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교회력, 문철영목사,부활절 일곱째 주간

  • 입력 2021.05.10 11:14
  • 수정 2021.05.10 11:42
글자 크기
프린트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도의 수에 나중 들어간 제자(행 1:15-17)/생명있는 자(요일 5:9-13)/복있는 자(시 1편)/예수님의 고별기도(요 17:6-19))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문철영 목사, 연세대학교 신과대(B.A), 본대학원 Th.M, 및 신학전공 Ph.D 취득,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 역임, 호서대학원 강사역임, 노량진교회 부교역자 역임,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인천노회 제 37대 노회장역임, 수정교회 담임목사(1989. 6. 20~ 현재까지)

 

1. 사도의 수에 나중 들어간 제자(행 1:15-17, 21-26)


  주변에 기쁘게 목회사역을 잘 감당하는  목사님들에게서 발견한 공통점은 어릴 때부터 교회다니면서 예배 기도회 수련회에 열심히 참석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 시간 보내는 일을 많이 했다고 했다.  오늘 본문에서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분이었으나 12사도의 반열에 올라간 사람이 있다. 그는 먼저 “늘 우리와 함께 다니는 자”로서 후보 2명 중 1명으로 뽑혔을 뿐 아니라 12사도의 명부에 그 이름이 올라가게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이다. 그가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은 자가 되었는가? 세례요한에게서 예수님이 세례 받은 이후 공생애기간 내내 예수님을 따라다녔고 십자가처형과 부활까지 경험하였다. 예수님 십자가 처형을 보고 도망하였던 제자들 틈에 그도 있었을 것이고, 지금 또 다시금 한곳에 모인 자리에 그도 돌아왔다. 요셉과 맛디아 둘 중에 제비에 뽑힌 자가 맛디아였다. 맛디아는 예수님의 열 한  사도의 수에 들어가게 되었다. 사도행전에 그 이름이 등장하는 것 외에는 복음서나 다른 누가의 글에서 맛디아는 그 이름이 없다. 그가 특출한 사람이라기보다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의 이름이 어떻게 사도의 이름들과 나란히 올라가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그의 헌신을 보셨고 적당한 때에 맛디아를 보상해주신 것이다.

 

2. 생명이 있는 자(요일 5:9-13)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믿는 그 사람 자신이 스스로 증거가 되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든다고 한다.  또한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인간되심과 하나님 되심을 믿는 동시에 믿음을 가진 인간이 육체를 가진 인간되심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생명을 가지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을 믿어야 할 중요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생명과 영생이 없는가? 육체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을 부인하고 공동체를 떠난 자이다. 그는 아들을 믿는 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3. 복있는 자(시 1 편)


  “시2편과 함께 본 시편은 전 시편의 출입문 역할을 한다; 두 시편은 대 악의 주제 및 야웨 하나님의 지지를 받는 왕의 주제를 설정한다.”( Howard Wallace) “게다가, 시편 1편은 계속적으로 기도하려는 자는 토라를 끊임없이 묵상하는 자임을 제시한다.”
 본 시편은 ‘물가에 심긴 나무’와 ‘바람에 날리는 겨’의 비유를 사용하여 의인(복있는 자)와 악인(망하는 자)를 설명하고 있다. 1절에서는 복있는 자는 악인의 조언을 따르지 않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고, 그리고 조롱하는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않는 자이다. 그 다음에 2절에서 복있는 자는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암송하는 자이다.
물가에 심긴 나무가 잎사귀가 항상 푸르고 시절을 따라 열매를 맺는 것은 복있는 자의 번영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나무의 번영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지 않고 시내 물과 나무를 옮겨심은 손에 있는 것처럼 복있는 자의 번영의 근원은 뿌리에 공급하는 물과 옮겨 심는 손에 해당하는 야웨 하나님에게 있다.
 물가에 심긴 나무의 이미지는 에덴동산의 나무를 연상시키며 특별히 성전의 뜰 안에 심겨진 나무를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본문에서 주된 강조는 토라 곧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자에게 있다. 여기서 토라는 인간의 안정과 생명을 보장해주는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 되는 성전과 동일한 기능을 한다.
 6절에서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한다고 한다. 여기서 인정한다는 말은 “안다”로 히브리어로 “야다(יָדַע)”의 능동 분사형이며 “망한다”는 히브리어 “아바드(אָבַד)”의 미완료형이다. 본 시편에서는 ‘안다’는 말과 ‘망한다’는 말은 서로 상반된 개념의 말로 사용되고 있다. 복있는 자의 길은 현재와 미래의 경험과 관련이 있고 악인의 길은 아직 불확실한 실재이다.  

 

4. 예수님의 고별 기도(요 17: 6-19)


  예수님이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 제자들을 위해 하는 고별기도이다. 유언은 유언하는 분의 진실과 메시지가 담겨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고별기도에도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그 메시지는 제자들의 하나됨이다. 요한공동체에서 예수님의 기도가 성공적으로 응답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기도는 실패로 돌아왔다고 볼 수 있다. 요한 공동체가 내부적으로 분열의 아픔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 공동체서 분열을 일으키는 주동자는 적그리스도로 지칭된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육체로 오신 인간성을 부인한다. 그들은 오직 신적인 것만 인정한다. 그들은 누구인가? 육체를 무시하고 영적인 것만 중시하는 당시 기독교 영지주의였다. 그러나 하나됨을 이루기 위한 노력은 포기되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 더 있지 아니하오나 그들은 세상에 있사옵고 나는 아버지께로 가옵나니 거룩하신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어떻게 하나가 될 것인가? 오직 그리스도께서 주신 진리를 받아들일 때에만 그 일이 가능하다.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다만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그들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저작권자 © 본헤럴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관련기사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
모바일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