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붙잡음’과 ‘놓아버림’의 연속이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붙잡았을 때 감사한다. 기회를 붙잡고, 사람을 붙잡고, 돈을 붙잡고, 명예를 붙잡고, 권력을 붙잡았을 때, 그것을 복이라 여긴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붙잡고 좋아했던 것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슬퍼하게 되는지 모른다.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살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는 교회였다. 계속 충성스러웠다. 굳게 잡는 것은 수동적 자포자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굳게 서는 행위다. 로마 관원들의 심문에 직면해서도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굳게 서서 포기하지 아니함’이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하였다.
아우구스투스는 종교를 중시한 황제다. 도덕 상실이야말로 공화정 로마를 타락시킨 가장 큰 이유로 보았다. 수많은 신전을 보수·신설한다. 내란으로 인해 신전의 상당수가 폐허로 변해가고 있던 시대다. 황제로 올랐던 B.C. 27년 한 해 동안 무려 82개 신전을 보수·신설한다. 버가모는 소아시아 행정에 제일 먼저 로마인을 끌어들인다. 황제 숭배의 중심지다. 사탄의 권좌라는 칭호로 설명이 된다. 원뿔형 언덕에 이교 신전과 제단으로 가득 차 있다. 구약의 하나님의 산과 대조를 이룬다. 거짓 교사들은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이유를 대면서 황제숭배와 타협하라고 주창했을 것이다.
황제숭배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배후에 놓여 있는 핵심 문제다. 버가모의 종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도미티아누스와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에 박해가 있었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황제숭배다. 그리스도인은 황제의 기념 축제에 참여하거나 거기에서 나누어 준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공동체 전체가 의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신전에 향을 피우고 ‘카이사르가 주님이시다’라고 선언하는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레인메이커(rainmaker)’는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던 인디언 주술사를 뜻한다. 미국 애리조나의 호피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올리면 100% 확률로 비가 내렸다고 한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99도까지 열심히 끓어올랐다가 마지막 1도의 고비를 넘지 못해 실패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 가장 많이 하는 변명이 “난 최선을 다했어”이다. 어떤 일에 한두 번 실패를 겪고 나면 다시 시도하기를 망설이게 하는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버가모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포기를 모르는 자들이다. 황제 숭배 축제에 참여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우상의 음식을 먹는 일은 피하였다. 심한 반발을 당해야 했다. 직인 길드에서 배척당했다. 재산 몰수, 투옥, 순교까지 경험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붙잡았다. 특히 억압적으로 이교 신앙의 와중에서 안디바는 달랐다.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증언을 확인했다.
1.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으라
예수님은 교회 사이를 운행하신다. 일곱 별을 붙잡고 계신다. 버가모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있다. ‘놓아버림’은 체념이 아니다. ‘놓아버림’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이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움켜쥐고 놓치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어차피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히브리어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대부분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그 인물의 본질적인 부분이거나 본질 자체다. 버가모와 빌라델비아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 ‘이름이 곧 운명’(Nomen est omen)이라는 말도 있다. 뭔가 이루려고 간절하게 노력할 때 한국인은 뜨겁거나 맵다는 개념을 쓴다. 일본인은 다르다. ‘열심히 한다’고 할 때 ‘간바루(頑張る)’라고 한다. 완강하게 버틴다는 의미다. 이 말엔 뜨겁게 달아올랐다는 뉘앙스가 없다. 버가모 그리스도인은 뜨겁거나 버티는 것이 아니라 굳게 붙잡았다. 자신도 세상도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을 완강하게 붙잡았다. 요한계시록에는 ‘믿다’라는 동사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명사로써의 믿음은 신실함을 의미한다. 믿음의 내용으로써 신뢰를 의미한다. 형용사로써의 ‘신실한’은 ‘믿음’이 아니고 충성되고 오래 참으며 성실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께서 버가모 교회를 괴롭히는 문제를 다루기 전에, 그 교회가 충성했던 일을 칭찬하신다. 그들은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믿음을 공공연하게 증언했다. 심각한 박해가 벌어졌을 때도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하면, 다른 지방에서도 그리스도인을 처형하기 위한 법적 선례가 정해졌다.
