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인내의 말씀을 지켰은즉 내가 너를 지켜 시험의 때를 면하게 하리라

  • 입력 2021.02.16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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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 목사의 CDN 성경연구】 (98) 인내(Patience)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NC. Cumberland University(Ph.D.), LA. Fuller Theological Seminary(D.Min.Cand.) , 총신대학교 일반대학원(Th.M.), 고려신학대학원(M.Div.), 고신대학교 신학과(B.A.), 고신대학교 외래교수(2004-2011년), 현)한국실천신학원 교수(4년제 대학기관), 현)총회신학교 서울캠퍼스 교수, 현)서울성서대학 교수 현)대광교회 담임목사(서울서부노회, 금천구

에릭 프롬은 삶의 양식에서 그 문제의 원인을 탐문한 사회심리학자다. 언어생활의 변화를 주목한 대목에 새삼 눈길이 간다. 근대 이후 명사의 사용이 대폭 늘어나고 동사의 사용이 줄어들었다는 부분이다. 그는 ‘갖는다’는 동사의 목적어가 되는 명사들을 주목한다. 그 목적어에 이끌리면 주체의 ‘존재 상태’가 잠식될 수 있음을 경계한다. 코로나19 시대에 마스크는 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실내외에서 착용하라’는 행정명령이다. 쓰지 않으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수 없다. 벗으면 승객과 시비가 붙는다. 불편하고 답답해도 명사가 아닌 동사로 살아야 한다. 운전기사를 보라. 호주머니에 넣어두지 않는다. 묵묵히 착용한다. 종착역을 바라보며 끝까지 참는다. 인내는 명사다. 인내하라는 동사다. 사회 전체가 같이 지켜야 할 가치를 따른다. 덥고 답답해도 혹여 남에게 바이러스를 옮길까 두려워 성실하게 마스크를 쓰는 행위는 바로 사회적 가치를 인식하고 존중하는 데서 나온다. 교회는 사회적 가치뿐만 아니라 교회적 가치가 있다. 중대본의 행정명령이 아닌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주신 명령이다. 인내하라는 말씀이다. 마스크와 마스크 착용하라는 다르다. 인내와 인내하라는 뉘앙스가 다르다. 성경의 인내는 저항이나 압제에 직면하여 하나님이 훈련시키거나 하나님이 부여하는 자제력이다.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의 종말론 강화를 환난에 연결시킨다. ‘인내하다’를 동사형으로 설명한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 24:13; 마 13:13). 누가는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동사형 대신 명사형을 사용한다. ‘말씀을 듣고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두 경우 다 인내를 전제 조건으로 하고 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게 ‘나의 인내의 말씀’을 하신다. 두 가지 방식으로 받아들여진다. ‘나의’는 ‘인내’만을 수식하는가. 즉 그리스도 자신의 인내의 관한 메시지인가. 아니면 전체 명사구를 수식하는가. 즉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신 인내하라는 예수님의 요청인가. 먼저, ‘나의 인내의 말씀’은 명사형이다. 목적의 소유격(인내의)에 이어 소유의 소유격(나의)이 따라온다. ‘내 말’, ‘그리스도의 말씀’을 상기시킨다(계 1:8). 성부 하나님께 충성하고 참되게 인내하며 증언하신 예수님을 본받아 인내하며 증언한 빌라델비아 교회의 특성을 강조한다. ‘인내에 관한 내 말’로 번역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역, 수난, 죽음을 통한 인내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증거한다. 그리스도의 인내의 말씀을 지킨다. 다음은, ‘나의 인내의 말씀’은 동사형이다. 그리스도께서 빌라델비아 교회에 주신 ‘인내하라’는 명령이다. ‘오래 참는 인내에 대한 나의 말’이다. NIV는 ‘끈기 있게 인내하라는 나의 명령’으로 번역한다. 대명사 ‘나의’는 거의 확실하게 ‘말씀’과 ‘인내’ 모두를 수식한다. 인내하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1. 인내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다

톨레랑스(tolerance)는 주로 ‘관용’이라 번역된다. 어원인 라틴어 tolerantia는 인내라는 뜻을 가진다. 톨레랑스는 참는 것이다. 시작은 종교적 인내였다. 인내는 삼 세 번 참는 게 아니다. 누구 때문에 참는 것도 아니다. 체면을 봐서 참는 것도 아니다. 노예와 같은 체념적 자세가 아니다. 방향이 있고 목표가 있다. 하나님을 향하여 뻗어 나간다.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다(사 40:13). 칠십인역에서는 ‘기다리다’ 또는 ‘끈기있게 기다리다’의 역어로서 사용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를 여행할 때 인내하지 못하였다. 불평과 조바심이 그들의 모습을 특징지었다. 무엇이 그들로 인내하지 못하게 하였는가.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기 보다 황량한 광야를 바라본 것이다. 기대할 것이 없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고’하고 불평하고 조급할 뿐이다(출 14:11). 인내와 정반대의 모습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는다. 광야가 아닌 가나안을 바라본다. 광야 40년 동안 끝까지 인내한다. 끈기와 자제력의 결과가 아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감당하게 하신 것이다. 인내(忍耐)의 ‘忍’은 심장(心)에 칼날(刃)이 박힌 모습을 본뜬 글자다. 칼날로 심장을 후비는 고통을 참아내는 것이 바로 인내다.

인내의 말씀은 다르다. 사방에 참을 인(忍)를 써놓고 입술을 깨물고 허벅지를 꼬집어 가며 참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다리는 것이다. 심장이 아닌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다. 기대와 소망을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둔다. 빌라델비아 교회는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두신 열린 문을 바라보았다. 새 예루살렘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더 나은 성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걸어갔다. 교회는 열린 문을 바라보고 참고 견딘다. 아브라함은 25년을 참고 기다렸다. 그로 하여금 그렇게 참고 기다리게 한 동력이 무엇인가.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롬 4:20).

