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영목사칼럼] '자살'을 '살자'로 바뀌는 희망의 문장 '아직 나는 끝나지 않았어!'

  • 입력 2020.12.10 23:10
  • 수정 2020.12.11 13:38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살라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춘천), 서울신대신학박사. 주기도문, 충성된일꾼되어가기, 팔복, 제자세우기40일영적순례(1,2권) 등.
최원영목사, 본푸른교회, 본헤럴드대표, 변화산기도원협력원장(춘천), 서울신대신학박사. 주기도문, 충성된일꾼되어가기, 팔복, 제자세우기40일영적순례(1,2권) 등.

한국의 사회적 공인들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큰 아픔이다. 국민들의 사랑을 받았던 노무현 대통령, 서민들의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인권을 위해 노력했던 노회찬국회의원, 박원순 서울시장, 희극인으로서 사랑을 받았던 박지선 등 자살이 우리 사회의 만연되어 있다. 죽음은 모든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이 매우 크다. 특히 공인들의 자살은 우리 사회에 큰 어둠이며 아픔이다.

-그레이스 쉐이닌(Anne-Grace Scheinin)은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자살했을때, 자살은 고통을 종식시키지 않는다. 단지 살아남은 자들의 무너진 어깨 위에 고통을 더 얹는 것이다라고 했다.

문창극 중앙일보 대기자가 2009년 쓴 [공인의 죽음] 칼럼에 보통사람들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부모님 때문에, 처자식 때문에, 하던 일 때문에, 나 아닌 남에 대한 책임감이 또는 사랑이 죽고 싶은 감정을 누르는 것이다.”라고 썼다.

보통사람들은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다. 내 어깨로 짊어져야할 책임감과 사랑 때문이다. 자살공화국이 되어 버린 한국 땅에 공인들의 죽음은 사회적 파장과 정신적 공황상태와 경제적 손실이 크다.

죽음이 모든 것을 덮는다고 하지만 죽음은 자연인과 공인의 성격을 나누어 판단해야 한다. 자연인으로서 자살은 가슴 아프고 안타깝지만 공인들의 자살은 적절치 못한 행동이다. 공인들의 자살은 한국 사회에 자살의 어두운 분위기를 이어가게 하기 때문이다.

"생명은 소중하다"

생명은 소중하다. 종교가 달라도, 민족이 달라도, 얼굴 생김새가 달라도 모든 생명은 귀한 것이다.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주어진 생명의 시간이 다가오면 언젠가는 죽음이 자연스럽게 찾아온다. 그런데, 죽음에는 아름다운 죽음이 있고 아름답지 못한 죽음이 있다. Lynne Ann Despelder & Albert Lee Strickland의 공저 [죽음, 인생의 마지막 춤]에서 저자가 제시하는 죽음이란, 죽음을 내 인생에 마지막 가족들과 함께 호흡하는 춤이라고 했다. 마지막 춤이 지혜롭고 존엄한 죽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성스러운 상태에서 죽음을 맞이하는 죽음이 될 때, 가장 아름다운 죽음이 될 것이다. 저자는 아름다운 죽음이 있겠는가? 이런 표현보다는 적절한 죽음과 적절하지 않는 죽음이 있을 뿐이라고 했다.스스로 삶을 마감하는 자살은 가장 불행한 죽음이 된다. 가장 적절하지 않는 죽음이다. 그러나 사명을 다하고 다가오는 죽음은 아름다운것이며, 가장 적절한 성스러운 죽임이다. 가족과 함께 마지막 춤을 추고 이땅을 떠나는 것이다. 마지막 춤을 잘 장식할 때, 마무리가 아름다운 퇴장이 된다.

영성 작가 헨리 나우웬은 잘 죽는것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죽음은 다른 사람과의 화합 속에서 죽은 것이다라고 결론지었다. 죽음을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분리하는 사건으로 본다면 슬픈 일이지만, 죽음이 나와 다른 사람들과의 마지막 화합이고, 이 땅에서 주어진 삶을 완성하고 주님이 주신 또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관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죽음은 슬픔이 아니라 아름다운 이별이며 화합이 된다.

그런데, 자살은 훌륭한 죽음이 아니다. 다른 사람과의 화합속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 사명을 다한 아름다운 퇴장이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생명을 마감한 것이기에 이런 죽음은 훌륭한 죽음이 아니며, 아름다운 이별도 아니다.

 

"자살이 왜 아름답지 않은 퇴장이 되는가?"

첫째로 고민할 지점은 자살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을 너무 경솔하게 대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한 순간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생명을 대신할 것은 이세상에는 없다. 생명보다 소중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생명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자살은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스스로 정리한 것이다.

둘째로 고민해야할 지점은 자살은 다른 사람들에게 화합이 아니라 슬픔을 준 강제적인 이별이다. 남겨준 가족들이나 이웃과 친구들에게 엄청난 충격이다.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수많은 시간 남겨진 가족들은 상처속에 살아간다. 그리고 괴로움에 빠져 산다.

자살 유가족들은 심리적인 슬픔과 자살 고위험군에 속해있다. 2019년 한국에서 자살로 인해서 죽은 사람의 숫자는 13799명이다. 하루 38명이 목숨을 끊는다.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사람이 하루 평균 9명이다. 자살 이후에는 자살 생존자들이 남는다. 자살생존자는 자살의 영향을 받은 사람을 뜻하는 단어이다.

