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창 목사의 신약이야기】 난해성구 연구 (20)

 

최세창 목사 / 1977년 감리교목사안수, 한국성서신학교 출강, 인천여신 출강, 협성대 출강, 훼이스신학대학원객원교수, *28년간의 1250여 주석대조연구로 신약 전권인 『최세창의 신약주석 시리즈』출판 *논문* “바울의 인간이해” “야고보서의 저자에 관한연구”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문제” “고용주와 고용인의 도리” “부부간의 도리” “부자간의 도리” “기도에 관한 성서적 개요” “서원기도에 관한 연구” “칭의에 관한 연구” “바울의 성 이해” “주석과 설교에 관한 소고” “히브리서의 저자 연구” 외 교계 잡지 연재 및 세미나 인도 다수
최세창 목사 / 1977년 감리교목사안수, 한국성서신학교 출강, 인천여신 출강, 협성대 출강, 훼이스신학대학원객원교수, *28년간의 1250여 주석대조연구로 신약 전권인 『최세창의 신약주석 시리즈』출판 *논문* “바울의 인간이해” “야고보서의 저자에 관한연구” “예수 탄생 이전의 구원문제” “고용주와 고용인의 도리” “부부간의 도리” “부자간의 도리” “기도에 관한 성서적 개요” “서원기도에 관한 연구” “칭의에 관한 연구” “바울의 성 이해” “주석과 설교에 관한 소고” “히브리서의 저자 연구” 외 교계 잡지 연재 및 세미나 인도 다수

예수님은 마태복음 5:36에서 “네 머리로도 말라 이는 네가 한 터럭도 희고 검게 할 수 없음이라”라고 말씀하셨다.

머리를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일반적인 맹세이며, 생명을 걸고 맹세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인간은 자신의 머리카락 하나도 희게 하거나 검게 할 수 없고, 자기 생명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이 엄연한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며, 그 생명의 연장 역시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반증이다. 따라서 머리를 가리켜 맹세하는 것은 실상 창조주 하나님을 가리켜 맹세하는 것이므로 머리를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이 금하신 맹세란 어떤 성격의 것인가를 규명해야 한다. 즉, 맹세라면 어떤 것이든지 다 금하시는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나 법정에서의 선서 등은 허용하시는 것인가?

재세례파(Anabaptists)①와 퀘이커(Quakers)② 등은 예수님의 교훈이나 야고보의 교훈(약 5:12)에 입각하여 법정에서의 선서를 금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예수님이나 야고보의 의도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예수님이나 야고보는 법정에서의 선서나 현대적 의미의 서약이나 혼인 서약 등을 금하는 것이 아니며, 또 서원을 금하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 대한 서원은 구약성경에서 얼마든지 허용되고 있다(창 28:20, 31:13, 레 7:16, 22:18, 21, 23, 23:38, 27:2, 민 6:2, 5, 15:3, 21:2, 29:39, 30:2, 3, 신 12:17, 삿 11:30, 39, 삼상 1:21, 삼하 15:7, 욥 22:27, 시 50:14, 56:12, 61:5, 116:14, 잠 20:25, 전 5:4, 사 19:21, 렘 44:25, 욘 1:16, 나 1:15, 신 12:11, 민 6:21 등).

신약성경에서는 바울이 서원한 바 있어 머리를 깎았다(행 18:18)는 기록이 있고, 그 외에도 사도행전 21:23에 서원한 사람들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 자신도 맹세하셨고(창 22:16, 민 14:23, 시 89:3, 110:4, 사 45:23, 히 6:13), 예수님도 맹세하셨으며(마 26:63), 바울도 역시 종종 하나님의 증거를 구하였다(롬 1:10, 빌 1:8, 살전 2:5, 10, 고후 1:23).

그렇다면, 예수님이나 야고보가 금한 맹세란 어떤 성격의 것이며, 그것을 금한 이유는 무엇인가?

{“맹세란 의심스런 더 열등한 것을 확증하기 위해 어떤 확실하거나 위대한 것의 명성을 걸어 약속하는 것이다”(M. Henry). 이러한 맹세는 어느 사회에서도 볼 수 있으나, 특히 유대인들에게서 심하였다(이상근). 이 점에 대해 바클레이(W. Barclay)가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유대 세계에서는 구속력이 있는 맹세와 구속력이 없는 맹세가 있었다. 전자는 하나님의 이름이 직접 사용된 맹세로서 하나님께서 그 거래의 능동적인 동참자가 되시기 때문에 반드시 지켜야만 한다. 반면에, 후자는 하나님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을 사용한 맹세로서 하나님께서 그 거래에 동참하지 않으시므로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회피할 수 있는 맹세를 하는 데 익숙해 있었다. 헨리(M. Henry)도 “신성 모독적인 맹세는 유대인들 사이에는 매우 습관적이었다.”라고 하였다.

