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의 저자 A. von Schoenburg는 부자의 기준을 말한다. ‘가진 것보다 덜 원하면 부자, 가진 것보다 더 원하면 가난’이다. 간단 명쾌하게 정의한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후자다. 경제적으로 부요했다. 더 원하는 교회는 가난한 교회다. 요한계시록에서 ‘부자’와 ‘부요하다’라는 말은 부패하고 불경건한 세상 구조와 결탁하여 번성한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다.
‘부자’를 뜻하는 rich는 ‘추장’을 뜻하는 켈트어 rix에서 나왔다. 원시시대 추장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화려한 옷을 입었다. 부와 권력도 많았다. ‘화려하다’ ‘풍족하다’ ‘돈이 많다’로 의미가 확대됐다. rich의 명사 riches는 재물을 뜻한다. 재물은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용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재물을 가진 자를 집어삼킨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주제다. 개인, 가정, 교회 그리고 국가나 기업이 부요한 것을 마다할 사람이나 조직은 많지 않을 것이다. 부자, 부요의 ‘부’(富)는 집을 가리키는 ‘宀’(면)과 가득하다, 차다 새김의 ‘畐’(복)이 합쳐졌다. 병에 술이 가득 차듯이 집안(宀)에 재물이 많은 것이 부자(富者)라는 뜻 글자다. 그리스도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부가 인간의 마음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도록 유혹하는 자기만족적 탐욕이 재물에 도사리고 있음을 간파하고 있다(마 6:19 이하).
1. 나는 부자다
라오디게아 도시는 부요한 도시다. 부족한 것이 없었다. A.D. 60년에 큰 지진이 있었다. 로마제국의 재정지원 없이 도시를 재건했다. 재건된 후에 훨씬 더 웅장한 도시가 되었다. 세 가지 자랑거리가 있었다. 경제적인 부다. 거대한 직물 산업이다. 그리고 세계 전역으로 수출되던 유명한 안약이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도시를 닮았다. 자신들이 심각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훌륭한 영적 상태에 있다고 자랑했다. 교회의 물질적인 부가 영적인 부를 내포한다고 믿었다는 점에서 도시와 똑같았다. 물질적뿐 아니라 영적으로 부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수사학적으로 또한 본질적으로 동일한 주장이 강조를 위해 세 번 반복된다. ‘나는 부자다’ ‘부요하다’ ‘부족한 것이 없다.’ 한 마디로 ‘부자병’이다. 영어로는 affluenza다. ‘부유하다’는 affluent와 ‘독감’이라는 influenza의 합성어다. 그 병에 걸리면 삶에 대한 무력감과 스트레스, 쇼핑중독, 감정통제 불능의 상태를 보인다. 한마디로 ‘호강병’이다.
부는 하나님의 축복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부요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범이다(창 13:2). 시편 기자들은 물질적 축복을 노래한다. 복 있는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번성한다(시 1:3). ‘부요와 재물’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의 집에 있다(시 112:1, 3).
사데 교회에 전하는 메시지처럼, 라오디게아 교회에 전하는 메시지는 그 교회의 자기만족적인 태도에 대한 갑작스러운 비판으로 시작한다. 문제는 실제 자신들이 얼마나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들의 문제는 부 자체가 아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는 것이다. 돈이 영혼까지 부요하게 한다고 가정했다. 그들은 ‘나는 부자다.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독선적인 자기만족에 있었다. ‘존재의 거대한 사슬(Great Chain of Being)’이라고 하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의 계층 구도 즉 ‘스칼라 나투리(Scala Naturae)’의 맨 꼭대기에는 당연히 인간이 자리 잡고 있다. 인간 중심의 세계관이다. 일인칭 단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들은 지나친 자만 그리고 교만으로 진리에 대해 눈이 멀었다. 자기들의 영적으로 가난한지 깨닫지 못했다.
도시는 농업과 상업 중심이었다. 제국 체제와 관련된 그 도시의 유리한 위치는 세 대로가 교차한 지점에 있었다. 이 위치는 그 도시의 상업적이며 행정적인 대도시, 은행의 중심지, 자연산 검정 양모, 카페트와 옷감 제조업의 중심지라는 명성을 붙여 주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재정적으로 넉넉했다. 영적 건강함이 경제적 번영으로 나타났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의 물질적 풍요로움이 야훼와의 언약의 신실함을 측정하는 표준이었다. 아마도 구약에 호소하였을지 모른다. 물질적 부요함을 자랑하였다. ‘나는 부자다’ ‘나는 부족함이 없다’는 부정적으로 사용되고 있다. UC버클리 사회심리학연구자그룹이 2012년 미국립과학원회보(PNAS)에 ‘부자의 윤리적 행동에 관한 연구’를 발표했다. 이에 따르면 부자가 가난한 사람보다 비윤리적 행동을 할 확률이 3~4배 높다. 나이, 성별, 정치적 성향, 종교와도 무관하다. 부자들이 탈선하는 동기는 강렬한 자극이나 모험 충동, 또는 자신의 힘과 지위가 상대적 약자에게 통용되는지를 확인하고 싶은 과시욕구에서 비롯된다.
