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잡아서 죽임을 당할 때도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다

  • 입력 2020.12.29 10:14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91) 붙잡음(grasp)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는 로마 아시아에서 가장 큰 세 도시다. 황제 숭배는 버가모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었다. 의무적으로 요구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큰 문제였다. 이 모든 점들은 버가모 교회를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이라고 불리기에 충분하게 만들었다.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에서 살아있는 황제를 신으로 여겨 그에게 공적으로 경의를 표하라는 압박을 가중시켰다. 이를 거절하는 것은 국가를 반역하는 것을 의미했다.

아우구스투스는 종교를 중시한 황제다. 도덕 상실이야말로 공화정 로마를 타락시킨 가장 큰 이유라 보았다. 수많은 신전을 보수·신설한다. 내란으로 인해 신전의 상당수가 폐허로 변해가고 있던 시대였다. 황제로 올랐던 B.C. 27년 한 해 동안 무려 82개 신전을 보수·신설한다. 버가모는 소아시아 행정에 제일 먼저 로마인을 끌어들였다. 황제 숭배의 중심지였다. 원뿔형 언덕에 이교 신전과 제단으로 가득 차 있다. 구약의 하나님의 산과 대조를 이룬다. 거짓 교사들은 인간적으로 매력적인 이유를 대면서 황제숭배와 타협하라고 주창했을 것이다.

황제숭배는 요한계시록 전체의 배후에 놓여 있는 핵심 문제다. 버가모의 종교의 핵심이기도 하다. 도미티아누스와 트라야누스 황제 치세에 박해가 있었다.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황제숭배였다. 버가모는 단지 신전이나 지역적 특성이 아닌 로마 제국의 박해다. 그리스도인은 황제의 기념 축제에 참여하거나 거기에서 나누어 준 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집단 전체가 의심을 받았다. 그리스도인들은 황제의 신전에 향을 피우고 ‘카이사르가 주님이시다’라고 선언하는 압력에 굴복하여 그들의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버가모 산꼭대기에 Zeus 구원자 제단이 있었다. 웅대한 건물 규모로 도시를 압도했다. 조각상의 거인들의 다리는 뱀의 꼬리였다. 이 신전은 우상 숭배와 이교 사상의 축소판이었다. Zeus에 대한 숭배는 모든 도시의 중심이었다. 또한 아시아 속주에서는 황제숭배를 강조했다. 황제 숭배는 시민의 충성과 애국심과 연계되어 있었다. 황제 숭배 거부는 무신론자이거나 파괴분자로 낙인이 찍혔다. 황제와 로마인들에게 대한 정치적 충성을 보여 주지 않는 것은 ‘인류를 싫어하는’ 자들로 비난을 받았다.

서양서는 그런 모임을 ‘페스티벌(festival)’이라고 부른다. 페스티벌은 라틴어에서 빌려온 차용어다. 라틴어 페스타(festa)는 ‘축제, 잔치’라는 의미다. festival은 ‘신전’을 뜻하는 그리스어 fanum에서 나왔다. 원래는 종교 행사를 뜻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 시대의 종교 행사는 엄숙하기보다 온 동네 사람들이 모여 고기와 술을 나눠 먹으며 즐겁게 노는 분위기였다. festival은 점차 ‘축제’로 의미가 확장됐다.

1.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으라

기우제를 지내는 인디언 주술사를 ‘레인메이커(rainmaker)’라 한다. 미국 애리조나의 호피 인디언들은 기우제를 올리면 100% 확률로 비가 내렸다고 한다. 비가 올 때까지 기우제를 계속했기 때문이다. 물은 100도에서 끓는다. 99도까지 열심히 끓어올랐다가 마지막 1도의 고비를 넘지 못해 실패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때 가장 많이 하는 변명이 “난 최선을 다했어”이다. 어떤 일에 한두 번 실패를 겪고 나면 다시 시도하기를 망설이게 하는 이유는 셀 수도 없이 많다.

버가모에 사는 그리스도인은 포기를 모르는 자들이다. 황제 숭배 축제에 참여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우상의 음식을 먹는 일은 피하였다. 심한 반발을 당해야 했다. 직인 길드에서 배척당했다. 재산 몰수, 투옥, 순교까지 경험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끝까지 붙잡았다. 특히 억압적으로 이교 신앙의 와중에서 안디바는 달랐다. 자신의 죽음으로 자신의 증언을 확인했다. ‘주역’은 사람이나 현상이 곤궁한 지경에 들었을 때 어떻게 처신할지 말한다. ‘곤궁하면 변화를 불러야 한다. 오래 이어갈 수 있다.’ ‘궁즉변, 변즉통, 통즉구(窮則變, 變則通, 通則久)’다. 모종의 상황에서 더 적극적인 변화를 꾀하는 변통(變通)의 사고방식이 나온 토대다.

인생은 ‘붙잡음’과 ‘놓아버림’의 연속이다. 우리는 소중한 것을 붙잡았을 때 감사한다. 기회를 붙잡고, 사람을 붙잡고, 돈을 붙잡고, 명예를 붙잡고, 권력을 붙잡았을 때, 그것을 행운으로 여긴다. 그런데 우리는 그토록 붙잡고 좋아했던 것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슬퍼하게 되는지 모른다. 버가모 교회는 사탄의 권좌가 있는 곳에 살면서도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붙잡는 교회였다. ‘굳게 잡다’는 ‘강하게 붙들다’, ‘굳게 서다’라는 뜻이다. 계속 충성스러웠다. 굳게 잡는 것은 수동적 자포자기가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굳게 서는 행위다. 로마 관원들의 심문에 직면해서도 용기를 가지는 것이다. ‘굳게 서서 포기하지 아니함’이라는 의미의 동사에서 유래하였다.

