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주일예배

  • 입력 2021.02.05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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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인 칼럼】 미래교회의 예배 (22)

 

최종인 목사, 평화교회담임, 성결대, 중앙대석사, 서울신대박사, 미국 United Thological Seminary 선교학 박사, 공군군목, 성결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외래교수
최종인 목사, 평화교회담임, 성결대, 중앙대석사, 서울신대박사, 미국 United Thological Seminary 선교학 박사, 공군군목, 성결대학교, 서울신학대학교 외래교수

주일예배의 기원

일요일이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의 예배하는 날로 정착되었을까? 초기기독교 공동체는 유대교와 그 문화에 매우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초대교회 공동체는 유대교의 전통 속에서 모임을 이어갔지만, 예수의 부활과 승천 사건 이후로 그 모임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여 모이기 시작하였고, 그 날을 한 주간의 첫 날로 기록하고 있다. 신약성서에는 3곳의 본문에서 주일에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가졌던 것에 대한 기록을 찾을 수 있다. 그 주간의 첫날에 예배를 위해서 드로아에 함께 모였던 바울과 그의 무리들은 주일을 지내고도 더 머물러 날이 늦도록 설교하였다. 성경은 “떡을 떼려” 이들이 모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행 20:7-12). ‘매주 첫날에’(고전 16:2), 그리고 ‘주의 날’(계 1:10)은 모두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주일의 의미였다. 기본적으로 안식일과는 그 개념과 실제에 있어서 구별하려는 노력을 하였다.

초기의 유대교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전통에 따라 주일을 안식일로 지켰으며, 그 주일은 종말론적 성격이 강한 안식일의 개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바울의 영향 하에 있었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들의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워서 안식일을 지켜야 된다는 어떠한 의무감도 없었기에, 예배를 위한 요일을 안식일로부터 일요일로 옮기는 것에 전혀 문제될 것이 없었다. 특별히 부활 후 주님께서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한 식사의 자리가 한 주의 첫 날에 이뤄진 것으로 보이기에, 이들이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던 성찬도, 초기에는 토요일 저녁에서 일요일 저녁으로 옮겼을 것이고, 이후 자연스럽게 일요일 오전으로 자리를 옮겨 왔다. 초대교회는 주일을 예배의 날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켰는데, 여기에서 ‘주일 성수’라는 용어가 나온다.

그들이 주일을 지키는 데는 몇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마르바 던(Marva J. Dawn)의 통찰에 의하면, 그 첫 번째는 그침의 차원이었다. 이것은 단지 일 자체의 그침만은 아니었다. 마르바 던은 “성취와 생산의 필요에 대한 그침,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성공의 기준으로 인한 염려와 긴장에 대한 그침, 소유욕과 문화에 대한 그침, 하나님을 삶의 중심에 두지 않고 살아갈 때 생겨나는 단조로움과 무의미에 대한 그침”까지 포함한다고 했다. 일을 그치는 것(Ceasing Work)은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기 위함이며, 근심, 걱정, 긴장, 욕심을 멈추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쉼의 차원이다. 쉼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였으며, 그분이 깊이 원하시는 바였다. 주일은 예배를 위해 모든 노동을 내려놓고 주 안에서 진정한 쉼과 영적 안식을 누리는 날이다. ‘쉼’을 뜻하는 히브리어 ‘메누하’는 일과 삶의 긴장으로부터 자유와 같은 차원을 훨씬 넘어서는 단어인데 이것은 무엇을 하지 않는다는 수동적이고 부정적 차원보다는 훨씬 적극적 의미를 가진 단어다. 이것은 우리 삶의 주인이신 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는 길목에서 만나게 되는 차원이다. 그래서 시편 23편은 “쉴 만한 물가”라는 표현에서 바로 ‘메누호트’(메누하의 복수 연계형)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평화와 그분 품에 있을 때 맛보게 되는 차원으로 연결한다.

세 번째는 받아들임이다. 주일을 지키는 보다 적극적 자세는 하나님의 은혜에 반응하고 온전히 잠기는 것이며, 그것을 세상과 나누는 일이다. 즉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수행하려는 결단과 삶의 실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네 번째는 축제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의 역사와 은혜에 대한 감격을 가지고 송축하는 예배드림으로 귀결됨으로 주일을 완성하게 된다. 예배는 시간을 때우는 자세나 딱딱한 의식과 경직으로 채울 것이 아니라 경축과 감격으로 채워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

초대교회와 현대교회의 가장 큰 공통점이 있다면, 두 시대 모두 예배를 중심으로 모이는 공동체라는 것이며, 이는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님의 날에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는 것에 초점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독교는 예배로 시작되어서 예배로 그 정체성을 지켰으며, 오늘도 예배하는 모임이다. 특별히 주일에 함께 모여서 예배함을 통하여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가 되는 은혜의 수단을 경험하게 된다.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함을 통하여 죄인인 우리가 죄로부터 해방됨을 경험하게 된다. 찬양, 기도, 말씀, 봉헌, 그리고 결단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음을 확증하게 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현대의 예배 공동체는 주일에 함께 모여 예배함의 본질적 의미를 온전히 경험하지 못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하게 된다.

