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박사와 함께 가는 누가복음 산책 (16)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누가는 제자직 단락을 쓴 후에 제자들이 해야 할 것을 말하고자 평지설교를 말합니다. 평지설교의 듣는 사람은 제자들(20)과 백성들(7:1)입니다. 누가복음에서 제자는 열두 제자(사도)만을 의미하지 않고, 따르는 자 모두를 포함합니다. 마태의 산(5;1)과는 다르게 평지에서 예수께서 설교합니다. 평지설교는 크게 서론(17-19)과 본론(20-49)으로 되어 있는데, 본론은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각 부분의 시작은 전형적인 도입부로 시작합니다-‘말하다’는 동사(20,27,39)와 청자들(제자들, 듣는 자들, 그들),

서론을 보면, 예수와 함께한 자들(사도들), 제자 무리(오클로스)와 백성의 무리(프레쏘스)가 등장합니다(17). 이들은 말씀을 듣고 병 고침을 받기 위해서 나옵니다. 앞의 경우처럼 ‘말씀 듣는 것’이 ‘병 고침’과 연결되며, 더러운 귀신(영)에게 고난 받는 자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그래서 많은 무리(오클로스)가 예수를 만지고자 합니다. 이들은 유대와 예루살렘 그리고 두로와 시돈의 해안에서부터 나아온 자들입니다. 동일 저자의 사도행전은 성령이 임한 사람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내 증인이 되어야 한다 말합니다. 그리고, 앞선 본문에서 성령이 함께 한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안고 ‘이방의 빛’이며 ‘이스라엘의 영광’이라 예수를 찬양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유대인이니, 이방이니 하는 문제 때문에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가난한 자에게 전달되어야 한다고 선포됩니다(4:17). 왜 가난한 자입니까? 가난한 자는 누구입니까?

1. 복(6:20-23)

이 부분은 산상설교의 8복과 비교해 4복 4화로 불려지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에 대해서는 동의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첫 번째 복 선언과 두세 번째 그리고 네 번째 복 선언의 문형이 다릅니다. 2) 첫 번째 복 선언에 등장하는 ‘하나님 나라’와 두세 번째의 복 선언의 ‘배부르고’, ‘웃게’ 될 것이라는 말의 무게가 다릅니다. 3) 첫 번째와 다르게 두세 번째에는 ‘지금’이라는 단어를 쓰며, 네 번째는 ‘왜냐하면’으로 이유를 설명합니다. 4) 1,2,3번째 복 선언은 형용사를 동사로 사용하는데, 4번째 복 선언은 형용사와 동사가 함께 사용됩니다. 사실, 평지설교에는 ‘복’이라는 명사형태는 나오지 않습니다. 다만 어떤 사람을 복되다고 찬양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복’이 무엇인지 보다는 어떻게 하면 ‘복된 사람’이 될 수 있는 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복 되도다’는 4번의 선언이 나오는 이 본문을 4복이라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복 되도다’고 선언하는 사람은 ‘가난한 자’, ‘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 그리고 ‘미움을 받을 때’입니다. 그런데, 가난한 자가 받는 복인 하나님 나라와 주린 자와 우는 자 그리고 미움 받을 때 받는 복들을 비교하면, 비교되지 못할 정도로 많은 무게 차이가 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와 대등하게 복이라고 열거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대부분 학자는 누가복음의 ‘가난한 자’가 실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이라 주장합니다.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 단어가 실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단어라고 해서 이들이 실제적으로 가난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사용되었다고 의미를 한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마태의 ‘심령이 가난한 자’와 누가의 ‘가난한 자’를 비교해서 둘의 신학 차이를 말하는데 사용되곤 합니다. 이 지점에 생각할 점이 있습니다. 표현이 다르다고 해서 신학적 차이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다른 표현처럼 보이는 것이 같은 의미일 수는 없느냐? 는 것입니다. 누가가 ‘심령’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가난한 자’ 로만 말한 것은 신학적 차이 때문이 아니라, 이렇게 써도 마태의 ‘심령이 가난한 자’를 의미하기 때문일 수는 없습니까?

