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 이혼자와 재혼하면 간음죄가 된가요?

A (마 5:32)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마 5:32에 대한 이해와 해석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도 원칙적으로 이혼을 허용했지만, 인내해서 합당한 복을 얻으라고 제언했습니다(고전 7장).

첫째. 이혼(離婚)은 혼인(婚姻)이 전제된 행위입니다. 약혼(約婚)은 파혼(破婚)이라고 합니다. 혼인할 때에 두 사람은 서약을 합니다. 우리말로는 “검은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혼인관계를 유지하겠다고 고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앞에서 허락된 배필인 것을 서약합니다. 주례목사는 하나님께서 나누지 않으면 사람이 나눌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즉 서약 관계로 보면 이혼은 불가능한 사안입니다. 그리고 이혼은 쌍방 합의를 전제하기 때문에, 뜻이 맞지 않아서 이혼했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뜻이 맞지 않으면 절대 이혼할 수 없습니다. 이혼을 놓고는 한 뜻이 되어야 이혼할 수 있습니다. 즉 혼인 관계는 반드시 유지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혼인이 언약이기 때문에, 언약이 깨질 조건이 있습니다.

둘째. 혼인 관계가 깨질 기본 조건은 배우자의 사망입니다. 이 때는 이혼이라고 하지 않고 배우자 사별(死別)이라고 하여 혼인 관계가 유지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배우자의 권리를 양도받습니다.

셋째. 혼인 관계가 깨질 조건은 배우자 외 다른 상대와 성관계 행위입니다. 우리 사회에서 간통(姦通)이라고 합니다. 혼인 관계의 파손의 제일 원인은 외도입니다. 성경은 음행(淫行)이라고 했고, 일반말로는 간통입니다. 음행이 간통보다 좀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갖습니다. 음행은 부당한 성행위를 말할 수 있습니다. 간통 외에도 부당한 성행위는 존재합니다. 배우자의 음행 없이는 이혼을 금지시킨 것이 성경의 기본 가르침입니다. 반대로 하면 음행을 근거로 합당한 이혼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순결(純潔)의 의미는 물리적 개념이 아닙니다. 배우자의 유책 사유로 이혼된 배우자는 정신적 성적으로 순결한 상태입니다. 순결한 여인과 혼인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넷째. 혼인 관계를 깬 배우자와 혼인하는 것은 음행에 해당합니다. 우리는 순결을 물리적으로 보지 않고 언약적으로 제시하였습니다. 즉 외딴 곳에서 추행을 당했을 때에 그 여인은 순결한 여인입니다. 공동체의 보호를 받지 못한 피해자이지 순결이 파괴된 여인이 아닙니다. 순결을 물리적으로 보면 피해자에게 이중적 피해를 주는 경향이 있을 수 있습니다. 혼인 관계를 깬 유책 배우자와 혼인하는 것이 지양해야 할 사안입니다. 엄격하게 적용하면 간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이혼은 최소 범위로 결정하려고 하며, 이혼으로 피해를 받은 사람은 보호받아야 합니다. 쌍방합의나 유책사유 이혼은 이혼에 대한 책임이 당사자에게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책임을 간음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다섯째, 우리 사회는 유책이 없는 쌍방 합의 이혼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윤리적 판단으로 쉽지 않은 부분일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합의 이혼이라는 말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혼은 합의가 되지 않아서 발생한 사태인데, 그 사안에 대해서 쌍방 합의가 되었습니다. 즉 그들은 합의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기능을 이혼하는 데에 사용한 것입니다. 합의해서 혼인하고, 합의해서 이혼하는 합리적 관계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쌍방 합의 이혼에 대해서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혼과 별도의 문제이지만, 이혼 문제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비혼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사회는 혼인과 이혼의 문제 이전에 이젠 ‘비혼’이라는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혼인하지 않은 비혼주의자에게 이혼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비혼인 청년들이 혼인 관계에 들어가길 바라며, 혼인 관계의 복잡성 속에서 합당한 인격체가 형성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래야 건전한 사회, 의사소통과 인내를 가지는 사회를 구성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인한 부부가 자녀를 1명씩 가지고, 그 1명의 자녀가 비혼주의를 선택하면, 우리사회는 존립 자체를 걱정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 사회가 이혼이라는 말이 존재할 수 없는 비혼사회가 된다면, 이혼이 있는 사회보다 더 비극이 될 것 같습니다.

혼인 관계가 유지되기 위해서는 깊은 인내가 필요합니다. 깊은 인내가 필요한 것은 혼인 관계에서 갈등과 불화가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갈등과 불화의 모습이 자녀들에게 긍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습니다. 옛날에는 분출구가 없었기 때문에 혼인 수단으로 인생을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다양한 분출과 표현 수단이 존재하기 때문에 혼인 수단을 유지해야 될 긴박한 필요성이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혼인 관계를 유지 않는 합의 이혼도 많이 발생할 것입니다. 물질이 풍요롭고, 기술과 교통이 발달한 시대에서 인간은 더 깊은 인내를 해야만 인간성을 상실하지 않게 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물질주의의 수렁에 빠져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말 것입니다. 물질화된 인간은 지극히 인간적인 수단(하나님의 선물)인 혼인 관계를 유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은 살면서 오래 참는 것이 복된 인간화인데, 우리 사회에서 인내는 죄악시합니다. 기술사회는 빠름, 자기 안전, 타인에 대해 무관심 등을 추구합니다. 기술이 제공하는 욕망을 투사 및 해소시키는 구조를 이용한다면 인간끼리 부디 끼는 인간 행동이 불편하게 됩니다. 그런 비인간화된 사회에서 인간의 빈자리에 동물이 반려 기능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결코 인간을 반려로 삼지 않으려고 합니다. 인간과 인간이 부디 끼는 가장 원초적인 단계 가정이 잘 형성되어야, 더 광의적인 인간 공동체인 사회가 잘 유지될 것입니다. 가정 파괴는 곧 사회 파괴이며, 가정이 형성되지 않는 것은 곧 사회 자멸을 의미할 것입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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