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박사와 함께 가는 누가복음 산책 (9)

 

임인호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임인호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예수보다 앞선 자, 요한의 역할은 감금으로 끝납니다. 이제부터는 예수만 있습니다. 누가는 예수의 공적인 삶을 말하기 전에 먼저 3개의 일화를 소개합니다. 이 구성은 치밀합니다. 이 단락에서 누가는 예수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말합니다.

첫 번째 세례 일화에서 예수를 향해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하늘의 소리가 있으며(21-22), 두 번째 일화인 족보(23-38)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드러내며, 세 번째(4:1-13) 시험 일화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가 시험받고 그 시험을 통과했음을 말합니다. 이렇게 3개의 연속적인 일화를 통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분명하게 드러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분명히 한 후에, 누가는 하나님 아들이신 예수의 공적인 삶을 펼칩니다.

1. 예수의 세례 (3:21-22)

‘밥티조-βαπτίζω’는 고전 헬라어 문헌에서 ‘담그다’ ‘멸망시키다’는 의미로 헬레니즘 의식에서는 ‘씻어 깨끗하게’ 하는 의미로 사용합니다. ‘물’을 사용하는 의식은 희생제와 함께 널리 유포된 종교적 특성입니다. ‘뿌리고’, ‘붓고’, ‘씻고’, ‘마시고’, ‘잠기고’ 하는 방식으로 신성하게 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구름 아래에서 바다를 건너는 것’을 이스라엘의 세례(고전10:2)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세례(갈3:27) 말합니다. 이를 통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며(갈3:29),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써의 세례는 그의 죽으심과 부활과의 연합으로 이어집니다(롬6:1-11).

누가의 예수 세례 일화에는 마가와 마태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하나, ‘예수의 세례’를 ‘백성들의 세례’와 연결해서 말합니다. 둘, 마가(1:9)와 마태(3:13)와 다르게 예수가 누구에게서 세례 받았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셋, 하늘로부터 나오는 소리를 누가는 세례 후의 기도와 연결시킵니다.

하지만 성령을 ‘비둘기’와 연결해 말하는 것은 마태와 마가와 같습니다. 우리 말 성경은 성경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예수 위에 임했다고 말합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사람들은 ‘성령’과 ‘비둘기’를 직접적으로 연결해서 해석하고자 합니다. 하지만 원문을 세밀하게 보면, ‘성령’과 ‘비둘기’가 직접 연결되는 개념이기 보다는 ‘비둘기가 내려오는 것’처럼 ‘성령이 내려왔다’고 말합니다. 즉 ‘성령 강림의 모습’을 ‘비둘기가 내려오는 모습’과 연결해서 말합니다.

플루타크 영웅전의 누마(NUMA POMPILISU)의 즉위식 장면에는 왕으로 선택된 누마가 하늘의 재가를 기다리는 장면에서 새가 내려오는 것을 하늘의 재가가 있는 것으로 여기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누마가 베일을 쓰고 머리를 남으로 향하게 하고 오른손을 머리에 올리고 제사장 뒤에 선후에 제사장이 소리를 쳐 기도한 다음 하늘을 살피다가 하늘로부터 새가 내려오는 것을 보면, 하늘이 허락했다고 하여 누마에게 왕복을 입게 하고 즉위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하늘로부터 새가 내려오는 것을 하늘의 재가가 난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누가 시대 지중해 세계에 사는 사람들이 읽는다면, 예수가 하늘의 아들이심을 하늘이 인정한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둘기를 성령과 바로 연결해 이해하려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2. 족보 (3:23-38)

