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담: 박창희 목사(김명엽 권사의 육남매 중 장남)

박창희 목사는 광주 신원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박 목사는 전남노회에서 노회장을 역임하였으며 충성되어 목회하고 있습니다. 자기 신앙의 근저에 있는 어머님, 김명엽 권사의 신앙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에게 유익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해남군 문내면 석교리에 소재한 해남반석교회는 화원반도 가운데에 있는 교회입니다. 반석교회는 혜암교회에서 분리되어 설립되었습니다. 반석교회 설립에는 문선례 (당시 집사)가 마을에 교회를 세우고 싶어서 자기 집의 대청마루에서 시작된 교회입니다.

목포 시온성교회의 집사였던 박요나를 전도사를 모시고 초가지붕에 대나무 십자가를 꽂아 놓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한 것이 반석교회의 시작입니다. 당시 종탑의 종은 산소통 절반을 잘라서 동백나무에 걸어서 종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시온성교회를 개축할 때 나온 마루짝을 배로 옮겨서 마루를 깔고 교회를 지었다고 합니다.

 

"김명엽 권사 복음 영접: 희망없음(남편폭력, 가난, 자살시도)"

그런데 김명엽는 어떻게 복음을 영접했을까요? 김명엽의 남편이 6,25 때 인민군에 끌려가 부역을 했다는 이유로 화원면 산수리에서 눈치가 보이니 석교리로 이사했습니다. 당시에는 토지가 있어도 살기가 어려운 때였는데 땅이 한 평도 없었습니다. 석교리의 삶은 매우 힘들었습니다. 아침은 보리밥, 점심은 고구마, 저녁은 좁쌀죽을 헐렁하게 써서 훌훌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당시 시골에서 땅이 없는 집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딱 두 가지였다. 남의 집 일을 돕는 품팔이와 소작농이었다. 소작농은 가을걷이를 해 놓으면 주인이 절반을 가져가고 나머지 절반으로 생계를 꾸려가는 형편이어서 말 그대로 입에 풀칠하기 힘든 시대였습니다.

김명엽에게는 꿈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남편인 박상묵은 농한기에는 밤낮 하는 일이 술에 취해서 어머니와 자식들에게 폭력을 행사 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가난과 폭력 그리고 소망이 없던 나날들이 반복되자, 어머니는 한 많은 세상을 떠나야겠다고 결심하고 동네 근처 호수에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놓고 치마를 뒤집어쓰고 뛰어 들었습니다. 이웃집 아저씨가 보았고 급하게 달려와 어머니를 구해줘서 죽지 못해 살게 되었습니다. 죽지 못한 어머니는 넋이 나간 채 마루 기둥에 기대어 멍하니 하늘만 처다 보고 있을 때에, 석교리에서 혜암교회로 교회를 다니던 문선례 집사님이 싸리문을 열고 들어와 앉았습니다.

문선례 집사 : 어이 동상! 죽으려고 했는가?

김명엽 : (아무 대답이 없이 하늘만 쳐다고 보고 있음)

문선례 집사: 니가 왜 죽어?

                   니가 남편이 없냐? 자식이 없냐? 죽을 병이 들었냐?

                    가난한 것뿐인디 죽을 이유가 뭐시당가?

                    죽을라믄 내가 죽어야 제!

당시 문 집사는 자식 여덟을 낳았지만 남편에게 버림받은 사람이었습니다. 문 집사의 남편은 외모가 출중했는데, 사람이 얼굴값을 한다고 그 얼굴값을 했나봅니다. 목포에 있는 요정집 마담의 기둥서방 노릇을 하면서 1년에 한 번도 집에는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남편에게 버림받은 한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문 집사님의 유일한 희망은 예수 믿음과 천국 소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소망을 붙들고 동네에서 혼자서 멀리 떨어진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문 집사님은 “죽으려면 내가 죽어야지 네가 왜 죽냐?”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문선례 집사 : 내가 그래도 사는 것은 예수를 신랑으로 모시고 사니 오늘까지 버티고 살아 온거다잉. 그러니 너도 나 따라서 교회 한 번 가보자. 마음을 독하게 먹어봐라!” 마음 독하게 먹는 것도 하나님이 그 마음 주셔야 마음 독하게 먹을 수 있다잉

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은 김명엽은 이틀 동안 이불을 뒤집어쓰고 방안에 있었습니다. 사흘 째 되던 주일날 이른 아침 한복을 곱게 다려 입고 한 동네 살던 문선례 집사를 찾아갔습니다.

김명엽: 형님 나 오늘 부터 교회갈라요

문 집사는 버선발로 뛰어나와서 “워메 잘 생각했다잉, 워메 고맙네” 하면서 손을 꼭 잡아 주셨습니다. 그날부터 김명엽은 문선례 집사를 따라 교회(혜암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죽으려다 살아났기에 온 가족은 어머니 눈치만 보던 나날이었는데, 갑자기 한복을 입고 문선례 집사와 십리길에 있는 교회에 가서 저녁예배까지 드리고 오셨습니다.

교회를 나가신 첫 주일에 어머니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하루종일 울고 또 울었습니다. 어머니는 믿음의 처소가 교회라고 굳게 결심했습니다. 어머니는 그 다음부터 매일 일을 마치면 밤마다 교회로 향했습니다. 저녁에 밤새 내내 철야 기도하시고 새벽예배를 마치시고 집으로 오셔서 일과를 보내셨습니다.

박창희 목사는 그 때 상황은 정말 겁나는 모습이었다고 자기 경험을 말합니다. 물에 빠져 죽으려던 분이 뜬금없이 교회를 가고 교회에 밤을 보내고 있으니 이해가 쉬운 상황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완전히 미친 것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어머니는 비가 많이 오면 교회를 못가니 허청에 가마니때기를 펴고 기도를 하면서 밤을 보냈습니다. 6개월 가량을 그렇게 피곤하게 들일을 하시고도 밤마다 쳘야를 하며 기도하시더니 어느 날 부터는 방언으로 기도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자신도 알아들을 수 없고 우리들도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그 때는 가족 모두가 진짜 미친 줄로 알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렀습니다. 집안 식구는 어머니 때문에 다 우울한데 정작 어머니는 활력 넘치게 생활을 하셨기 때문입니다.(다음에 계속됩니다)

박창희 목사(광주 신원교회)
박창희 목사(광주 신원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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