연구에 따르면, 보통 한 명의 자살자에 적어도 6명이 영향을 받게 되고, 넓게는 28명에게 영향을 미친다고 한다. 하루 190명에서 1064명의 자살생존자가 생기는 샘이다. 한국과 같이 관계 형성이 많은 나라에서는 그 유가족 수가 10명이 넘는다고 볼 때, 한해 10만 명의 자살 유가족이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 이들 자살유가족들은 일반인들과 견줘볼 때, 자살 위험이 8배가 넘는 자살고위험군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에 대한 치유나 배려는 적은 편이다. 급하게 장례식을 마친 후, 그때부터 어둠이 몰려온다. 자살 이후 자살 생존자가 남는다. 또 누군가를 잃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왜 죽었을까? 슬픔과 죄책감과 분노와 고립감의 시간이 다가온다. 이럴 때 자살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자살은 남겨진 가족들에게 어둠과 아픔과 슬픔과 절망과 후회와 낙심과 불안과 공포와 죄책감에 머물게한다. 그 결과 자살 고위험군에 노출되면서 자살의 극단적인 상황에 노출되게 된다.

 

[유족 권리장전, 중앙심리부검센터]

(1)나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권리가 있다

(2)나는 자살로 인한 죽음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권리가 있다.

(3)나는 내 느낌과 감정을 남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할지라도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다면 이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4)나는 내 질문에 대해 권위자나 다른 가족들로부터 정직한 대답을 들을 권리가 있다.

(5)나는 다른 사람들이 내 슬픔을 덜어줄 수 있다는 생각에 속지 않을 권리가 있다.

(6)나는 희망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7)나는 평화와 존엄성을 유지할 권리가 있다

(8)나는 자살로 떠난 사람의 죽음 직전 또는 죽음 당시의 상황과 관계없이 그 사람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질 권리가 있다.

(9)나는 독자적인 인격을 유지하고 자살로 인한 죽음에 의해 판단받지 않을 권리가 있다.

(10)나는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살펴보고 수용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나를 도와줄 상담자와 지원 그룹을 찾을 권리가 이다.

(11)나는 새로운 시작을 할 권리가 있다. 나는 살 권리가 있다.

 

'자살'을 '살자'로 바뀌는 단어 "희망"

자살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은 오직 희망이다. 희망이 있으면 자살적 상황을 살자라는 것으로 바뀐다. 왜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분명한 이유는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이는 단 1분도 살 수 없다. 사람은 희망을 먹고 사는 존재이다. 희망이 없어서 오늘도 죽어있는 사람처럼 의미 없이 사는 분들이 있다.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

불멸의 이순신이라는 드라마속에서 기억에 남는 멘트가 있다. 모함으로 직위를 박탈당한 이순신은 평범한 군인으로 나라를 위해 봉사했다.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참담하게 패하고 목숨까지 잃은 이후의 장면에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된다.

이순신을 찾아온 평생지기 영의정 유성룡은 전쟁터에 다시 나가지 말라고 권고한다. ‘자네를 버린 나라요 임금이네. 다시는 전쟁터에 나서지 말게 내 목숨을 걸고 전하에게 말할 것 일세그러나 이순신의 대답은 바로 희망을 버리지 않겠다는 말로 대신 자신이 뜻을 전한다. 이순신에게 남은 배는 12척이었다.

12척으로 수백척의 왜선과 싸워야하는 위기에서 이순신은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백성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다.아직도 백성들은 조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원망하지만 그 언저리에서 머물고 있습니다. 그들의 기대가 있는 한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12척의 배로 이순신은 세계 해전사에서 길이 남을 대승을 거두었다. 전란의 위기에서 민족을 구한 사람들은 만신창이가 된 이순신과 보잘것없던 12척의 배와 백성들이었다. 이순신이 버리지 않은 희망의 불씨가 횃불이 되어 민족을 구한 것이다. 아직도 조선을 기대하며 그 언저리에 머물고 있던 백성들에게 새로운 비전을 심어주었다. 이순신은 12척의 배를 보며 혼자말로 읖조렸을지 모른다. “아직 끝나지 않았어 아직 끝나지 않았어

오늘 한국 교회는 코로나 바이러스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메가톤급 영적 위기를 경험하고 있다. 내년에는 엄청난 변화를 강요받을 것이다. 12배와 조선의 백성들을 보고 희망을 말했던 이순신 장군처럼, 일터에서도 가정에서도 교회에서도 거룩한 희망의 불씨를 피워야 한다. 절망적인 분위기를 누가 희망적인 분위기로, 누가 안 된다고 말할 때 된다고 희망의 말, 율법으로 정죄할 때 누가 복음으로, 꺼져가는 복음의 불씨를 누가 부흥의 불길로, 자살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죽지 말고 함께 살자라는 희망의 불씨를 누가 심어줄것인가? 바로 우리들이 해야할 몫이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피투성이가 되더라도 살라고 주문하셨다. “내가 네 곁으로 지나갈 때에 네가 피투성이가 되어 발짓하는 것을 보고 네게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 다시 이르기를 너는 피투성이라도 살라”(16:6)고 하였다.

희망을 포기하기 하지 말라, 믿음을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희망과 믿음은 한  뿌리이다. 절망과 낙심과 상처로 얼룩졌어도,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 견딜 수 없어도, 시베리아 북풍에서 불어오는 시린 찬바람같이 너무 외롭고 고독할지라도 우리는 살아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명령이다. 우리의 생명은 주님 것이다. 우리를 빚은 주님은 우리를 향한 비전을 품고 계신다. 나를 향한 비전이 있기에 오늘 우리들은 다시 희망이란 글씨를 가슴에 품고 일어난다. 더 크고 좋은 것은 아직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이 너무 소중한 자산이 되는 것이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