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4일 오전, 10시 중대본에서 나온 코로나 안내 문자를 받았다. “700여명이 참석한 예배에 확진자가 3명이 있었지만 추가 감염은 0명! 비결은 교회 마스크 의무화입니다. 가장 쉽고 확실한 방역, 마스크 착용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은 두려움에 빠진다. 대상이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증상자들로 인해 감염의 우려를 느낀다. 그러나 감염학회나 질병본부의 지침서를 잘 따른다면 바이러스는 어느날 사라지거나 세력이 약화될 것이다.
특히 노약자, 기저질환이 있는 분들은 건강한 일반인들보다는 좀더 건강 관리가 필요하다. 교회 출입구에 의무화 된 사항을 잘 지키면 된다. 마스크 착용, 공간 및 손잡이 소독, 발열체크, 비말차단방지막에서 대화, 사회적 거리두기 등 일반적인 의무사항을 준수한다면 바이러스는 기생하기 힘들 것이다.
교회도 성도들의 안전을 위해 방역에 최선을 다하고, 예배도 최선을 다해서 드려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온라인 예배가 모든 것을 대체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일부 목회자들이 온라인 예배가 21세기 하나님이 주신 선교와 예배의 총체적인 선물인것처럼 말하는 것은 한국교회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온라인 예배가 모든 것을 다 해결해 줄것이라는 말로 예배의 가치를 호도해서도 안된다. 예배는 마음과 몸과 정성과 뜻을 다해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공간이 필요하고, 정결한 마음가짐과 절제된 몸이 가야 한다.
교회는 방역에 심혈을 기울이고, 주일예배를 다양화 시킬 필요가 있다. 교회 공간에 맞게 예배 회 수를 늘려, 성도들의 동선이 마주치지 않게 하며 예배를 유지하는 서비스가 필요하다. 인간의 노력을 게을리 하며, 성도들이 영적으로 자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적성장에는 지름길이 없다. 온라인예배가 진정 성도들의 영적 질적 성장의 지름길이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온라인 예배에 참여한 숫자와 평균 시청 시간을 조사해보면 참혹한 모습을 보게 된다. 온라인으로 모든 것이 다 해결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지 마라. 그 착각이 어느날 교회붕괴로, 생명보다 귀한 영혼들이 세상에 함몰되어 버리는 모습을 머지않아 볼 것이다. 내 교회는 내가 지켜야 한다. 대한민국은 중국이 미국이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국가는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 지켜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 교회는 내가 지키는 것이다.
국민들의 철저한 예방은 필요하지만 두려움과 공포에 빠져 벌벌 떠는 것은 또 다른 심리적인 정신적인 질병으로 이어진다. 전쟁도 하기 전에 무너지는 형국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 앞에서 벌벌 떨었다. 블레셋 대장군 골리앗 앞에서 벌벌 떨었다. 눈에 보이는 대상만 두려워했다. 그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존재를 잃어 버렸다. 그러나 문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셨다.
바이러스도 인간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하나님도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무서워 떨며, 보이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경솔하게 여기거나, 예배를 드리는 것을 포기하거나, 경건생활을 무시한다면, 위로부터 내려오는 영혼의 기쁨과 은혜가 멀어지게 된다. 은혜가 사라지면 기쁨도 감사도 평안도 희망도 동시에 사라진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바이러스보다 못한 취급을 받고는 있지 않는지, 우리의 마음을 점검해보는 계기가 되어야 한다.
바이러스 퇴치만큼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준비하고 대하는 자세가 더욱 요청된다. 예배를 안 드리는 이유를 너무 쉽게 찾지 말라. 방역에 최선을 다하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내는데 더 힘을 모아야 한다. 이때를 위해 목회자와 중직자들이 자기 결단과 헌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목회자와 중직자들은 내 교회 성도들에게 코로나 바이러스 위기속에 희망을 주는 이야기들을 만들어내야 한다. 희망만 있으면 공동체는 새 힘이 생긴다.
S교회는 성도들을 분리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연약한 한 두 가족을 위해 주일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수고는 아름다운 결과로 이어진다. B교회는 자원하는 성도들이 주일 아침 일찍 모여서 김밥을 정성껏 말아 예배에 오신 성도들이 가정에서 함께 드실 수 있도록 김밥을 제공한다. 수고없이 공동체는 세워지지 않는다. 어떤 교회 중직자는 떡과 예쁜 카드를 써서 교인들의 집을 찾아가 대문에서 전달했더니 성도들이 너무 기뻐하고 고마워하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런 다양한 이야기들이 한국교회에 서서히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각자 교회에 맞는 목회 이야기들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코로나를 극복하는 교회의 신선한 대안이 될 것이다.
설교 한편으로 목회를 다했다는 어리석은 논리에 빠져서는 안 된다. 목회는 설교 한편으로 다 되는 것이 아니다. 한 방에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욕심들이 있다. 말대로 이것은 욕심이다. 그런것은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아는데 그리 시간이 많이 안걸린다. 목회는 삶이 동반될 때, 믿음의 이야기들이 공동체속에 녹아 있을 때, 교회는 잔잔한 기쁨과 영적 에너지들이 흐르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