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할 때에 난방을 전열기로 합니다. 전열기는 전기를 넣자마자 바로 따뜻하게 하는 것은 아니지만 빠르게 따뜻하게 해 줍니다. 전열기가 필요없이 항상 따뜻한 공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앉자마자 전열기 스위치를 ON으로 해두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가도 따뜻해지지 않았습니다. 생각해보니 어젯밤에 플러그를 뽑아 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스위치만 ON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전기는 풍성하지만 전기와 떨어진 전열기 스위치를 ON으로 해도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열이 나지 않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반대로 전선에 연결되었지만 스위치를 ON으로 켜지 않으면 따뜻하지 않습니다.

연결되었고 스위치를 ON했지만 전열기가 고장이면 따뜻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고장이 났어도 어느 곳에서 약간은 열이 날 수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전열기가 고장이 났는데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1단이 고장 나서 2단으로만 사용하다가 그것도 고장이 났습니다. 수리할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전열기와 전기 그리고 스위치와 고장의 관계는 우리의 구원과 비유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전기(하나님), 전열기(인간)로 비유가 잘 되지 않은 것은 인간은 인격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전열기를 제작(製作)했고, 창조주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創造)하셨습니다.

사람의 호기심은 긍정과 부정의 양면이 있습니다. 긍정의 범위를 넘어서면 인간성을 파괴하는 심각한 부정이 발생합니다. 칼빈은 경건의 요소에서 겸손을 매우 강조하였습니다. “헛된 사색(idle speculation)”은 신학자들이 모두 부정으로 제시합니다. 필자는 칼빈이 헛된 사색을 “내적 교사(Inward Teacher)의 도움이 없는 사색, 교회와 사회를 파괴하고 혼란시키는 사색”으로 규정한다고 생각합니다. 내적 교사는 성령 외에 다른 이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열기의 ON/OFF 그리고 열이 남 등의 메커니즘을 구원 도식에서 이해하려고 했다고 생각합니다. 명료한 신앙(explicit faith)은 개혁파가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명료한 신앙은 구원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주의 이름을 명확하게 알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내재적 신앙(implicit faith)은 일단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으로 간주하는 형태입니다. 목회 사역 현장에서 쉽지 않은 분류입니다.

사람의 내면을 설계도처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창조주께서 만드신 사람의 외면의 설계도(Human Genome Project, HGP)도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인간이 양, 소 등을 복제하는데 성공해서, 인간 복제에 접근하려고도 합니다. 인간이 인간을 복제할 수 있을까?? 구원의 신비만큼 쉽지 않은 문제입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설계도로 그릴 수 없고, 혹 그렸다고 해도 작동은 에너지와 본성으로 작동하지 않습니다.

청교도들이 황금사슬(Golden Chain)이란 제목으로 구원의 메커니즘을 제시하며 이해한 것으로 보입니다. 17세기 잉글랜드는 이신론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학문부흥기입니다. 17세기에 청교도들은 신의 계시(啓示)에 의한 지식을 추구한 것에 대해서, 크롬웰 군대 장교의 아들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이나 『그리스도교의 합리성』에서 절대자의 세계를 이성으로 규정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뜻(목적)을 아는 것”이 큰 목적 중 하나였던 것 같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과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한 방법을 아는 지식을 밝히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에게 주신 여호와의 계시대로, 믿음으로 살면 됩니다. 18세기 산업혁명은 증기기관 발명에 흥분해서 이성만능주의를 외쳤습니다. 21세기 열기관에서 전기기관으로 넘겨지는 복잡한 기술도 평면적인 메커니즘에 불과합니다.

전열기에 전기선이 연결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ON 스위치를 눌러도 난방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전열기가 고장났다면 전기를 넣어도 열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전열기가 고장이 났어도 미열이 날 수 있는 수준일 수도 있습니다.

전선과 연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열기에 ON 스위치를 아무리 눌러도 열이 나지 않을 것입니다. ON 스위치를 넣고 따뜻하기를 기다린다면 큰 바보일 것입니다. 고장 난 전열기에 전기를 넣으면 오히려 화재에 위험이 따를 것입니다.

이러한 평면적 메커니즘으로 구원 관계를 상상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습니다. 인간 구원 도식은 전기 도면처럼 평면적인 메커니즘이 아니고, 이해될 수 있는 도면이 아닙니다. 인간의 복잡성에 인류 사회의 복잡성이 결합되면 상상할 수 없는 미로가 발생합니다. 인간과 사회의 복잡성을 해소할 수 없는 메커니즘입니다. 토정비결이나 타로 카드의 복잡한 수식으로 밝힐 수 있는 복잡성이 아닙니다.

성경이나 인류나 인생에서 해소되지 않은 문제는 셀 수 없습니다. 또 기억하지 못한 내용, 파악하지 못한 내용은 더 많습니다. 그러한 무능과 무지에서 인간은 겸손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시대의 정신은 자기지식의 탁월성으로 규정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근거는 300년전보다 비교할 수 없는 과학과 기술의 탁월성이며, 더 진보할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사람의 언어는 역설(逆說, paradox)까지 만들 수 있지만, 영(靈)을 아는 지식을 이룰 수 없습니다. 기술과 과학이 아무리 발전해도 결코 평면적 체계에서 복합적인 체계를 이룰 수 없습니다. 기술과 과학 정보는 거대 메모리(Data Center)에 저장할 수 있지만, 영을 아는 지식은 인간이 만든 메모리에 저장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한한 무지에서 겸손할 것인가? 아는 지식에서 담대할 것인가?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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