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춘추전국시대에 월나라에 중국의 4대 미인(서시, 왕소군, 초선, 양귀비)에 속하는 서시(西施)라는 미인과 동시(東施)라는 추녀가 살고 있었습니다. 서시는 본명은 시이광(施夷光)입니다. 서시는 혐심증이 있었기 때문에 걸을 때에 눈쌀을 찌푸리고 가슴을 어루만지면서 걸어야 했습니다. 사람들은 서시의 모습을 아름답다고 흠모했습니다. 서시는 경국지색(傾國之色)이었습니다.

한 동네 살던 동시는 추녀(醜女)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서시를 좋아하자 동시는 서시의 행동을 따라 했습니다. 동시는 서시가 하는 행동을 그대로 따라하면 미인이 될 것으로 판단했을 것입니다. 동시는 서시의 행동, 눈쌀을 찌푸리는 것과 가슴을 어루만지는 행동을 따라했습니다.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서시가 그렇게 아름다웠을까요? 그래도 서시는 경국지색으로 한 나라를 망하게 한 여인이었습니다.

와신상담(臥薪嘗膽), 월나라 범려는 월의 미녀 서시를 미인계로 활용합니다. 서시의 미모는 오나라의 오자서와 오나라 왕 합려와 이간계를 성공시킵니다. 오자서가 없는 오나라는 무기력한 나라가 되어 결국 월 나라에 정복되었습니다.

오월동주(吳越同舟), 오월(吳越) 대표적 원수 관계인데, 결국 서시의 미모로 인해서 오나라 월나라에 정복되고 맙니다.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아름다움, 미(美)는 풍성한 인간성을 보여주는 최고봉입니다. 그런데 그 아름다움을 소유하려한다면 인간성은 파괴될 것이며, 국가까지 파괴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항상 부당한 것을 좋아합니다. 동시가 서시의 병에 의한 찌뿌림을 시기했듯이, 우리들도 부당한 것을 아름답게 생각합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을 부당하게 사용하면 인간성이 파괴됩니다. 꽃은 꽃일 때 아름답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야생화도 자기의 한 공간을 점유하며 자기 생명을 복되게 합니다. 자기가 서 있는 공간에서 자기를 보여줄 수 있다면 후회없는, 실패가 아닌 인생이 될 것입니다.

아름다움은 무엇일까요?

인간이 만든 아름다움은 인조(人造)입니다. 사람이 만든 아름다움은 자연과 사람을 잘 표현하는 것이 아름다움입니다.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를 통해서 등장한 추상화(abstraction)는 아름다움을 의미를 새롭게 했습니다. 인조품이 인간의 인간성을 바꿀 수 있습니다. 인간은 인간됨을, 사람은 인간됨을 추구하는데 그 정점에 사물을 아름답게 보는 것입니다. 그 인생이 아름답게 보인다면 성공한 인생입니다.

우리는 동시처럼 서시를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서시는 경국지색으로 한 국가를 멸망시킬 위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 미모는 아름다움을 파괴에 사용되었습니다. 파괴와 정복에 사용되는 아름다움은 결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비록 월나라 사람들이 서시를 영웅으로 칭송할 수 있지만, 아름다움이 아니라 치밀하고 헌신된 행동을 칭송할 것입니다. 우리가 부러워하는 타인의 아름다움은 단순한 외적 아름다움일 때가 많습니다. 사람이 소유한 경제, 권력, 명예 가치는 결코 아름다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아름다움을 부러워한다면 우리는 서시가 되지 못하며 동시에 불과합니다. 유태인들은 부자가 되려면 부자를 존경하라고 가르친다고 합니다. 세상 탐욕이 아름답게 보이거든 차라리 권력자에 아부하고 존경하며 추앙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입니다. 내가 먹지 못하니 너도 먹지 못하게 하겠다는 몽니는 추함이 아니라 악함입니다.

아름다움은 꺾지 않은 것이며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동시가 서시의 아름다움을 보고 즐거워할 수 있었다면 추함을 당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자기 아름다움으로 사람들과 더불어 설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동시가 서시의 건강이 좋지 않음에 함께 마음을 아파했다면.... 사실을 파악한 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눈에 아름답게 보이는 현상은 전혀 아름다운 사실이 아닐 확률이 매우 높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관점이 왜곡되었기 때문입니다. 왜곡된 관점을 수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세운 아름다움은 결코 아름다움이 될 수 없는 인간성을 무시하고 파괴하는 인조품이 될 것입니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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