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논리학(論理學)”이라고 하는데, 영미권에서는 “Logic, 논리(論理)”라고 한다. 20세기 논리학의 기술 1, 2를 집필한 윌리엄 닐(William Kneale, 1906-1990)은 고대에서 근대까지 철학자들이 가진 논리 구조를 정리했다. 논리학은 언어, 철학, 신학(종교), 법학 등 모든 문리(文理) 분야에서 흐르는 피와 같다. 논리가 없으면 문리는 없다. 역사학도 과거 사건에 대한 정리가 아니라, 과거 사건을 해석하기 위해서 논리의 힘이 필요하다. 논리는 해석 과정과 결과를 예측할 수 있는 설계도이다.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정상(normal)에서는 반드시 논리에 의해서 진행되게 되어 있다. 논리대로 진행되지 않은 사람은 비정상(ab-normal)이다. 체계적인 악인이 있고, 개념없는 악인이 있고, 체계적인 의인이 있고 비성숙한 의인이 있다. 성숙은 다른 표현은 논리이다. 논리는 이성적 인간에게 자연스러운 것이지만 훈련에 의해서 성장한다. 잘못 훈련을 받으면 이상한 모습을 갖게 되고, 정상에서 벗어나면 돌이키기가 거의 어렵다.

플라톤은 아카데미에 “기하학을 모르는 사람 이 문으로 들어오지 말라(Let no one untrained in geometry enter)”고 했다. 기하학의 기본이 논리이다. 서양 지성인들의 기본은 유머 능력인데, 논리가 없으면 유머 어휘를 말할 수 없다. 암기한 유머는 유머가 아니고, 상황에서 적절한 역설과 독설을 할 수 있는 논리가 있어야 한다. 역설적 독설을 칭찬과 유머를 구사했는데, 그것을 칭찬으로 인지하는 상대를 관객들은 어떻게 평가할까?

최덕성 박사는 『빛나는 논지 신나는 논문쓰기』(지식산업사)에서 논문을 쓰기 위해서 논리 능력이 있어야 하는 것을 밝힌다. 논리에 오류가 발생하면 결국 합당한 결과를 산출할 수 없다. 최 박사는 “수레를 말 앞에 두는 오류”를 즐겨 표현한다. 선결 문제의 오류(The Fallacy of Begging the Question)라고 하며, 순환논법의 오류라고도 한다. 선결 문제의 오류(先決問題要求의 誤謬, Petitio Principii)는 증명되어야 할 사안이 증명을 요구하는 주객(主客) 전도(顚倒) 현상이다.

논리를 세우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논리력이 아니라 기하학이다. 기하학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stand point)”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다. 거기에서부터 논리를 전개할 수 있다. 그러나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그 위치를 인지시키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프로는 반드시 그것을 수행한다. 어떤 프로선수가 트레이드될 팀이 결정되었고, 자기가 트레이드될 팀을 상대로 마지막 경기에 참여할 때에, 현재 팀의 승리를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혹시 내일 갈 팀에 대한 의식이 있을지라도 내색을 표현하면 안 된다. 현재 팀의 승리를 위한 결정적인 순간이 자기에게 왔을 때에 그 선수를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 프로는 내일 트레이드되어 갈 팀이지만, 오늘 팀에 최선을 다해서 내일 트레이드될 팀을 이기도록 최선을 다한다. 반드시 그렇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프로 세계에서 전혀 가치가 없다.

기하학은 제일은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아는 것이다. 최정호 목사는 기하학을 “땅따먹기”로 재미있고 쉽게 설명한다. 땅따먹기는 반드시 시작점에서 시작한다. 시작점에서 상대방과 공유면적을 점령하고, 접점이 되면 상대방의 땅을 점령하는 방식으로 게임을 진행한다. 어떤 방법으로 땅을 넓일 것인가?를 계산하는 것이 논리이다. 계산에 의해 결정된 것을 수행하는 것이 행정, 계획 수행 능력이다.

논리에서 전제가 다르면 결과가 다르게 나타나고, 틀리면 틀린 것과 연결된 틀린 결과가 나와야 논리적이다. 자연 현상과 동일하다. 콩을 심으면 콩이 나와야 하고, 팥을 심으면 팥이 나와야 한다. 심은 대로 거두어야 한다. 심지 않고 거두려는 것, 일하기 싫은 자는 거두지 않아야 하고 먹지 않아야 한다.

논리는 당연하고, 비논리가 논리가 될 수 없다. 역설(逆說)은 모순(矛盾)이 아니라 인간의 여백이고 즐거움이고 힘이다. 우리 사회가 너무나 부조리하고 비논리적으로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반드시 심은 대로 거둔다. 열심히 일한 자가 그에 합당한 재화를 획득한다. 결과가 다르다면 전제와 과정을 다시 점검하고 계산해야 한다.

논리에서 전제가 중요하다. 전제를 밝힌다면 전제와 논리 전개 과정을 살피면 결과를 예측할 수 있고, 결과에 이르지 못할 때에 과정을 검토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전제를 추상적으로 설정하기 때문에 과정과 결과를 평가할 수 없다. 자기 전제를 명확하게 세우는 것이 논리를 구축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편이다.

전제(前提)는 확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동 가능한 조건이다. 전제가 변동되면 목표가 변동되거나 좀 더 확실해질 것이다. 어떤 행동이 자기 목적과 자기 전제에 근거한 것이면 논리적인 사람이다. 그러나 행동이 주변에 휩쓸려 행동되는 것은 “남이 장에 가니 두엄 지고 장에 가는 것”이다. 두엄 지고 따라오는 사람을 칭찬하며 자기편으로 이용하는 것은 타인의 무지를 악용한 자기 이익 편취이다. 무지(無知)하여 속은 사람의 책임이 클까? 그 무지를 악용하는 사람의 책임이 클까? 논리에서는 자기 무지에 무한한 책임을 부과시킨다. 그런데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다른 구도이다. 교회는 타인의 무지를 이용, 악용하면 그 책임이 반드시 부과된다. 유교에서도 부정하는 미신(迷信)을 교회가 이용한다면 그 죄책을 피할 길이 없다. 16세기 루터와 칼빈, 미신, 맹목적 신앙(implicit faith)을 철저하게 거부했다.

20세기까지 교회는 구원의 안정적인 기관으로 인정되고 있었는데, 칼 바르트에 의해서 교회의 권위가 완전하게 해체되었다. 이에 대해서 반틸 박사가 전제주의(pre-suppositional)를 제언했다. 칼 바르트의 전제는 “회의하는 인간 실존”이었고, 반틸 박사의 전제는 “하나님의 존재”였다. 최정호 목사는 “하나님의 존재와 그것을 인식하는 나”로 전제를 제언했다. 고경태는 “예수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는 나”로 전제를 설정하여 사유한다. 전제에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까?

인간과 인류는 망각의 존재이고 탐욕의 존재이기 때문에 오류가 발생한다. 망각하는 기능은 회복할 수 없지만, 탐욕을 포기하고 사랑을 선택할 수는 있다. 지구온난화는 막을 수 없지만 사랑은 유지하고 증진시킬 수 있다. 사랑이 허다한 죄를 덮는다. 가장 탁월한 논리는 사랑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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