누가 “족보”는 마태 족보와 차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족보의 위치와 기술방법이 다릅니다. 마태는 족보로 복음서를 시작하지만 누가는 사역 이전에 족보를 위치시킵니다. 마태는 “예수를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라고 말하면서 누가 누구를 낳았다며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방식으로 족보를 서술합니다. 하지만 누가복음 족보는 전체가 한 문장이라는 점입니다. 3:23c절-38절의 헬라어 본문을 보면, 이 구절 전체가 하나의 단어입니다. 족보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소유격으로 하나의 구입니다. 우리말 성경에서 ‘그 위는’으로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 성경에는 없습니다. ‘이름의 소유격’을 이렇게 번역한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우리말로 그대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예수는 요셉의 헬리의....아담의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소유격으로 연결된 이 단어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첫 단어와 마지막 단어입니다. 족보는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그러기에 누가복음 족보를 아담 족보라고 말하는 것은 본문이 허락하지 않는 주장입니다. 이런 주장은 족보를 하나의 단어로 표기한 누가복음의 의도와 배치됩니다. 누가는 예수를 아담의 아들로 말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려면, 누가가 아담을 마지막 단어로 삼지 않고, 하나님을 마지막 단어로 삼은 것에 대해 답해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처럼 하나님까지 소급하는 족보가 구약이나 외경 그리고 쿰란 문헌과 어떤 랍비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고 하여 하나님을 제외하고 누가복음 족보를 아담 족보라고 말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이 점이 누가 족보만의 분명한 특징입니다. 누가가 이렇게 긴 하나의 단어로 예수의 족보를 말하는 것은 조상들의 이름을 거명하며 자기 이름을 말하는 유대인들의 풀네임을 연상시킵니다.

3. 예수의 시험(4:1-13)

이 단락 구성 역시 정교합니다. 포괄(1-2) 마친 후에. A(3-4).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이 되라고 말해라. B(5-8). 소유와 권력을 위해서 나에게 절하라. A’(9-12)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뛰어 내려라. 포괄(13) 마친 후에. 포괄(1,13)에는 이 두 구절에만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순텔레오συντελέω’ 는 ‘마치다, 완료하다’는 의미인데, 이 단어를 중심으로 ‘시험/유혹’이 시작되고, 끝납니다.

‘시험/유혹’이 있는 것만으로 신앙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악한 일을 하던 사람이 악한 일에 직면하여 ‘시험/유혹’을 받는다면, 이것은 오히려 영적 상태가 악화된 것이 아니라 나아진 것일 수 있습니다. 성령 충만한 예수께서 ‘시험/유혹’을 받았다는 것에서 이런 점을 보게 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도 얼마든지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 충만을 ‘시험/유혹’이 없는 상태로 이해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세 가지 영역에서 마귀는 예수를 유혹하고 시험합니다. 이것은 창세기의 아담과 하와가 받았던 ‘유혹/시험’을 기억나게 합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창 3:6a). 그리고 또 하나 사도 요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도록 분부하면서 제시한 세 종류의 시험도 생각납니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요일 2:16)’

우리말 성경의 개역, 개정역, 표준새번역은 ‘페이라조 πειραξω’를 ‘시험받다’로 공동번역과 200주년 성경은 ‘유혹받다’로 번역합니다. 이 단어 번역에 대한 분명한 고민이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습니다.

예수 사역 이전에 이 단락을 배치해서 예수께서 사역할 충분한 자격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누가의 구성을 생각하면, ‘시험’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지만 이 내용이 ‘육체적 필요’, ‘소유와 권력’, ‘교만’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유혹’이라고 번역하는 것도 무난합니다. 그리고 창세기와 요한이 지적한 것들을 생각하면 ‘유혹’으로 번역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본인은 이 단어를 ‘시험’이라 쓰면서 ‘유혹’의 의미도 함께 생각하는 읽기가 적절하겠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는 직면한 ‘시험/유혹’을 성경으로 이깁니다. ‘육체적 필요’에 대한 것은 신8:3절으로. ‘소유와 권력’에 대한 것은 신6:13절로, ‘교만’에 대한 것은 신6:16절으로 이깁니다. 하지만 마귀도 성경(시91:11-12)으로 예수를 ‘시험/유혹’한 것을 생각하면, 성경을 아는 것과 함께 적확하게, 그리고 적절하게 적용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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