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인호 박사와 함께 가는 누가복음 산책 (13)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임인호 박사 / 서울신학대학, 호서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호서대학교대학원 신약학박사, 서울신대-호서대-중앙신학교 외래교수 역임, 동인교회 담임목사

1. 중풍병 치유(5:17-26)

이 일화는 예수가 가르칠 때 그리고 고칠 수 있는 주의 능력이 예수에게 있을 때 일어납니다. 앞의 나병 치유가 ‘말씀 듣는 것’과 ‘치유’를 연결해 말한 것처럼 ‘가르치는 것’과 ‘치유’를 함께 말합니다. 누가가 ‘치유’와 ‘말씀’ 그리고 ‘가르침’을 연결해서 말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치유를 소재로 하여, ‘말씀’과 ‘가르침’의 치유를 말하고자 한 것입니다.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생각이 변하고 행동이 바뀌는 것이 치유인 것입니다. 12살 예수는 ‘선생’들과 함께 묻기도 말하기도 하였으며, 예수가 회당에서 가르치고, 전파하는 자로 말하는 것도 함께 생각해 볼 만합니다(4:14-44).

이 일화는 앞의 일화처럼 교차대칭구조(chiasm)입니다. 이 방식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것이 히브리인들이 문장구조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조는 많은 내용을 좀 더 쉽게 기억하게 하고, 전하려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전달하는데 유리합니다. 그러므로 구조 분석을 통해서 문장을 보다 명확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로 일화를 분석하면 이렇습니다.

도입(17) 가르침과 고치는 능력 A 중풍병자와 사람들(18-19). B 예수(20), C 서기관과 바리새인(21). B’예수(22-24). A’ 중풍병자와 사람들(25) 마무리)(26)

도입(17)과 마무리(26)

도입과 마무리에는 ‘바리새인’과 ‘교법사’ 그리고 이들을 지칭하는 ‘그들’이 등장합니다. ‘교법사(노모디다스칼로스)’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 그리고 디모데전서에 각각 한번 나옵니다. ‘율법’과 ‘선생’의 합성어로 사도행전에서는 바리새인 가말리엘을 지칭합니다(행 5:34). 여기에서는 서기관을 이렇게 부르는 것처럼 보입니다. 치유의 능력이 함께 한 예수께서 가르치는 자리에 유대와 예루살렘에서 온 자들이 있습니다. 같은 내용의 다른 복음서와 비교하면, 누가만이 ‘가르침’과 ‘치유’를 말합니다. 도입과 마무리는 모두 교차 대칭구조입니다. 17절은 a. 가르칠 때 b. 바리새인과 교법사 b'.갈릴리와 유대와 예루살렘 a'.고치는 능력, 그리고 26절은 a.놀람 b.하나님을 영화롭게 함 b’ 기이한 일 a’두려움.

예수로 인해 사람들은 놀라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합니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습니까? 이 부분은 이어지는 내용(18-25)이 말합니다. 내용은 대칭되는 부분을 함께 살피는 것이 좋습니다.

A(18-19)와 A’(25) 중풍병자와 사람들

A와 A’에는 중풍병자와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18절은 ‘이두-보라’는 말로 주목하라 말하는데, 개정역은 이것을 번역하지 않습니다. 주목해서 보면, 여러 가지 대칭이 있습니다. A에서 중풍병자는 ‘침상에 누워’. ‘사람들’에 의해 ‘예수’께 나아옵니다. 그런데, A’에서는 중풍병자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어나’ ‘누웠던 것을 가지고’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사람들은 중풍병자를 ‘데려오며’(A),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네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합니다(A’).

B 예수, 그들과 중풍병자(22-24) B’ 예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중풍병자(25)

중풍병자는 어떻게 치유됩니까? B의 예수는 중풍병자를 데리고 온 자들의 믿음을 보고 중풍병자에게 ‘죄 사함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B’의 예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생각을 알고는 이들에게 질문합니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와 ‘일어나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 예수는 중풍병자에게 말하고,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게도 말합니다. 이런 구성은 ‘중풍병자’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연결시킵니다.