2. 나는 부자다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도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라는 말은 라오디게아의 부를 비유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하다. 어떤 사람이 재물이 많다고 할 때 사실상 그 재물이 그 사람을 소유하는 것이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마 6:21). 부자는 재물이 많은 사람이다.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재물에 해당하는 mammon은 바벨론어 mimma에서 유래했다. ‘무엇이나 전부 다’라는 의미다. 요즘 말로 하면 ‘머니 머니(뭐니 뭐니)해도 money가 최고’일 것이다. 돈이 자신의 인생의 전부가 되어 버린 사람에게 하나님의 들어갈 여지가 없다. 돈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다른 사람은 간절함이나 사모함이 없다. 기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도시는 은행 산업, 직물 산업, 그리고 의료 학교가 유명했지만 교회는 정반대였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족함이 없다고 광고하였다. 물질적으로 부족함이 없다 보니 하나님을 생각할 시간이 적어진다. 사업이 어려울 때는 기도한다. 번창하고 창대해지면 바빠 교회 갈 틈이 없어진다. 대부분의 사람은 ‘부자로 사는 법’보다 ‘부자가 되는 법’에 더 많은 호감을 갖는다. 부자가 되는 것은 어렵기도 하고 쉽기도 하다. 사람마다 다르다. 하지만 부자로 사는 것은 이야기가 다르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 교회가 되는 데는 성공했다. 부자 교회답게 사는 데는 실패했다. 라오디게아 교회 사람들이 ‘나는 부자다’ ‘나는 부유하다’ ‘나는 부족한 것이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경제적·영적 자랑이다. 이 말이 요한계시록 다른 곳에서 우상숭배하는 바벨론, 즉 로마제국과 더불어 음행하는 불신앙적인 상인들에게 적용되었다.
라오디게아인들의 자만적인 ‘부자타령’은 이스라엘 백성을 정죄한 호세아 12:8의 인용이다. 병행하고 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압제를 통해 번역을 누리고 있는 ‘상인’이라고 표현한다(호 12:7). 이스라엘 상인들은 속임수를 써서 부를 축적했다. 자신들의 부가 우상에 있다고 단언했다. 우상숭배에 가담한 사실을 폭로한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물질적 풍요로움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받은 복이 아니라 그들이 섬기는 우상이 내려준 혜택으로 고발한다. 야훼께서 그들의 실상은 ‘그들은 거짓되도다’라고 정죄하셨다(호 12:11). 참된 부유함은 돈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윗의 고백처럼 야훼께서 영혼의 목자가 되어 주실 때 ‘부족함이 없다’라고 외칠 수 있다. 인간의 자원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참된 부요한 길을 제시한다. 예수님께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라는 요청이다.
라오디게아인들은 자신들이 부유할 뿐만 아니라 그 부를 스스로 이루었다고 자부했다. 이보다 더 심각한 것이 있다. 아무 것도 필요한 것이 없다는 자기만족이다.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연구팀의 보고다. 부자들은 주위 사람들에게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한다. 남들에게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 그렇다 보니 다른 사람 감정을 배려하지 않게 된다고 한다.
돈에서 만족을 찾는 자들의 극적인 멸망은 요한계시록의 바벨론, 즉 로마의 멸망의 환상에서 보여 진다. 번영을 지향하는 태도는 금과 보석, 자줏빛과 붉은 옷으로 화려하게 치장한 엄청나게 부한 도시인 바벨론의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교회의 문제점은 돈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태도다. 그리스도인의 부유는 얼마나 소유하느냐에 있지 않다. 얼마나 많이 베푸느냐에 따라 측정된다. 성경은 가난을 예찬하지 않는다. 부를 무조건 비난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복 가운데 하나가 물질적인 번성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 그리고 욥과 다윗과 솔로몬은 시대의 부자였다. 사탄은 돈이라는 울타리가 있기에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했지만, 욥은 오히려 모든 것을 다 잃어버려도 하나님을 찬양하였고 믿음으로 인내하였다. ‘우아하게 가난해지는 법’에서 von Schoenburg는 “돈으로 해결할 수 없는 욕구를 품은 사람들만이 부자로 살 수 있다. 은행 잔고가 줄어들지라도, 다행히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일들은 우리 곁을 떠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도시는 로마제국의 도움을 받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교회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을 필요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하나님이 피로 사신 교회를 세우는데 하나님의 도움을 느끼지 못했다. 관계의 단절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 자신의 힘으로 ‘신적 존재’가 되는 욕망이었다. 탕자가 집을 떠난다.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생각이다. 손에 쥐고 있는 돈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자만이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필요하지 않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다. 두 가지 이유다. ‘할 수 없음’(can-not)과 ‘하지 않음’(will-not)이다.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 사이에 궁극적인 이율배반이 존재한다. 하나님보다 맘몬, 즉 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멀리하신다. 우상의 죄를 갖고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다. 또한 ‘돈이 나의 목자가 되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고 외치는 사람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지 않는다. 부자에게는 두 가지 장벽을 넘을 수 없다. 하나님을 가까이 할 수 없는 이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