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며 그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다

  • 입력 2021.02.02 0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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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96) 능력(Strength)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고대 이집트인들은 경계의 공간에 ‘괴물’을 배치했다. ‘몬스터(monster)’는 괴물의 기능을 설명한다. ‘몬스터’는 ‘손가락으로 지적하다, 보여주다’라는 라틴어 동사 ‘monstare’에서 유래했다. 괴물은 도시로 들어가는 성문 앞에서 손가락으로 그 경계를 표시한다. 열린 문은 경계의 표시가 아니다. 새 예루살렘을 보여준다. 빌라델비아는 버가모처럼 ‘선교의 도시’(the missionary city)라고 불렀다. 교역에 유리했다. 블기아까지 군사 도로가 펼쳐져 있었다. 통치자들은 빌라델비아가 리디아와 브루기아에 헬라 문화를 소개하는 통로로 되길 원했다. 열린 문을 선교의 문이라 하는 것은 요한계시록 문맥에 맞지 않다. 사도행전 14:27에서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은 선포자들에게 열려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자들에게 열려 있다. 열린 문은 선교의 문이다. 생명의 문이고 전도의 문이다. 하늘의 문을 가리킨다. 하늘 궁정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여신 이 문을 누가 닫겠는가? 로마제국도 못 닫았다. 유대교도 못 닫았다. 열린 문이 상징하는 것은 종말론적 구원에 들어가는 것을 보장을 말한다. 즉 메시야의 왕국, 새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보장을 뜻한다. 하나님의 나라의 문을 가리키고 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 앞에 열린 문을 두신다. 이사야 45:1의 “내가 왕들의 허리를 풀어 그 앞에 문들을 열고 성문들이 닫히지 못하게 하리라”라고 고레스에 대한 약속을 상기시킨다. 이스라엘이 그 적들에 비교하면 약한 것 같지만 고레스 왕을 통하여 하나님의 회복의 역사에 의해 강하게 될 것이다. 그의 정복을 통해 승리를 허용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고레스가 포위한 도시들의 성문을 부수고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작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외부 세계에서 보기에 약해 보이는 교회다.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켰다. 작은 능력은 그들 앞에 있는 열린 문을 닫고 여는 데 제한이 있음을 암시한다. 자력으로 열고 닫을 수 없다. 적은 능력이라는 것이 문자적으로 볼 때, 교회 규모와 인원이 적다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박해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교회 규모와 인원의 크고 많음에 따라 순종의 여부가 결정되지 않는다. 적은 숫자와 능력이기에 더욱 겸손하고, 하나님을 신뢰하고, 말씀에 순종할 수 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들을 보라. 둘 다 칭찬받은 것은 적은 일에 충성하였기 때문이다(마 25:21, 23).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된다(눅 16:10). 달란트, 즉 능력이 적다고 불평하고 남과 비교하는 자는 한 달란트 받은 종은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마 25:26).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능력이 많고 적음에 비례하지 않는다.

1. 작은 능력을 갖고도 열린 문을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두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앞에 두신 열린 문을 우리의 적은 능력으로 어떻게 했는지 아신다. 적은 능력으로 말씀을 지킨 것은 열린 문을 그대로 열려 있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 분의 뜻이요 말씀이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자신들 앞에 두신 열린 문을 도시의 관문처럼 이용하지 않았다. 열린 문과 관문은 다르다. 중국에는 관문이 많다. 검문관(劍門關), 안문관(雁門關), 그리고 만리장성의 동서쪽 끝인 산해관(山海關)과 가욕관(嘉峪關) 등이 잘 알려진 관문이다. ‘관(關)’은 중요한 경계에 들어서는 요새(要塞)다. 보통은 전략적인 요충이나 변경(邊境) 길목에 짓는다. 사람과 물자의 출입을 통제하는 곳이다. 본래 글자꼴은 문에 건 빗장을 줄로 잔뜩 옭아맨 모습으로 등장한다. 따라서 글자의 본래 뜻은 ‘닫다’ ‘잠그다’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비록 작은 능력을 갖고도 그리스도께서 교회 앞에 두신 열린 문을 닫거나 잠그지 않았다. 교회의 출입을 통제하지 않았다. 교회 문턱을 높이지 않았다. 성과 속으로 구분하지 않았다. 빌라델비아는 ‘동쪽으로 가는 관문’이라는 명칭을 갖고 있었다. 전략적 위치에 있었다. 무시아, 리디아, 그리고 브루기아로 이어지는 무역로가 만나는 지점에 있었다. 로마에서 드로아를 통해 빌라델비아를 지나 동쪽으로 이어져 중앙 고원 지대까지 연결되는 제국의 우편 전달 도로에 있었다. 교회는 도시와 달랐다. 열린 문을 두신 그리스도께 순종할 뿐이다.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실 것을 믿었다. 그 문을 열어 두었기에 그 도시의 신앙에 대해 보상해 주신다.

