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소에서 깬 자가 아닌 처소에서 잠든 자
오늘 우리가 직면한 세상은 메신저들이 “자기 처소에 드러눕는 시대”이다. 엘리는 자기 처소에 몸을 눕혔다. 사람이 낮에 일하고 밤에 잠자는 것은 당연하다. 육신이 피곤하면 자리에 드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깨어 불을 밝혀야 할 비상한 시기에 지도자가 잠자리에 누워 잠을 청한다면 절망적 시대 상황을 벗어나기 어렵다. 엘리는 잠을 이겨야 했다. 그토록 긴 동면의 상태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소위 영적 지도자요 시대의 등불로 자처했던 그만은 깨어 있어야 했다. 밤이 깊고 새벽이 가까웠으니 침소에서 몸을 일으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지사가 아닌가! 뒤늦게라도 일어나 성전의 하나님께 달려가야 했다. 메신저는 일어나 혼돈의 세상 한 가운데로 내달려야 한다. 달리면서도 서판에 기록된 묵시의 말씀을 읽어야 하는 것이 대언자, 전령(herald)의 운명이다. 부지런히 달려야 먼저 길을 떠난 아합을 앞섰던 엘리야처럼 선두권을 탈환할 수 있다. 이 질주는 소위 성공이나 명성과 거리가 먼 시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함이요 우둔한 지도자를 일깨우기 위한 달음박질이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의 인간이 절망의 인간으로 변질된 것은 크나큰 비극이었다. 엘리의 어두워진 눈과 잠든 모습은 깊은 절망이었다. 그것은 소망의 등대가 무너져 내린 것과 흡사했다. 희망의 실이 끊어진 절망이요, 소망의 언덕에서 굴러 떨어진 낙망이요, 소중한 것을 잃어버린 실망 그 자체였다. 말씀이 희귀해지고 이상이 흔치 않은 시대에 절망할 수밖에 없었던 이스라엘 백성은 희망의 상징이었던 엘리 제사장의 변질로 인해 또 한 번 깊은 절망을 경험해야 했다. 그것은 믿고 의지했던 지도자로 인한 절망이었기에 그 아픔의 강도는 매우 컸다. 어느 곳에서도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없었고 여하한 해법도 없었다. 사무엘이 새로운 지도자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기 전까지 엘리를 대체할 인물은 전혀 나타나지 않았다. 깊고 음산한 밤의 기운만이 온 이스라엘을 뒤덮고 있었다.
엘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점차로 눈이 어두워져갔고 보행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것은 노령에다 거구의 몸집을 하고 있었기에 어쩌면 불가피한 현상일지 모른다. 사실 피곤해서 잠시 쉬는 것이야 큰 문제가 될 리 없다. 그러나 당신은 엘리가 ‘자기 처소에 누웠다’는 표현을 깊이 음미해야 한다. 그가 지닌 사역의 중요성으로 보나 이스라엘이 처해 있던 위기 상황으로 보아 그에게 합당한 표현은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가 아니라 “그가 하나님의 성소에서 깨어 있었고” 정도는 되어야 했다. 위기에 처한 나라를 걱정했다면 성소의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기도로 밤을 새우며 하나님의 뜻을 묻고 도움을 구해야 옳았다. 엘리는 깨어 있어야 할 상황에 잠들어 있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하신 하나님의 다급한 심정을 헤아리지 못했다. 안타깝게도 엘리의 잠든 영혼이 피곤한 그의 육신을 더욱 깊은 잠으로만 몰아넣었다. 영혼과 육신이 혼곤함에 쩔어 있었다.
엘리는 깨어 있어야 할
상황에 잠들어 있었다.
