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박사와 함께 가는 누가복음 산책 (13)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제자와 사도>

누가복음은 ‘제자’와 ‘사도’를 구분합니다. 많은 제자들 중에서 12을 선택해 사도로 부르는 장면이 그 증거입니다(6:12-16). 제자직 단락은 기적적인 낚음을 통해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쫓는 것으로 시작하고, 이들 중에서 12을 선택하는 것으로 단락을 마무리합니다. 이렇게 제자와 사도의 일화를 포괄로 해서 제자직 단락을 구성합니다. 포괄이 품고 있는 내용(5:12-6:11)은 전체가 교차대칭구조입니다. 이를 통해서 2개 치유일화(나병, 중풍병)와 2개 안식일 논쟁일화가 서로 대칭되며, 이 일화들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런 구조를 통해서 예수와 논쟁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두 치유 일화에 등장하는 사람들처럼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을 시사하는데, 이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을 세리의 모습, 모든 것을 버리고 쫓아야 한다는 것으로 보여 줍니다.

<나병치유(5:12-16)>

나병치유 일화는 교차대칭구조입니다. 도입 도시(12상) A. 어떤 사람(12하) B. 예수(13상) C 치유(13하) B’ 예수(14) A’ 많은 무리(15) 마무리 한적한 곳(16), 이 구조는 나병이 치유되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나병’이 과연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한센병’인가? 하는 데에는 많은 의구심이 제기되는데,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의 손을 대었다는 것 그리고, 격리된 사람이 어떻게 아무런 설명 없이 예수와 대면하는가? 그리고, 이 단어가 나병만을 의미하는 그런 단어가 아니고, 심한 피부병도 말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보라, 주, 깨끗함, 가르침>

하나 더 주목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두/ijdou(보라)’를 사용하여 이 사람을 등장시킨다는 것입니다. ‘이두’를 우리 말 성경에서는 생략하거나 ‘보라’로 번역합니다. 독자나 듣는 자에게 말하는 내용에 ‘주의(주목)’하라고 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사전적 의미입니다. 우리 말 성경이 생략한 이 단어의 의미를 살려 이렇게 질문해 봅니다. 이 사람에게 주목해야 할 점은 무엇입니까?

그는 예수를 보자 엎드리며 예수를 ‘주’라고 부르며, 당신이 원하면 나를 깨끗하게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주’라는 호칭은 단순히 ‘주인’을 의미하는 단어이지만 누가복음에서는 오직, ‘하나님’과 ‘예수’에게만 이 칭호를 사용한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할 수 있습니다.

병든 사람은 예수를 ‘주’라 부르며, 깨끗하게 해 달라고 구합니다. 이 내용을 원문대로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주여, 만일 당신이 원한다면, 당신은 나를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을 살피면, 그가 자기 더러움을 먼저 인정하고 예수께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는 손으로 그를 만지며 말합니다. 말하는 것을 원문을 살려 번역하면 이렇습니다. “내가 원한다, 너는 깨끗해져라” 본문은 더러운 자가 깨끗하게 된 것을 치유라 말합니다. 육체적으로는 더러운 자가 깨끗해지려면 더러운 것을 떨쳐 내야 합니다. 그럼 영적으로는 어떻게 가능합니까? 무엇보다 먼저 자기가 더럽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고, 더럽다는 사실을 입으로 말하며, 깨끗해지려고 해야 합니다. 이 병이 나병이든 심한 피부병이든지 분명한 것은 깨끗하지 못한 병입니다. 이런 사람을 만지고 접촉하는 것은 꺼려지며, 레위기 5장은 이런 부정한 것과 접촉하며 부정해진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하면, 부정한 것에 손을 덴 예수가 더러워져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러운 사람이 깨끗해집니다.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또 주목할 것은 이 치유 후에 ‘말씀 듣는 것’과 ‘치유’를 연결해서 말합니다(15). 대칭되는 본문인 안식일 논쟁 일화(6:6-11절)의 배경 또한 예수께서 회당에서 가르칠 때입니다. 두 일화가 가르침과 연결됩니다. 이렇게 치유일화와 논쟁일화를 가르침과 연결해서 말하는 누가의 의도는 무엇입니까?

<안식일 논쟁(6:6-11)>

교차대칭구조로 된 안식일 논쟁일화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습니다

도입-6a 배경

A. 6b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었다(미완)

B. 7 바리새인,서기관이 지켜보고 있었다(미완)

C. 8 오른 손 마른 자에게 한 예수의 말

C' 9 서기관과 바리새인에게 한 예수의 말

B'10a 저들 모두를 둘러본다.

A'10b 오른 손 마른 자가 회복되었다.

결과 오른 손 마른 자(10c)는 회복, 바리새인, 서기관은 분노(11)

<손, 마르다>

이 구조가 보여주는 것은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치유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이 일화의 전체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소재이지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앞선 나병일화처럼 이 일화에도 ‘손’이 나옵니다. 예수의 손은 ‘치유의 손’인데 비해. 여기에 등장하는 ‘손’은 오른쪽이 ‘마른 손’입니다. 마가와 마태 병행본문에는 ‘한편 손이 마른 사람’인데, 누가는 이 부분을 ‘오른 손 마른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왜 누가는 앞선 복음서와 다르게 ‘오른 손 마른 사람’이라 말하는가? 하는 질문은 자연스럽다 할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누가의 의도와 연관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르다’는 단어는 누가복음의 이 일화에서 두 번 사용하고 23장 31절에 한 번 더 사용합니다. ‘푸른’ 나무와 대조적인 표현으로 ‘마른’ 나무가 나옵니다. 70인역에는 약 40회 나오는데, ‘말라버린 바다’, ‘젖 없는 유방’의 표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있어야 할 것’이 없는 상태를 이 단어가 표현합니다. ‘오른 손’은 해야 할 것, 옳은 것을 하는 손입니다. 누가가 ‘한편 마른 손’을 ‘오른 손이 말랐다’고 말한 것은 이 사람이 해야 할 옳은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서기관, 바리새인, 그리고 오른 손 마른 사람>

B와 B’를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보며(7), 예수가 이들을 봅니다(10). 서기관과 바리새인이 예수를 본 것은 고소하기 위해서이지만 예수가 이들을 본 것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이후 예수가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한 것과 연결해 보면, 서기관과 바리새인을 오른 손 마른 사람과 연결시키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오른 손 마른 사람이 치유된 것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도 치유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을 문제 삼아 고소하려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은 예수의 표현으로 말하면 선행을 하지 않고, 생명을 구하려 하지 않는 자입니다.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오른 손 마른 자입니다.

이에 대해서는 교차대칭구조의 중앙 부분인 C와 C’부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예수는 오른 손 마른 사람에게 일어나 가운데 서라고 말하며, 그는 예수의 말대로 일어나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한 예수의 질문에는 이들이 안식일에 어떤 일을 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이 오른 손 마른 사람의 모습입니다. 오른 손 마른 자가 치유된 것처럼 이들도 치유되어야 합니다. 이 치유는 가르침으로 가능합니다. 그래서 예수는 질문합니다. 가르침 배경에서 이 일화를 소개하는 납득할 만한 설명이 됩니다. 오른 손 마른 사람처럼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치유되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이와는 다르게 이들은 예수에 대해 분노하는 것으로 일화가 마무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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