우리는 앞에서 가난한 자가 누구인가? 하는 물음을 던졌습니다. 누가에서 ‘가난한 자’는 돈이 없는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만일 ‘가난한 자’가 경제적인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취급된다면 이해할 수 없는 본문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경제적인 상태를 가지고 축복과 저주를 선언하는 평지설교본문. 재물을 가진 자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18:24-25)는 구절. 가난한 자를 복음의 수혜자(4:18)로 말하는 본문. 메시야 잔치 비유에서 초대받은 자들이 경제적인 이유(‘밭’과 ‘소’를 샀기)때문에 잔치를 거절하여 가난한 자들(14:13)로 수정되는 구절들이 그 예입니다.

구약에는 우상숭배에 대해 많이 지적하며 매우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신약에는 우상숭배에 대해서 이렇다 할 말이 많이 나오지 않는데 그 이유는 무엇 때문입니까? 딤전 610절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하여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 말합니다. 누가복음 1613절은 재물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는 대립적인 존재(16:13)라 말합니다. 여기서 재물이라는 표현은 맘몬으로 우상화된 재물을 의미합니다. 왜 누가는 재물을 이렇게 표현합니까? 그래서 누가에서 재물을 쌓는 것하나님께 부유하지 못한 것’(12:21)이 됩니다.

다른 복음서와 비교할 때 누가에는 경제적 진술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이것을 가지고 누가가 경제적인 문제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고만 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경제적인 문제를 경제적인 것만으로 인식하지 않고 신앙적인 것으로 다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원, 제자직, 용서, 사랑과 같이 신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신학적 내용을 경제적인 진술로 표현합니다. 신앙적이고 신학적인 사상을 경제적인 표현에 담아낸 것은 과거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경제 문제가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을 것입니다.

1) 구원. 삭개오의 경우를 보면,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며 토색한 것에 대해서는 4배로 보상할 것이라는 경제적 포기를 구원과 연결해 말합니다(19:8-9). 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으며(18:25),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다가 멸망당한 노아 때처럼, 인자의 때에도 경제적인 행위를 하다가 멸망당합니다(17:26), 막대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한 여인에게 예수는 구원을 선포합니다(7:36-50).

2) 제자직, 베드로는 경제적 획득과 관련해 죄를 고백하며, 제자가 되기 위해서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며 모든 것을 버립니다(5:1-11). 세리 레위도 마찬가지입니다(5:27-28). 예수는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는 무소유를 요구하며(9: 3), 칠십인을 파송할 때에도 경제적인 표현을 사용해 명령합니다. 그래서 제자가 되려는 자는 자기 모든 소유를 버려야만 합니다(14:25-35), 영생을 묻는 관원에게도 모든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고 명령합니다(18:22).

3) 용서와 사랑. 빌리고 빌려주는 경제적인 모습을 누가는 죄 용서와 연결하며, 이것을 사랑과 연결합니다(7:36-50). 사마리아 사람의 자비로운 행위는 기름과 포도주 그리고 부비라는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는 것으로 드러나며, 이것이 사랑의 전형이 됩니다(10:25-37), 그리고 꾸어주는 경제적인 행위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 되지만(6:35) 재물을 모으려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가 됩니다(12:13-21).

누가복음에서 가난한 자는 재물을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반면 부유한 자는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착각해서 그동안 청부론이니, ‘청빈론이니 논쟁하였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재물의 많고 적음을 주목하기 보다는 재물에 대한 태도에 주목합니다.

평지설교는 가난한 자지금 주린 자’, ‘지금 우는 자’, ‘인자 때문에 사람들에게 미움을 당하는 자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주리고’, ‘지금 울고’, ‘인자 때문에 미움을 당하는 것이 어떻게 복되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까? 현재 상황만을 보면, 복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되어질 미래를 주목하면 분명 복이라 할 수 있습니다. , 말씀은 지금에 주목하기 보다는 되어질 것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지금 주리고, 우는 현실만을 바라보면 비관적이라 여겨지는 그런 상황도, 곧 배부르게 될 것이고, 곧 웃게 될 복된 상황이 될 것이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의 현실에만 집중하지 말고, 되어질 미래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돈을 많으니, 적으니로만 따지는 우리식 관심에서 벗어나 나는 돈을 사랑하는가?” “하나님을 사랑하는가?” “내 주인은 돈인가? 하나님인가?” 바꿔 생각하라고 누가는 이렇게 경제적인 표현들로 신앙을 말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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