빌라델비아 유적지
빌라델비아 유적지

빌라델비아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주신 인내의 말씀을 지키는 교회였다. 두 번 나온다. 각각의 사용이 다른 의미를 갖고 있는 동음 익살(paronomasia)의 예다. 전자는 ‘순종하다’, 후자는 ‘계속하다, 유지하다’를 의미한다. 황지우의 시 ‘겨울 산’은 ‘너도 견디고 있구나’로 시작하여 ‘빨리 집으로 가야겠다’로 끝맺는다. 시인은 인생을 지구에서 세 들어 살고 있다고 노래한다. 고통을 월세로 비유한다. 시에서 ‘어차피’가 알려주듯 운명적이다. 그리스도인은 나그네 인생을 살지만 세들어 살지 않는다. 이 땅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다스리고 정복할 사명을 감당할 필드다.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할 때 새 예루살렘을 기업으로 상속한다.

2. 그리스도인은 인내하라는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자다

‘SNS’ 시인으로 알려진 김동혁의 ‘신호등’이라는 짧은 시가 있다. “우리가/ 신호등을 기다릴 수 있는 이유는/ 곧 바뀔 거란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곧 바뀔거야/ 좋게.” 시에서 기다리는 것과 참는 것이 동의어다. 인내의 목표가 분명하다. 그리스도인은 고난 뒤에 있는 목표를 바라본다. 인내함으로써 고된 시련을 극복하고 열매를 얻는다. 영광을 성취한다. 인내는 참는 것과 기다리는 것을 포함한다. 상급을 얻게 된다.

빌라델비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 회당에서 쫓겨났다. 퇴로가 차단되었다. 문이 닫혔다고 그 밑에서 마냥 참고 기다리는 것이 아니다.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열린 문’을 두셨다. 이제 그들은 열린 문을 향해 걸어가야 한다. 목적지를 바라보고 인내하며 걸어가야 한다.

다니엘은 마지막 장에서 ‘기다려서 1335일까지 이르는 그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선언한다. ‘너는 가서 마지막을 기다리라, 끝날에는 네 몫을 누릴 것이라’고 약속한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다(It ain’t over till it’s over)’ 미국의 유명한 야구선수 Yogi Berra가 남긴 명언이다. ‘결과는 아무도 모르니 끝까지 최선을 다하자’는 뜻이다. 야구 시합은 결과를 모른다. 환경이 척박하고 처한 상황이 어려워도 더 열심히 일하고 행동하는 적극적인 삶을 가리켜 ‘휘포모네’, 즉 인내라고 한다. 휘포모네는 결과를 안다. 상 주심을 믿는다(히 12:5). 믿음은 기다리고 바라는 것이다. 인내하라는 말씀은 어쩔 수 없어서 참는 것이 아니다. 휘포모네는 확신이나 긴장된 기대를 가리킨다.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구약에서 의인의 징표이다. 고초나 박해를 당할 때, 그들은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구원을 기다렸다.

맹자는 말했다. “하늘이 장차 큰일을 맡기려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먼저 그 마음과 뜻을 괴롭히고, 뼈마디가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게 하며, 그가 지금까지 하지 못하던 일을 더욱 잘할 수 있게 해주기 위함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必先苦其心志 勞其筋骨, 曾益其所不能)” 욥은 하나님이 평가하는 ‘온전하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온전’은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평가할 때, 위대하다고 느낄 때 사용하는 단어다. ‘정직’은 남들이 보기에 도덕적으로 탁월한 사람을 지칭한다. 자신이 스스로 생각해도 온전하고, 남들에게도 떳떳한 사람이 말할 수 없는 의인이 고통을 당한다. 욥은 명확한 대상을 목표로 하였다. 그의 인내는 확고부동, 끝까지 버팀, 고난을 참음이다. 소망과 열망은 그 방향이 언약의 성취로 향한다(시 36:10; 34편). 인내는 하나님을 바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을 기다리고 끝까지 참는 것이다. 인내는 단순한 인내와 다르다. 비록 반드시 성공적인 저항은 아닐찌라도 온 힘을 다하는 적극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St. Alban은 3세기의 혹독한 박해 가운데 순교한, 최초의 영국 순교자다. 그는 “모진 매를 맞았지만, 주님을 위하여 동일한 인내로, 아니 즐거움으로 그 고통을 견디다가” 참수를 당했다.

문제는 인내하라는 말씀을 지키기가 말처럼 쉽지 않다. 부처의 수행기를 적은 入菩薩行論(입보살행론)은 “성냄과 불만보다 더한 죄가 없고, 인내만큼 실천하기 어려운 것이 없다”고 전할 정도다. ‘지켰은즉’에 해당하는 ‘에테레사스’는 부정과거 상황 불변사다. 인내의 삶 전체를 가리킨다. 셈어의 완료를 반영한다. 현재적 의미를 갖고 있다. ‘옛날이 더 좋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과거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부정적 기억을 지우고 긍정적 기억만 남기는 것이 인간의 속성이다. 과거에 매여 있는 자는 현재가 불행하고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 지키다는 하나님의 계명을 따른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는 것은 그의 구원의 약속에 따라 인내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명령이다. 그와 같은 명령은 예수님의 말씀 전승에서 온 것이다.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은 디모데에게 “참으면 또한 함께 왕 노릇 할 것”이라고 권면한다(딤후 2:12). 야고보는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진술한다(약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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