칼빈(J. Calvin)은 “유대인들은 하늘과 땅으로 맹세하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남용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걸지 않는 한 아무런 해가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하였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나 야고보는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것으로나 맹세하지 말라고 엄히 경고하는 것이다.

예수님이나 야고보가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라고 하는 이유는,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 맹세함으로써 상대방의 신임을 얻어 자신의 이기적 야심을 충족시키는 위선 때문이었다. 또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거짓과 죄악을 진실하고 의로운 것으로 확신시키기 위해 맹세하기 때문이다. 그 예로 베드로의 경우를 들 수 있다. 그는 “예수와 함께 있었다”는 비자의 말에 두 번씩이나 맹세하며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였다(마 26:69-74). 결과적으로 이러한 맹세는 신성 모독적인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인간이란 미래의 사실에 대해 확실한 지식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함부로 맹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C. R. Erdman, 黑崎幸吉).}(약 5:12의 주석).

강력하게 맹세를 금하신 예수님은 그 대안으로 【37】[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의 [옳다]는 나이(ναὶ)이며 ‘예’, ‘옳다’, ‘그렇다’ 등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문장은 옳은 것은 옳다고 말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해, 맹세가 필요없을 정도로 진실한 말을 하라는 것이다. {포티트(G. Poteat)는 “맹세에 의해 제공될 외부적인 지지가 실제로 정직한 사람에게는 불필요한 것이다.”라고 하였고, 바클레이(W. Barclay)는 “정직한 사회란 맹세가 필요 없는 사회이다.”라고 하였다.}(약 5:12의 주석).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맹세를 하지 않고도, 옳다고 하거나 아니라고 하는 말 그대로 받아들여질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모든 말은 그대로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이어야 한다(시 51:6).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는 진실한 마음에서 비롯된 옳다고 하는 말이나 아니라고 하는 말을 넘어 맹세하는 것은 악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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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석서와 주해서에서 인용할 경우에는 저자의 이름만 밝혔고, 같은 견해를 가진 학자들이 네 명 이하일 경우에는 본문의 괄호 속에 이름만 밝혔음.

1) 그리스도교 대사전, pp. 901-903. 이 종파는 16세기초의 종교 개혁 당시 독일, 화란, 스위스 등지에서 일부 과격한 개혁 주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일으킨 운동의 산물로서, Münzer, Hübmaier, Denck, Grebel 등이 그 지도자들이다.

재세례파라는 명칭은 유아 세례를 부인하고, 장년이 되어 신앙 고백을 할 때에 다시 세례를 받아야 온전한 신자가 된다고 주장한 데서 유래하였다.

이들의 공통적인 주장: (1) 성서만이 교회와 생활의 유일한 표준이 된다. 동시에 성서를 자기 스스로 해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2) 국가와 교회는 엄격히 분리되어야 하며, 국가 권력이 교회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3) 교회는 거듭난 자들의 자발적 모임으로서 세례와 엄격한 규율에 의해 그 순수성이 유지되어야 한다. (4) 유아 세례는 비 성서적이다. 폴란드와 스위스 지방의 재세례파는 침례가 정당한 세례 예식이라고 주장한다. (5) 개체 교회가 목사와 직원을 선출할 권리가 있다. (6) 법정 성서와 관리 취임을 거부한다. (7) 행 2:24 이하를 본받아 자발적 공산주의를 주장한다.

2) Ibid., pp. 1039-1040. 시조인 조지 폭스(G. Fox, 1624-91)의 독특한 회심의 경험을 통해 시작됨. 1647년경에 퀘이커란 명칭이 붙었다. 생활 태도는 열성적이고도 공격적이며 꿋꿋한 정신력의 발휘를 도모했다. 그들은 모든 교회의 형식(세례, 십일조, 성찬식 등)을 거부하고 분노를 가지며, 다만 그리스도와의 내적 교통을 중시한다. 종교적 경험을 중시하며, 성서 시대 이후의 영감을 주장한다. 사회 개량에 관심을 갖는다. 1952년 말부터 조직화되기 시작하여 총회로 모이기도 하며, 여기서 장로를 뽑기도 한다.

출처: 최세창, 마태복음(서울: 글벗사, 2004년), pp. 213-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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