둔감한 엘리의 퇴장과 사무엘의 경청의 능력

  • 입력 2021.06.15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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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55)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어둠을 밝히는 구원에 능한 사사, 엘리

오늘 우리가 직면한 세상은 메신저들의 눈이 어두워진 시대. 모든 시대의 절망은 인간의 절망에서 비롯된다. 하나님을 등진 인간의 삶에는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절망의 때에도 희망의 마지막 심지가 되어야 할 지도층이 하나님께 불손하면 그 재앙은 일반 백성들에게까지 미친다. 지도자의 타락은 백성들을 고난으로 이끈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지도자의 절망적 상황이 시대의 절망적 상황을 더욱 악화시킨다. 절망이 세상에 팽배하여도 지도자가 붙든 희망의 깃발이 나부끼면 백성들은 포기하지 않는다. 아무리 패역하고 악한 시대라 할지라도 의인의 존재는 나라의 기울기를 바로 잡게 하고 성읍의 평안을 유지시키며 백성들을 안돈시키기에 충분하다. 메신저의 눈이 어두워지면 세상이 절망 가운데 처해 있다는 신호다.

성경 역사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진리가 바로 그와 같은 사실들이다. 여호수아의 생존 때와 사후에 이스라엘 백성이 보여준 모습은 사뭇 달라도 너무 달랐다. 사사들은 하나님 없이 스스로 왕 노릇하려던 혼돈기에 올바른 지도자가 절대적 영향력을 끼친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었다. 엘리는 이스라엘의 사사였다. 사사는 아직 이스라엘에 왕이 없을 때에 정치와 종교를 아우른 최고 지도자였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위해 손수 세우신 대리적 구원자였다. 그들의 생존은 이스라엘의 구원과 평안을 상징했고 그들의 죽음은 이스라엘이 다시 암흑기에 접어들었음을 의미했다. 구원에 능한 사사는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이었고 죽음의 땅에 마련된 오아시스였으며 이스라엘의 원수를 진멸하는 창검이었다.

구원에 능한 사사는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횃불

성소의 불빛 엘리의 몰락

엘리는 마지막 사사 시대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사사 시대에서 왕정 국가로 이전해가는 중차대한 시대에 그는 전환기적 인물로 선정되었다. 50대 후반에 사사로 부름받기 전, 청장년의 엘리는 이스라엘의 구원자로서 손색없는 인물이었다. 그는 위대한 지도자로 역사의 전면에 나섰으며 비교적 그 사명을 잘 감당했다. 그렇게 40년 동안을 사역한 엘리는 그 시대의 표상이요 역사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 의지였으며 한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한 시대의 흐름을 바로 잡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눈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의 등불이었다. 자기 백성들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 계시의 불빛이었으며 기도로 그 하나님 앞에서 밝혀야 할 성소의 불빛이었다. 엘리의 영광은 곧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하나님도 그를 통한 자기 백성의 구원을 기뻐하셨다. 원수들의 공격이 멈추어졌고 이스라엘 사방은 평화로움으로 충만한 안전지대가 되었다.

위대한 지도자 엘리의 몰락은 사역의 후반기에 찾아왔다. 범죄한 자식들을 제대로 훈계치 못한 유연함이 범죄한 백성들을 바로 지도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불량자요 여호와를 알지 못하던 두 아들이 제사장이 되었건만 말리지 못했다. 방자하게도 그들이 성소에서 믿지도 않는 여호와를 섬겼지만 적극적으로 막지 않았다. 그릇이 아니면 그 자리에 세우지 말았어야 옳았다. 제사 직분의 영광이 자신의 대에서 끊어진다 할지라도 엘리는 그 길을 택해야 당연했다. 그가 제갈량처럼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용단을 결행했더라면 이스라엘의 절망은 한참 후의 일이 되었을 것이다. 엘리는 악한 자식들을 적절히 훈계치 못했고 그 결과로 그들의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그들의 악행은 천하에 퍼졌고 이에 대한 엘리의 처사는 가벼운 도덕적 훈계에 불과했다. 그들은 엘리의 아들이기 이전에 이미 벨리알(Belial)의 아들이 되어 있었다.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삼상 2:12)의 개역한글과 KJV를 비롯하여 다수의 역본에는 불량자라 번역되었는데 원어 벨리알에 더 적합한 표현이다. “벨리알사악한 자,” “건달,” “하나님의 뜻을 거절하는 불량자였다. 엘리의 아들들은 그리스도의 원수인 벨리알의 아들들이었다.

