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박사와 함께 가는 누가복음 산책 (14)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구성

이번 일화는 제자직 단락(5:1-6:16) 중앙에 위치하여 그 중요성을 드러냅니다.

A.세리인 레위가 모든 것을 버리고 쫓는 것(27-28) B.두 번의 바리새인과의 논쟁(29-32,33-35) 그리고 C. 비유(36-39)로 구성되었습니다. 제자직 단락 중앙의 위치와 어울리게 제자가 되려는 자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세리 레위를 통해서 보여줍니다. 제자의 모델로서 세리의 모습은 예수에게 전투적인 질문을 하는 바리새인 모습과 대조적입니다. 세리와 바리새인은 종교적 평가에 있어서 대조적입니다. 이들에 대해 누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1. 따르다(27-28)

‘그 후’라는 표현은 이 일화가 앞의 일화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께서 세관에 앉은 세리 레위를 보고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릅니다. ‘따르다’는 단어는 제자 직 단락에서 세 번 나오며, 두 번 여기에 나옵니다. 세리는 시몬처럼 예수의 말씀을 듣고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릅니다.

2. 배경(29)

세리 레위는 자기 집에서 잔치를 엽니다. 이 잔치는 레위가 예수를 쫓은 것과 연관이 있으며 바리새인의 논쟁의 배경이 됩니다. 많은 세리와 사람들이 그 자리에 참석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바리새인과 서기관은 두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데, 모두 먹는 문제입니다. ‘누구와 먹느냐?’와 ‘먹느냐?’입니다. 이런 배경에서 문제를 제기한다는 것은 분명한 언급은 없지만 이들 역시 이 잔치 자리에 있다는 것이 됩니다.

3. 첫 번째 문제제기 “어찌하여 함께 먹느냐?”(30-32)

이런 상황에 대해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합니다. “어째서 너희들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30절)” 누가복음에는 ‘세리와 죄인’이 함께 나오는 구절이 두 번 더 있습니다(7;34;15:1). 하나의 관사로 이 둘을 연결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다른 두 곳에는 각각 관사를 사용하여 두 그룹을 구분해 말합니다. ‘죄인들’은 누구입니까? 적절한 근거가 없으면, 28절의 잔치에 세리들과 함께 참석한 자들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마태(5:10)와 마가(2:15)는 예수와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식사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하지만 누가에는 예수와 제자들이 함께 식사하는 모습은 나오지 않습니다.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문제 제기합니다. 이들의 문제 제기를 보면,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어서는 안 된다는 전제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리와 죄인’이 함께 등장하는 누가복음의 다른 구절인 15장1-2절을 보면, 말씀을 듣고자 나오는 ‘세리와 죄인’들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수군거리며, 예수께서 죄인을 영접하고 이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비난합니다. ‘말씀을 듣고자 나아온 것’을 죄인과 ‘함께 먹는 것’이라고 말해, ‘먹는 문제’를 ‘말씀 듣는 것’과 연결합니다. 이것은 앞 일화에서 ’치유‘와 ’가르침‘을 연결해 말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바리새인들의 문제 제기에 대해 예수는 비유적인 말을 합니다(31-32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말씀합니다. ‘의인’은 ‘건강한 자’, ‘죄인’은 ‘병든 자’ 그리고 ‘의사’는 ‘예수’와 의미상으로 연결됩니다. 예수를 ‘의사’로 생각하면, 예수가 죄인을 불러 회개하는 것은 ‘치유’입니다. 즉 가르침이 치유인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리’를 ‘죄인’의 대명사처럼, 그리고 ‘바리새인’은 ‘의인’의 대명사처럼 사용합니다. 그런데, ‘세리’는 예수의 부름에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지만 ‘바리새인’은 예수의 제자들을 비방하며, 문제 제기합니다. 문제 제기한 것을 잘못이라 말할 순 없습니다. 유대인에게 질문은 깨달음으로 나아가게 매우 중요하면서 당연한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이들이 제자들에게 한 문제 제기는 ‘비방’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입니다. 알고자 한 질문이 아니라 비방을 위한 질문이라는 것입니다. 바리새 일행은 ‘세리와 죄인들’과는 함께 먹어서는 안 되는데, 이들과 함께 먹는 제자들을 비방하기 위해서 질문이라는 형식을 빌릴 뿐입니다.

4. 두 번째 문제제기 33-35절 “먹느냐?”

문제 제기는 이어집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는데, 당신의 제자들은 왜 먹고 마시느냐?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매우 전투적입니다. “왜 먹느냐?” 즉, “왜 금식하지 않느냐?”는 것으로 이 질문도 앞의 경우처럼 당연하게 금식해야 한다는 전제가 있습니다. 이에 대해 예수는 비유로 답합니다. 혼인잔치 시에는 금식할 수 없다는 것이며,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금식할 것이라 말합니다.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 것은 혼인집에 신랑과 함께 있기 때문이며, 신랑이신 예수가 함께 하지 못할 때가 오면, 그때에는 금식할 것이라 말합니다. 문제를 제기한 배경이 레위의 잔치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흥미롭습니다.

5. 36-39절 비유

비유는 3부분(36, 37, 38-39절)으로 구성됩니다. ‘새로운’을 의미하는 단어는 두개(nevo", kainov")가 각각 4회씩 나오며, ‘낡은’을 의미하는 단어는 ‘palaiov"’만 5회 나옵니다. ‘새로운’을 구분한 이유가 있습니까? 두 단어가 함께 나오는 38절을 보면, ‘카이노스’는 부대에 ‘네오스’는 ‘포도주’에 사용합니다. 그리고 36-37절에는 ‘카이노스’를 ‘옷’과 ‘부대’에 사용합니다. ‘옷’과 ‘부대’의 경우에는 새 것(카이노스)이 언제나 좋다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포도주’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새 것’보다 ‘묵은 것’이 더 좋습니다. 그래서 구분해 사용합니다.

36-37절에는 당연한 두 문장이 나옵니다. 하나는 “새 옷에 한 조각을 찢어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다” 입니다. 어떤 사람도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면 새 옷을 찢어 버리게 되고, 새 옷 조각이 낡은 것에 어울리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가 쏟아지고 부대도 못쓰게 되기 때문입니다. 당연한 두 문장은 자연스럽게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는 말로 귀결됩니다. 그런데, 비유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고 이해하기 어려운 39절이 나옵니다. “묵은 포도주를 마시고 새 것을 원하는 자가 없나니 이는 묵은 것이 좋다 함이니라” 이 말을 해석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 가르침을 의미합니다. 새 가르침을 받아들이려면 새 부대,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의 새 가르침 한 조각을 떼어서 낡은 옷을 보수하는 데 사용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하면 둘 다 망가질 뿐입니다.

레위 집에서 바리새인이 제기한 의문은 낡은 부대와 낡은 옷과 같은 것입니다. 새로운 가르침을 받은 사람이 “누구와 함께 먹느냐?” “먹느냐?” 같은 문제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병든 자로 상정되는 ‘세리와 죄인’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치유의 대상이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세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말합니다. 세리는 예수의 새 포도주인 가르침을 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새 부대가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새 옷의 한 조각을 떼어 낡은 옷을 보수하려 합니다. 헌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으려고 합니다.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옛 포도주가 주는 익숙한 맛 때문입니다. 그 맛에 취해, 길들여져, 버리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을 39절은 “묵은 것이 좋다”고 걱정하며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어떻습니까? 세리와 바리새인, 누구를 닮았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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