예수께서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인자가 땅에서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가 알도록 이렇게 한 것입니까? 일차적으로는 서기관과 바리새인입니다. 예수의 말은 이 일화에서 주목할 것이 무엇인지 더 분명해 집니다. ‘일어나 걸어가라’는 것과 ‘네 죄가 사해졌다’는 것 중에서 더 어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그 답은 예수의 말에 있습니다. 죄 사함을 말하는 것이 어렵지만 예수는 인자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렇게 일화는 중풍병의 치유보다도 죄 사하는 권세에 집중하도록 인도합니다.

C 서기관과 바리새인(21)

중풍병 치유는 ‘소재’이지 ‘주제’가 아닙니다. 중풍병 치유라는 소재를 통해서 죄 사함의 권세에 대해서 말합니다. 이를 위해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죄 사함에 대한 반론을 일화 중앙에 배치시킨 것입니다(C).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의도와 다르게 예수가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다고 지적합니다. 이들이 이렇게 말한 근거는 하나님 외에 누가 죄를 사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에 대해 예수는 말합니다. ‘죄 사하는 권세’는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자’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죄사함의 권세가 ‘하나님’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자’에게도 있다고 예수는 가르칩니다. ‘인자’가 ‘하나님’에 대칭해 나옵니다. ‘인자’에 대한 많은 논의가 있습니다. 예수가 자기를 지칭하는 표현이라는 주장에서부터 ‘인자’는 곧 ‘하나님의 아들’이며, ‘종말론적 인자’ 그리고 단어의 표현대로 ‘인간 그 자체’를 말한다는 주장까지 다양합니다. 어떤 것이라 말하는 것은 간단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본문의 내적 증거인 ‘하나님’과의 대칭해 사용한 점을 생각하면 ‘인간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즉, 죄 사람의 권세는 하나님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예수님’만 가진다는 말도 아닙니다. 죄 사함의 권세는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이런 생각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죄 사함’의 권세를 ‘죄 용서’의 권세라고 표기하면 조금 달라질 수 있습니다. 죄 사함의 권세는 용서의 권세입니다. ‘사하다’의 원어 ‘아피에미’ 용서하다, 사하다로 번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재판관이 되어 죄의 여부를 판단하는 권세가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잘못, 죄 문제를 용서하는 권세를 의미하며, 이 권세는 주기도문에서 말하는 죄 용서가 바로 죄 사함의 권세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중풍병자에게 죄 용서를 선언함으로 죄의 사슬로부터 그를 풀어 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신성모독으로 고발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의 강퍅함. 그리고 아들의 생각을 알기에 예수는 이들을 치유하기 위해 이들에게 질문합니다. 질문으로 예수는 이들을 가르친 것입니다. 질문은 유대인에게 가르치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2. 안식일 논쟁(6:1-5)

안식일 논쟁 일화 역시 교차대칭구조입니다. A 제자의 행동(1). B 바리새인의 문제제기(2). B’ 예수의 반문(3-4). A’ 예수의 말씀(5). 안식일에 예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는 것에 대해서 바리새인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며 문제제기 합니다.이들은 예수의 제자들이 한 행동이 안식일을 어긴 것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충분히 논쟁적입니다. 신23:26절은 곡식에 낫을 대지 않으면 이웃의 밭에서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를 허용합니다. 예수께서는 과거 다윗이 시장할 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될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 준 것을 상기시키며 제자들의 행동을 변호합니다. 그리고 예수는 인자가 안식일에 주인임을 선언합니다.

두 일화는 인자가 안식일의 주인이며 죄 사하는 권세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의 말씀을 문제 삼으며 신성모독이라 한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모습이나 예수의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비벼 먹는 것을 두고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했다며 비판하는 바리새인의 모습은 중풍병자와 비슷합니다. 중풍병은 움직여야 할 것이 움직이지 못하는 자입니다. 자기 생각으로 치유에 문제 제기하는 모습이나 안식일법으로 먹는 것마저 문제제기하는 자의 모습은 중풍병자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입니다. 하나님만 죄 사하는 권세를 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은 누군가를 용서하는 권세를 가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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