 

주변 정리에 취약했던 희미한 엘리의 영적 시력

엘리는 주변 정리에 결정적으로 취약했다. 자식에 대한 본성적 사랑 때문에 하나님의 일보다 사람의 일을 더 생각했다. 자식의 불량함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엘리로 인해 이스라엘은 새로워질 수 있는 희망을 잃었다. 그렇게 하여 엘리 개인의 절망은 가족의 절망으로, 그것은 다시 이스라엘 전체의 절망으로 이어졌다. 메신저가 절망적 상황에 놓이면 구속공동체에 당장 어두운 기운이 스며들고 그가 속한 민족공동체에까지 절망의 바이러스를 감염시키게 된다. 올바른 지도자는 주변 정리에 철저하다. 그것은 오늘날처럼 공직자의 윤리이기 이전에 성직자 특히 메신저에게 응당 요구되는 근본 자질이다. 주변이 깨끗지 않으면 임했던 영광도 사라져버린다. 정치지도자도 그러하지만 특히 교회지도자의 경우에 이 이슈는 간과할 수 없는 핵심 중의 핵심 사안이다. 수정 같이 투명한 주변 정리 없이 거룩한 공동체의 수장으로 선정된다면 개인만이 아니라 그가 속한 교단의 재앙이요 그 부정적인 여파는 한참을 간다. 이것은 정치적 논쟁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정체성 확립의 근간에 해당한다.

나이가 들어 시력이 약해지는 것은 자연적인 현상이다. 노안으로 인한 시력 감퇴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져 앞을 볼 수 없게 된 이 정황은 상징적이며 영적인 중요성을 내포한다. 육신의 눈보다 더 중요한 영혼의 시력에 심각한 징후가 드러났다. 그는 이스라엘의 예언자였고 사사였으며 하나님이 세워주셨기에 마땅히 그 시대를 밝혀야 했던 여호와의 등불이었다. 그런 그의 영적 시각이 둔감해졌다. 영적 시력은 시간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 속한 문제였다. 육신의 시력 저하가 곧 영적 시력의 약화를 의미할 수는 없었다. 설사 엘리가 노인이 되어 시력이 나빠졌다 할지라도 그가 만약 하나님의 은혜 안에 깨어있었다면 영적인 시력만은 어둡지 않았을 것이다. 성경은 모세의 죽을 때 나이가 일백 이십 세에 이르렀으나 그 눈이 흐리지 않았다고 증거한다.

 

엘리 마음의 초점에서 사라진 하나님

엘리의 어두운 눈은 단지 육신적 노화 현상만은 아니었다. 영성의 노화로 인한 영적 시력의 감퇴가 더 문제였다. 엘리의 영성은 초창기의 선명함에서 상당히 멀어져 있었다. 영적 백내장, 녹내장이 한꺼번에 들이닥쳤다. 흐리고 둔하고 앞뒤로 꽉 막혀버렸다. 그의 치명적인 영적 마비가 영적 시각의 둔화 속도를 점증시켰다. 한 때는 이상을 보던 자가 이제 눈앞의 일조차 구분할 수 없는 청맹과니가 되었다. 엘리가 엘리다웠을 때 이스라엘에는 하나님의 구원하는 능력이 흘러 넘쳤다. 그가 사역했던 40년은 하나님께 집중했던 엘리 사사의 삶과 사역으로 인해 영광이 그득했던 은총의 시절이었다. 그랬던 그가 사역의 절정기를 지나면서 내리막길을 걸었다. 제동장치 없는 그의 추락은 이스라엘의 역사를 깊은 어둠과 절망의 심연으로 이끌었다. 꿈을 꾸고 꿈을 해석하고 꿈을 북돋우던 꿈의 사람이 꿈꾸지 못하는 세속의 사람으로 변질되었다. 그는 새로운 변화를 멀리함으로 옛 실패자들이 걸었던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원시의 능력을 상실한 근시의 사람이 된 것이다. 혜안도 통찰력도 모두 옛 일이 되고 목전의 물체를 식별하느라 진땀만 흘리게 되었다. 영적인 일은 고사하고 일상사에 대한 안목마저 잃어버렸다. 빛조차 어둠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흑암 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초점을 완전히 잃었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이었을까? 엘리의 마음 중심에서 초점이었던 하나님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하나님 신앙의 안경이 벗겨지자 엘리의 마음과 삶에는 흑암의 기운이 팽배하게 되었다. 메신저의 눈에서 거룩한 안경이 벗겨지면 지상의 거주민들에게 전할 천상의 메시지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다. 당신이 준비해서 전하는 메시지에 천상의 향기를 맡을 수 없다면 하늘로부터 임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교회로 몰려든 청중들에겐 재앙이다. 간지와 책략이 난무하는 세상의 둥지를 잠시 떠나 진리의 전당을 찾았는데 세상의 말쟁이들보다 못한 메시지에 천상의 향기마저 느낄 수 없다면 가슴 아픈 일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진리의 말씀, 천상의 향기로운 메시지로 위로받길 원하신다. 말씀에 대한 신앙이 중요한 것은 그것이 말씀을 진지하게 대할 때 일종의 안경을 준비시켜 준다는 점이다. 진리의 영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때때로 지혜와 계시의 영으로 임하시며 탁월한 예지의 번득임으로 진리탐구자들을 붙들어주신다.

