고통이 닥치거나 어떤 욕망에 사로잡히게 되면, 때론 짐승보다 더 무자비한 행위도 서슴지 않는다. 작금 "서해안에서 일어난 공무원 사건"도 그러하다. 마치 부모의 회초리가 두려워 변명하는 어린애처럼, 왜 그리 어설픈 변명만 늘어놓아, 일파만파를 일으키는가! 여론의 매를 맞더라도 좀 더 진솔하시라!

부유물에 몸을 의지하고 그곳까지 표류했다고 보아야 함에도,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것을 기대고 아니라고 하는 것은, 개미보다 못한 사회성의 결여라고밖에 볼 수 없다. 대처에 잘못이 있었다면 진솔하게 얘기하고, 국민으로부터의 따가운 질책을 달게 받으시라!

변명이나 상황 논리를 펴지 말고, 허심탄회하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진솔한 나랏일을 국민은 바라고 있다. 그게 바른 대도무문의 정치다.

김종근 목사, 실버선교사역 20여년, 행복이 가득한 집(요양원) 설립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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