미국 칼럼니스트 Jennifer Wright는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를 썼다. 1918년에서 1920년까지 전 세계 인구 최대 5%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던 당시의 미국 상황을 다룬다. “역병(疫病)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그를 대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역병이 돌면 놀랄 만큼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위의 죽음과 파멸을 최소화한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겁을 먹은 이웃 나라들의 반응을 보라. 식료품 뿐 만 아니라 두루마리 화장지를 닥치는 대로 사들인다. 위기에 직면해 엄습하는 미지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안디바의 죽음은 바이러스보다 더 위기요 두려움일 수 있다. 그러나 버가모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믿음을 지켰다. 안디바와 버가모 교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순교에 처해질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Jeanne d'Arc 명언이다. “사람들은 종종 진실을 말하며 죽임을 당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이 일을 위해 태어났으므로.”
버가모에서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순교했을 때 교회는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동요하지 않았다. 높아지신 그리스도는 세 가지 사실을 아신다. 이방 세계에 산다. 믿음을 지킨다. 박해에 불구하고 인내한다. 안디바의 순교는 초유의 사태다. 불확실성 투성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너희 가운데’는 그가 버가모, 혹은 다른 도시 출신이라는 의미이다. 버가모의 지방 총독은 그 주변의 사건을 심리하였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다
버가모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또는 충성이다. ‘나에 대한 믿음’을 언급할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자는 누구인가.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버가모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귀는 얻기 쉽지만 명예와 절조는 지키기 어려우며, 말세에 높아지기는 쉽지만 험난한 길은 끝나기 어렵다.” 퇴계 이황이 문하생 정유일에게 남긴 글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풀무불은 험난 이상이다. 하나님이 건지시지 않을지라도, 즉 화형을 당할지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단 3:16-18).
버가모 산꼭대기에 Zeus 구원자 제단이 있었다. 웅대한 건물 규모이 도시를 압도했다. 조각상의 거인들의 다리는 뱀의 꼬리였다. 이 신전은 우상 숭배와 이교 사상의 축소판이었다. Zeus에 대한 숭배는 모든 도시의 중심이었다. 또한 아시아 속주에서는 황제숭배를 강조했다. 의무적으로 요구했다. 당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황제 숭배는 시민의 충성과 애국심과 연계되어 있었다. 황제 숭배 거부는 무신론자이거나 파괴분자로 낙인이 찍혔다. 황제와 로마인들에게 대한 정치적 충성을 보여주지 않는 것은 ‘인류를 싫어하는’ 자들로 비난을 받았다.
서양에서는 그런 모임을 ‘페스티벌(festival)’이라고 부른다. 페스티벌은 라틴어에서 빌려온 차용어다. 라틴어 페스타(festa)는 ‘축제, 잔치’라는 의미다. festival은 ‘신전’을 뜻하는 그리스어 fanum에서 나왔다. 원래는 종교 행사를 뜻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종교 행사는 엄숙하기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고기와 술을 나눠 먹으며 즐겁게 노는 분위기였다. festival은 점차 ‘축제’로 의미가 확장됐다.
버가모 교회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았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수사학적 대조법 형식이다. 긍정적 진술과 부정적 진술이다. 전자는 후자를 반복하고 보강된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에도 나온다.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하지 아니하였도다.”
“나는 내가 쓰고 가르치고 강론한 복음의 진리 속에서 지금 기꺼이 죽겠다.” 1415년 7월 6일 화형대에 오른 체코의 종교개혁가 얀 후스가 남긴 말이다. 증인은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자다. 요한계시록이 기록될 당시, 그 단어는 순교라는 엄밀한 의미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이 용어는 법정의 증인이라는 원래의 법적 의미를 갖고 있다. 법정에서 사실을 증거하고 그 결과로 죽임을 당하는 사람에게 적용된다. 순교자를 의미하기도 한다.
“명심하면 당신의 일 처리 및 위기관리법은 틀림없이 달라진다.” Warren Buffett의 말이다. 그는 말한 ‘명심해야 할 철칙’이 무엇인가. “명성을 쌓는 데는 20년, 무너뜨리는 데는 5분 걸린다.”라고 말하였다. 안디바는 죽음 앞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첫 번째 그리스도인 순교자였다. 요한계시록은 증언하다가 그 결과로 죽임을 당한 자들을 묘사한다. 단순히 죽은 것이 아니다. 죽음 앞에서 진리를 증언하였다. 죽기까지 증언하였다. 결국 죽임을 당한 것이다. “죽음의 권세를 이기게 해 달라,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해 달라”는 주기철 목사님의 ‘일사각오’다. 일사각오는 일제의 살인적 탄압에 몸으로 맞설 수밖에 없는 한 목회자의 신앙고백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