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바이러스는 팬데믹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인류 대부분이 자가 격리에 들어가는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세상이다. 사랑하고 걱정하기에 역설적으로 사랑하는 사람들과 사회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코로나19 감염병이 길어질수록 사람과 거리는 멀어질 수밖에 없다. 측정하기 어려운 위험을 피하려는 자기방어 본능이 발현된다. 외출과 쇼핑, 약속도 줄인다. 경제도 사회도 모두 위축된다. 타인과의 정상적인 거리를 회복해야 한다. 사회가 다시 굴러가게끔 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거꾸로다. 코로나19 예방책은 손씻기, 마스크 쓰기, 그리고 사회적 거리두기(social distance)다. 바이러스가 창궐할수록 사회적 거리를 넘어 국경을 봉쇄하고 일정기간 거소에 머물도록 조치했다. 사회적 거리 두기가 장기화되면서 마음의 우울감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 사회적 우울 현상을 뜻하는 ‘코로나 블루’라는 신조어까지 생겼다. ‘개인적 거리’는 미국의 문화인류학자인 Edward T. Hall이 저서 ‘숨겨진 차원’에서 소개한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사람의 공간(room for the person)은 인간관계에 따라 4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친밀한 거리(0~0.5m), 개인적 거리(0.5~1.2m), 사회적 거리(1.2~3.5m), 공적 거리(3.5m 이상)다. ‘사회적 거리’는 업무나 모임 등 사적이지 않은 사람과 유지하는 거리다. 그 이상은 의식이나 행사 때 보여지는 ‘공적인 거리’로 분류된다.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보호하는 행위가 가능한 친밀한 거리를 어렵게 한다.
1.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보다 낫다
헨리 나우웬의 ‘예수의 이름’이라는 책에 나오는 애기다. “하나님을 사랑하기 보다는 하나님 되는 것이 더 쉽다. 사람들을 사랑하기 보다는 사람들을 다스리는 것이 더 쉽다. 교회의 역사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역사는 사랑 대신 힘을, 십자가 대신 지배를, 인도받기 보다는 인도하려는 유혹을 받아 온 사람들의 역사다.” 에베소교회는 처음 사랑이 확실한 교회였다. 된 교회다. 두아디아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에 사랑이 열매 맺는 교회다. 되어가는 교회다.
두아디라 교회는 처음보다 나중이 더 풍성한 교회이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가 그랬다. 네 개의 용어들은 모두 그리스인들이 하는 행동의 여러 가지 면들을 강조한다. 사랑은 고전 헬라어에서 가장 진귀한 단어 중 하나이다. 가장 고상한 형태의 사랑을 표현한다. 대상에게서 무엇인가 무한히 고귀한 것을 보고 있다. 구약에서 사랑에 해당하는 ‘אהב’(아하브)는 자발적 감정이다. 자기 증여다. 대상을 붙잡는 것이나 유쾌한 활동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사랑은 속사람 즉 정신에 영향을 미친다. 동사가 명사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난다. 구약에서 아헤브는 사람을 제어한다. 사물이나 사람에게 이끌어가는 자발적인 힘이다. 아가페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다른 사람에 대한 동정어린 행동을 포함한다. 그리스도가 행한 것처럼,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놓은 것을 의미한다. ‘악마의 사전’를 쓴 Ambrose G. Bierce는 행복을 삐딱하게 정의한다. 타인의 고통을 깊이 오래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기분 좋은 느낌(An agreeable sensation arising from contemplating the misery of another)
나쁜 사람과 못 된 사람은 다르다. 못 되었다는 말은 아직 되지 못한 것이라는 뜻이다. 아직도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으로 태어났기에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어 가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 나이가 들수록 철이 들어가야 한다. 철이 든다는 것은 사람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다. 그리스도인은 처음보다 나중이 좋은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자다.
두아디라 교회는 되어가는 교회, 성장하는 교회, 성숙한 교회다. 탈무드에 나오는 이야기다. 어떤 현자가 하나님께 질문을 한다. “하나님! 자연을, 우주를 만드실 때마다 좋았더라 하셨는데 만물의 영장인 사람을 만드신 후에는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없습니까?” 그 물음에 하나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사람은 완성품이 아니고 미완성의 존재로서 이제부터 자기 스스로 온전하게 만들어 가야 하기 때문에 보기에 좋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단다.”
‘네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많다’는 문자적으로 번역하면 ‘너의 최근 행동이 이전보다 더 낫다’이다. 사업은 두아디라의 그리스도인들의 행위를 나타내는 총괄적인 용어로 사용된다. 두아디라는 소아시아 다른 도시들과 다르다. 이 도시 자체에는 아크로폴리스가 없다. 거의 평지에 세워져 있다. 오르막으로 된 언덕들과 경계를 접하고 있었다. 두아디라는 정치적·문화적으로 소외된 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은 이 도시가 열악하고, 종속되고 의존적인 인상을 주었다. 주도권을 갖거나 주의 수도로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항시 전쟁 가능성에 직면해 있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잃어 버렸다. 계주 선수가 바통을 잃어버린 채 달리는 것과 같다. 두아디라 교회는 도시와 같이 별 주목을 받지 못했고 미미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실천적인 사랑, 사랑의 행위가 처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했다. 나중 행위가 처음보다 나은 교회였다. 성장이 있고 발전이 있는 교회다. 갈수록 사랑이 풍성해 지는 교회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노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다. 인간의 불순종으로 인해 바뀔 수 없다. 구약의 접근 중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가장 핵심에 가까운 접근이다.