엘리의 마음 중심에서 초점이었던

하나님이 사라졌기 때문이었다.

 

둔감한 엘리의 퇴장과 사무엘의 경청의 능력

겉모습은 사무엘인데 내면은 엘리 상태에 놓인 영적 노화자들이 많음은 교회로선 악몽이다. 한 때는 다윗이었다가 골리앗으로 화한 정체성의 변질도 아픔이지만 젊은 엘리의 모습이 사라진 늙은 엘리를 마주 대하는 사람들의 괴로움은 오죽할까? 필자의 육신은 어쩔 수 없이 노쇠의 길을 걷지만 영성과 통찰력마저 퇴화해버려 늙은 엘리의 모습만은 피하려 한다. 그래서 주님의 한없는 긍휼을 오늘도 갈망한다. 어쩌면 사무엘의 어린 시절을 가까이에서 살핀 엘리는 자신의 젊은 때를 상기시켜 주는 극광(極光)의 영성으로 인해 사무엘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아꼈을 것이다. 주마등처럼 휘익 지나가는 자신의 열정기를 희끄무레하게나마 보았을는지 모른다. 어쨌든 회복 불능의 상태에 있는 자신의 한계를 아는 자로서 엘리는 스스로 비극적인 종말을 준비했고 거룩한 하늘 음성으로 시작된 사무엘의 사역을 위해 모든 것을 갖추었다. 쓸쓸한 엘리의 퇴장과 영광스런 사무엘의 등장을 가늠한 것은 다름 아닌 영적 감각이었다. 아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시대에 보아야 할 것을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듣는 자의 예민함과 그렇지 못한 자의 둔감함이 둘의 운명을 갈랐다.

이 시대의 메신저들에게는 더욱 그러하다. 이 시대는 성경시대에 비해 영적 감각의 수준이 현저히 낮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거룩한 형상을 바라봄이 뚜렷이 격감되었다. 기껏 해야 마음으로 듣는다든가, 본다 해도 환상 차원에서 하나님과 연관된 뭔가를 보는 영적 현상의 파편 정도에 그친다. 사무엘의 하나님 인식과 우리의 하나님 인식이 동일하다고 말할 사람이 누구인가? 본질에서는 같을지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주님이 수세시에, 변화산에서 들으셨던 성음의 경청과 우리의 성음 경청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며 구원을 위해 기도드리면서 이를 위해 세상에 오셨음을 고백하면서 자신이 아버지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기를 구했을 때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 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일부는 천둥소리로 들었고 또 다른 무리는 천사의 말로 들었다. 사무엘은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세 번이나 연거푸 들었다. 메신저에게 절실한 것이 이런 성음의 경청 능력이다. 하지만 누가 알겠는가? 전능의 하나님께서 요한의 눈을 밝히고 귀를 열게 하셨던 것처럼 한순간 시대의 마지막 사역을 위해, 오실 자의 길을 온전히 예비시키고자 그와 같은 특별한 은총을 자신의 택한 자에게 허용하실지! 그가 나일지 당신일지 아니면 그 어떤 무명 메신저일지 누가 알겠는가? 징조 깃든 메시지는 그런 음성에 실려 오고 그러면 각별한 메신저의 시대적 사역이 비로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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