주일예배의 강화

주일 예배는 공적이어야 한다. 교회 공동체가 가장 공적으로 모일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은 주일 예배이다. 비록 교회 공동체가 공동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많은 모임과 프로그램을 가질 수 있지만, 교회의 공동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명확한 것은 예배이며, 이는 주일 예배이다. 교회는 주일 예배를 통해서 그 교회가 어떤 교회인지를 나타낸다. 교회의 사명이 예배를 통해서 선포되고, 교회의 과거 역사와, 오늘의 기도 제목, 그리고 미래의 선교적 사명이 예배를 통해서 모두 나타난다. 비록 매주일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교인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이들에게도 주일의 예배는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고향과 같은 평안과 위로와 회복을 주는 시간과 공간이다.

그럼에도 현대 예배가 지나치게 개인화되고 있는 것에 우려가 있다. 일부 계층, 혹은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주일 예배 공동체는 건강한 예배 공동체가 될 수 없다. 주일 예배는 교회의 모든 것에서 우선적이어야 한다. 일주일에 한 차례, 주일 예배에 참석하는 것만으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상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교인들 가운데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예전에 비해 주중의 예배나 모임에 참여하는 성도들이 줄어들고 있어 우려가 된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면서, 단순히 성도들에게 주일 예배 참여를 강조하고, 주중의 신앙생활에 대한 독려가 이들의 영성을 깊게 할 수 있을까? 물론 그럴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쉽지 않다. 오히려 이들이 참여하여 드리는 주일의 예배를 강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하루 모이는 예배를 통해서도 영성을 유지하고, 더 깊어지도록 주일예배에 집중해야 된다.

나는 지난해 교회표어를 “더 잘 예배하는 교회”로 정했다. 성도들의 신앙확인카드를 나눠주고, 주일예배 설교를 압축하여 “인생을 바꾸는 3분 말씀”으로 편집하여 나누고 있다. 주일의 예배가 교회의 심장과 같은

역할을 감당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 주일 설교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예배를 통해서 영적 수혈이 이뤄질 수 있도록 예배에 집중하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교회의 온 사역들을 중단하고 있다. 그래서 더욱 주일예배를 여러 사역을 대신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집중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들에서는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교회는 힘을 잃었고, 그 증상으로 예배가 사라지거나 축소되고 있다. 그렇다면 주일예배를 강화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유우열 목사는 예배 회복을 위해 세 가지를 제안한다. 첫째, 설교가 변해야 한다. 성도에게 듣기 좋고 편한 설교를 넘어서야 한다. 미국 퓨리탄 리폼드 신학교 총장이 말한 ‘청교도의 설교 포인트’가 기억난다. “청중의 필요를 채우는 설교가 아니라 청중을 불편하게 만드는 설교”를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예수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유쾌하지 않았고 마음 무거웠고 심각한 갈등과 고민을 가지고 돌아가는 경우가 많다. 성도에게서 ‘아멘’을 많이 이끌어냈다고 해서 좋은 설교인 것은 아니다. 시대의 흐름에 불순응하게 해야 한다. 존 스토트는 진정한 제자의 첫 번째 요소는 불순응이라고 했다. ‘다원주의, 물질주의, 상황주의, 자기애’에 대한 불순응이다. 설교자는 하나님 중심에 서서 성도에게 희생과 순종을 요구해야한다. 세상의 흐름에 저항하고 창조질서에 입각해서 예배하며 삶을 이루어 가도록 독려해야 한다.

둘째, 예배가 다양해지고 특화되어야 한다. 예배 회집 인원이 줄어들면 마음에 갈등이 일어난다. 성도가 힘들어서 참석 인원이 줄었다고 생각해 예배나 모임을 없애거나 시간을 줄이는 판단을 하기 쉽다. 저녁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하나 싶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대부분은 그 시간을 가족과 함께 보내기보다 각자 쉬는 시간으로 대체한다. 이미 주 5일 근무제가 정착되었고, 최근 52시간 근무제의 도입으로 인해 여가의 시간은 충분하다고 본다. 오히려 영적인 활동이 육적인 활동의 풍성함으로 인해 제한을 받는 것을 걱정해야 할 때다. 교회는 예배 시간을 특화시켜서 예배를 드림으로 영적 충전과 기쁨을 얻도록 해야 한다. 육신적 쉼을 통해 얻는 즐거움보다 더 나은 영적 만족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 목회자가 희생을 각오해야 한다. 최후에 한 명이 남아도 그 한명과 예배하겠다는 목회자의 결심이 있어야 한다. 모이는 성도 수에 예민할 필요가 없다. 새벽에 한 사람이 오면 그 한 사람과 기도하면 된다. 저녁예배나 수요예배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어떤 희생이라도 각오해야 한다. 성도의 쉼을 이야기하면서 예배를 축소하지만, 실상은 나의 편안함을 추구하기 위함이 아닌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쉼도 필요하겠지만 쉼을 추구하다가 본질이 약화될까 두렵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질 때 나타나는 증상은 예배가 약화됨이다. 한국 교회에 예배가 축소되고 사라지는 것은 매우 심각한 영적 질병의 신호다. 이것을 이기지 못한다면, '다음 세대'가 아닌 '다른 세대'가 일어날 것이고 영적 암흑이 몰려올 것이다. 주일의 회복을 위해 박차고 일어나 현실을 돌파해야 하겠다. 나는 유우열 목사의 말에 깊은 공감을 갖고 있다. 코로나 시기에 더욱 주일예배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온 정성을 기울일 때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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