2. 처음보다 더 많이 서로 사랑하라
가장 짧은 편지는 서머나에 보내진 것이다. 이 도시는 가장 유명한 도시였다. 가장 긴 편지는 두아디라에 보내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작은 도시로 알려져 있다. Hemer는 ‘가장 알려지지 않고, 가장 중요하지 않고, 가장 돋보이지 않는 도시를 향해 쓰였다’고 기록한다. 인비저블한 도시에 있는 두아디라 교회는 달랐다. 처음에는 돋보이지 않았다. 나중 행위는 놀라울 정도다. 행위들이 칭찬을 받는다. 사랑과 믿음과 섬김과 인내다.
초반에 반짝 재주를 자랑하다 결국은 용두사미(龍頭蛇尾)가 되는 사람이 있다. 처음에는 별로 눈에 띄지 않지만 나중에 가서 괄목상대(刮目相對)하는 기량을 떨치는 사람도 있다. 처음 사랑에 있어서 에베소 교회는 전자다. 후자는 두아디라 교회다. 처음 행위는 미미하고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교회의 행위가 처음보다 많은 교회, 발전하고 성장하는 교회다. 진국이다. 첫 인상보다 잔상이 오래가는 교회다.
고대의 자료 속에 두아디라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현재 터키의 Akhisar라는 도시가 그곳에 세워져 있다. 고고학적 발굴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다. 두아디라의 강점과 약점은 에베소와 정반대다. 행위로 입증되는 사랑에 있어서는 강했다. 하지만 분별력이 부족하고 이단을 용납한다. “성숙이란 자신이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기꺼이 이끌려 갈 수 있는 능력이다.” 헨리 나우웬의 ‘예수의 이름으로’에 나오는 구절이다. 삶은 리얼하다. 동화책같이 권선징악이 뚜렷하지도 않다.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는 경우도 많다. 때론 하나님이 엉뚱한 곳으로 이끌어 가실 때도 있다. 그래도 하나님께 떨어지지 않고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이웃을 더 사랑하는 것이 성숙이다.
두아디라 교회의 행위가 처음보다 나중이 더 많다는 것은 교회가 사랑, 믿음, 섬김, 인내에 있서 성장하는 교회라는 뜻이다. 사랑의 수고가 더 해지는 교회다. 믿음의 역사가 날로 많아지는 교회다. 섬김이 갈수록 더 풍성해지는 교회다. 인내가 더 쌓여가는 교회다. 누군가 말했다. 삶은 현재를 사는 것이 아니라 마지막을 준비하는 것이다. 사는 연습이 아니라 아름답게 죽는 연습을 하는 것이 삶이라는 말이다. 마지막 그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사는 동안 준비되고 축적된 결과물이다.
아브라함은 나중 행위가 처음 보다 더 좋은 인물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 위해 삼일 길을 걸어 모리아 산에 도착했다. 백세에 얻은 아들을 사랑하는 아비다. 이런 아들을 주신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부모다. 하나님을 처음보다 더 사랑하는 행동을 창세기 22:4에 묘사한다.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만약 원망하고 미워하였다면 땅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땅이 꺼져라 한숨 짓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려는 이 계시적인 행동을 통해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았다.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 죽음을 넘어 3일 후 부활하실 영원까지 바라본 것이다. ‘반사실 역사학’, 즉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주시지 않았더라면 이런 고통은 없었을텐데하고 생각하지 않았다. ‘만약에 과거에 이러저러했더라면 현재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왓이프(what-if)’가 없었다. 오히려 믿음으로 그곳에서 펼쳐질 하나님의 사랑의 파노라마를 보았다. 하나님은 구원을 계획하셨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성취하였다. 성령께서 적용하고 계신다. 아브라함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고 성취하신 시간을 보았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시간을 구속하신 영원한 시간 말이다. 그 시간을 묵상하며 오늘을 신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게 그리스도인의 시간 전망이 돼야 한다.
원래 작은 그릇은 조금만 물을 부어도 금방 넘친다. 큰 그릇은 오랫동안 물을 부어야 비로소 넘친다. 큰 성취를 이루려면 끈기를 지니고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나중은 하나님 앞에서다. 조존과 성찰로 자신을 갈무리해야 한다. 나중이 아름다워야 한다. 아름다운 마지막은 지금 준비하고 있지 않으면 결코 고결하게 채색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이다.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다. 신명기는 그 둘을 연결시킨다.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성숙이다. 교회는 부흥 성장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는 것이다. 확장이다. 사랑이 익어가고 믿음이 자라고 섬김이 커지고 인내가 많아지는 교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