예수님은 교회 사이를 운행하신다. 일곱별을 붙잡고 계신다. 버가모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있다. ‘놓아버림’은 체념이 아니다. ‘놓아버림’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고 싶은 갈망이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에 모든 것을 놓아야 한다. 죽음의 순간까지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이다. 어차피 붙잡을 수 없는 것을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히브리어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대부분 단순한 호칭이 아니다. 그 인물의 본질적인 부분이거나 본질 자체다. 버가모와 빌라델비아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있었기 때문에 칭찬을 받았다. ‘이름이 곧 운명’(Nomen est omen)이라는 말도 있다. 뭔가 이루려고 간절하게 노력할 때 한국인은 뜨겁거나 맵다는 개념을 쓴다. 버가모 그리스도인은 뜨겁거나 버티는 것이 아니라 굳게 붙잡았다. 자신도 세상도 아닌 그리스도의 이름을 완강하게 붙잡았다. 요한계시록에는 ‘믿다’라는 동사는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명사로써의 믿음은 신실함을 의미한다. 믿음의 내용으로써 신뢰를 의미한다. 형용사로써의 ‘신실한’은 ‘믿음’이 아니고 충성되고 오래 참으며 성실함을 의미한다.

2.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다

아이들은 칭찬을 먹고 자란다. 칭찬을 많이 받은 아이들이 회복 탄력성도 높다. 넘어진 게 실패가 아니다. 다시 일어나지 않는 게 실패다. 다시 일어나면 그건 시련이다. 포기하지 말라. 포기는 배추 셀 때만 쓰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버가모 교회를 괴롭히는 문제를 다루기 전에, 그 교회가 충성했던 일을 칭찬하신다. 그들은 서머나의 그리스도인들처럼 믿음을 공공연하게 증언했다. 심각한 박해가 벌어졌을 때도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일단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를 당하면, 다른 지방에서도 그리스도인을 처형하기 위한 법적 선례가 정해졌다. 버가모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을 굳게 잡고 있다. ‘굳게 잡아서’는 현재 시제다.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는 부정과거다. 과거에 일어난 박해가 다가올 절박한 박해의 본보기로 사용되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에 대해 ‘pandemic’을 선언하였다. 염병 위험 최고 단계다. 1968년 홍콩 독감, 2009년 신종플루에 이어 세 번째다. 중국·한국에 이어 유럽과 미국이 패닉 상태다. panic이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온다. 숲의 정령 pan에서 유래한 말이다. 숲의 정령에게 미혹된 사람들은 이성을 잃고 춤을 추고 술에 취하고 사랑에 빠져 숲을 헤맨다. ‘이성을 잃다’ ‘당황해서 허둥대다’ ‘당황하다’는 뜻으로 발전했다.

버가모에서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순교했을 때 교회는 패닉 상태에 빠지지 않았다. 동요하지 않았다. 높아지신 그리스도는 세 가지 사실을 아신다. 이방 세계에 산다. 믿음을 지킨다. 박해에 불구하고 인내한다. 안디바의 순교는 초유의 사태다. 불확실성투성이다. 그러나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았다. 흔들리지 않았다.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미국 칼럼니스트 제니퍼 라이트는 ‘세계사를 바꾼 전염병 13가지’를 썼다. 1918년에서 1920년까지 전 세계 인구 최대 5%의 목숨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던 당시의 미국 상황을 다룬다. “역병(疫病)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울 것은 그를 대하는 태도”라고 말한다. “역병이 돌면 놀랄 만큼 올바르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주위의 죽음과 파멸을 최소화한다.” 코로나19 감염 확산에 겁을 먹은 이웃 나라들의 반응을 보라. 식료품 뿐만 아니라 두루마리 화장지를 닥치는 대로 사들인다. 위기에 직면해 엄습하는 미지의 상황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안디바의 죽음은 바이러스보다 더 위기요 두려움일 수 있다. 그러나 버가모 교인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굳게 붙잡고 믿음을 지켰다. 의료시설과 인력이 턱없이 부족한 유럽 내 한국인들이 귀국을 서두르는 이유가 있다. ‘병에 걸릴 것 같다’가 아니다. ‘걸리면 치료 못 받는다’에 있다. 안디바와 버가모 교인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순교에 처해질 것을 무서워하지 않았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잔 다르크의 명언이다. “사람들은 종종 진실을 말하며 죽임을 당하지만 나는 두렵지 않다. 나는 이 일을 위해 태어났으므로.”

버가모 교회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 또는 충성이다. ‘나에 대한 믿음’을 언급할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는 자는 누구인가. 사회적이며 경제적인 이유였을 것이다. 그러나 버가모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환경과 조건에서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믿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예수님을 믿는 것을 감추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부귀는 얻기 쉽지만 명예와 절조는 지키기 어려우며, 말세에 높아지기는 쉽지만 험난한 길은 끝나기 어렵다.” 퇴계 이황이 문하생 정유일에게 남긴 글이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에게 풀무불은 험난 이상이다. 하나님이 건지시지 않을지라도, 즉 화형을 당할지라도 믿음을 저버리지 않겠다고 선언했다(단 3:16-18).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