‘비판적 합리주의’ 철학자 Karl R. Popper는 “우리가 문명사회의 인간으로 남길 원한다면 단 하나의 길, 열린사회의 길만 있을 뿐”이라고 했다. 교회는 열린 세상이나 열린 사회를 추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교회 앞에 두신 열린 문으로 들어가는 자다. 믿는 자들만 이용하는 문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그 문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도록 열어 둔다.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갈 수 있고 그들과 함께 다른 이들도 들어가도록 돕는 열린 문과 함께 가시적으로 복을 받고 있다. 닫는 것은 교회의 권한이 아니다. 닫을 자는 오직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뿐이다. 그분만이 뜻대로 열고 닫을 절대적 권세를 갖고 계신다. 그리스도께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다. ‘다윗의 집’에 들어가는 것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는 이미지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에서 매이고 풀리게 하는 ‘천국 열쇠’를 주신다(마 16:19; 18:17, 요 20:23). 빌라델비아 교회에 열린 문을 두신다. 믿는 자들이 지역의 유대 회당으로부터 출교를 당했을지 모른다. 그리스도는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열린 문을 두셨다. 은혜요 위로다. 사람은 자신의 손에 키를 들고 언제든지 열고 닫을 수 있으면,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으면 자유롭고 행복한 줄 생각한다. 냉장고 문만 아니다. 조직이나 사람이든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는 권력이 있으면 대단한 줄 여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열린 문을 두셨다. 적은 능력을 갖고 있는 우리가 닫지 않는 것이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여행작가이자 방송인 손미나가 에세이집 ‘어느 날, 마음이 불행하다고 말했다’에서 말한다. “누구보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살고 행복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어요.” 아담은 마귀의 꾐에 빠져,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어 마음대로 열고 닫을 수 있을 줄 알았다.

2. 작은 능력을 가지고도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는다

교회 앞에 열린 문, 즉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열린 문을 닫으실 분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뿐이다. 다윗의 도시, 새 예루살렘의 무한한 통치권을 가지신 분이다. 마지막 때에 이 도시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거나 거절할 수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칭찬 받는 교회일 뿐만 아니라 복의 통로의 역할을 감당하는 교회다. 열린 문을 통해 자신은 물론이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그 문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갈 수 있게 하였다.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인 David Brooks는 ‘두 번째 산 (The Second Mountain)’에서 인생을 두 개의 산으로 비유한다. 첫 번째 산이 자아를 세우고 무언가를 획득하는 세계다. 두 번째 산은 자기를 내려놓고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헌신의 과정이다. 사람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평등한 삶이다. 그는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 길을 “우리 자신의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서 나 아닌 타인을 돌볼 수 있는 무한한 능력을 찾아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헌신하는 쪽으로 자기 존재를 확장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교회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압력에 의해 ‘예배당 문’도 닫히고, ‘기도의 문’이 닫힐 수 있다.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 ‘선교의 문’까지 닫힐 수 있다. 닫히지 않는 문, 닫을 수 없는 문이 있다. ‘천국의 문’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는 문이다. 이사야 26:2에서 ‘너희는 문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라는 요구한 화자는 절기 순례자들이다. 그 요구는 시편 118:19의 “내게 의의 문들을 열지어다 내가 그리로 들어가서 여호와께 감사하리로다”와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리로다”과 부합한다. ‘의로운’ 그리고 ‘신을 지키는’ 이란 말이 가리키는 대상은 자신의 서원을 지키는 순례자들이다. 한글성경은 ‘나라’다. ‘문들아 머리 들으라’ 찬양은 ‘문들아 머리 들어라 들릴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영광의 왕이 들어가시도록 영광의 왕이 들어가신다’라고 시작한다.

서머나에서처럼 빌라델비아 교회는 유대인들의 회당의 적대적 경험하고 있었다. 그러나 적은 능력으로 예수님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빌라델비아 교회 성도들은 당시 핍박 속에서도 비굴하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주님의 이름을 배반한 성도들이 아니었다. 적은 능력을 갖고도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주의 이름을 배반하지 않았다.

고고학자들은 이 지역에서 B.C. 1세기경 ‘밀의교’(密儀敎)의 규정이 기록된 대리석이 출토했다. 빌라델비아에 이교(異敎)가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런 이교 풍토 속에서 적은 능력으로 주님의 이름을 배반치 않았다. 복음 사역을 방해하는 유대인들의 간계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래전 유럽에서 페스트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이 목숨을 잃었다. 페스트를 물리친 뒤 이탈리아 피렌체 장인 조합은 이를 기념하여 청동으로 된 문을 만들기로 한다. 다시는 이런 참혹한 병에 사람들이 희생당하지 않도록 간절히 기원하면서 세워진 문이 바로 ‘천국의 문’이다. 빌라델비아에서 교회는 회당으로부터 축출당한 기념으로 열린 문을 두신 것이 아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말씀하신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노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나라의 ‘문’을 여시면 ‘능히 닫을 사람’이 없다.’ 적은 능력으로 이 문을 새 예루살렘을 향해 열어 두는 것이다. 이것이 적은 능력으로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이다. 우리는 주어진 ‘천국의 열쇠’로 우리 앞에 있는 열린 문을 닫히지 않도록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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