시대의 불을 밝힐 자가 처소의 등불 아래 묻혀
한 마디로 엘리는 서서 행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깨어도 그는 의자에 자신의 무거운 몸을 의지해야 했고 잠이 오면 성소의 뜰을 벗어나와 곧장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성소에서의 사역은 더 이상 그에게 있어 별 의미를 주지 못했다. 그것은 단지 의례적이고 직업적인 일상에 불과했다. 감격이 있을 리 만무했고 타성에 젖은 그의 직무는 백성들의 무관심 속에 묻혀가다시피 했다. 언제부터인가 엘리는 영적 민첩함을 잃었고 직무 수행에도 참신함이 사라졌다. 한 때 젊은 엘리는 깨어 있기에 능한 사람이었으나 이제 늙은 엘리는 잠의 유혹을 견디지 못했다. 성소에서 늘 서서 행하던 사람이 의자에 앉거나 처소에 눕는 사람으로 변모했다. 어두운 시대에 하늘을 살펴 땅의 삶을 예견하던 하나님의 사람이 성소가 아닌 자기 집에 두 발을 뻗고 누웠다. 깨어서 시대의 불을 밝혀야 할 그 시간에 그는 편안히 육신을 다독이고 있었다. 잠자리에서 그가 바라본 것은 자신을 덮고 있는 무거운 이불이었지 밤하늘을 밝히는 가벼운 달빛이 아니었다. 자기 처소의 기름등잔에서 발산하는 안락함의 인공적 빛으로 인해 자연의 빛도, 영광의 빛도 그에게서는 멀어져갔다. 성소의 빛을 외면한 그에게 남은 것이라곤 어둠과 깊은 잠뿐이었다. 잠이 깊어갈수록 그의 영혼을 지탱하던 빛은 사그라져갔다.
이 시대 형편은 엘리 당시의 이스라엘이 직면한 상황보다 나을 것이 없다. 총체적으로 영적 난국의 처지이다. 수면을 줄이고 경성해야 할 위기의 때라는 말이다. 심판의 화살 시위 소리가 들려오고 종말을 앞당기는 시대의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있는데 진리의 고수(鼓手)가 북채를 놓고 있을 순 없다. 난세가 따로 없다. 태평성대에는 어진 왕이 백성의 마음을 어루만져도 난세에는 간웅들이 활개를 치거나 영웅들이 할거(割據)한다. 당신이 경성하긴 해도 시대를 깨우치고 군중을 선도하며 거대한 물줄기를 되돌려 놓는 일에 팔짱을 낀다면 영웅의 길에선 한참 멀다. 영웅의 깃발이 펄럭이면 방황하던 군중들이 그 깃대를 향해 몰려든다. 각성된 지도자는 다수가 깊은 잠에 들었을 때 숱한 밤을 지새우며 희망의 불씨를 지켜냈기에 가능한 일이다. 다른 이들보다 먼저 깨어났고 아예 잠들지 않는 밤도 많았다. 엘리는 이런 지도자의 길에서 역주행을 지속했다. 많이 잤고 늦게 눈을 떴다.
엘리는 깨어나야 했다. 아니 아예 잠들지 말아야 했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찾던 바로 그 밤에는 잠자리를 찾지 말아야 했다. 적어도 그날만큼은 성소에 더 오래도록 머물러 있어야 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찾을 때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자로 남아 있어야 했다. 누워도 하나님의 성소에 자리를 눕혀야 했다. 그가 성소에 누웠던들 그 역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것이다. 그는 누워서 기도하지 않았다. 깨어서조차 기도하지 못했던 그였기에 누운 상태에서도 기도할 수 없었다. 누워서 그가 구한 것은 깊은 잠이었다. 기도가 허물어진 자의 잠에는 징조 있는 꿈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엘리가 비록 늙기는 했어도 자신과 조국이 처해 있는 현실을 전혀 모르지는 않았다. 자신의 시대가 처해 있는 절망적인 상황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다. 40년간의 사사 직을 수행하면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역사와 이스라엘 백성들의 행태를 그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던 그가 조국의 위기를 밝히 알았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변화가 두려운 안전제일주의자이며 온건주의자 엘리
첫 사사로부터 마지막 사사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늘 동일한 패턴을 따라 순환되었다. 사사의 구원과 태평성대, 안일 속에서의 반역과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 고난 속에서의 민족적 회심과 새로운 사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 이것이 사사 시대를 특징짓는 역사의 고리였다. 엘리는 사사로서의 마지막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을 직면하고 있었다. 늙은 사사 엘리는 초창기의 헌신과 용맹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심판만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는 더 이상 이스라엘의 구원자가 아니었다. 엘리는 조국이 처한 위기 상황을 호전시킬 수 없다는 자신의 한계성으로 인해 괴로워했을 것이다. 엘리는 도망가고 싶었을 것이다. 깨어있어야 하는 상황이 싫었을 것이다. 사역과 삶의 모든 상황이 통째로 힘에 부쳤던 것이다. 지도자로서 담당해야 할 영적 짐과 정신적 부담감과 육신의 피로를 한시 바삐 털어내고 싶었을 것이다.
깨어 있어야 할 위기의 순간에 잠자리를 찾았던 엘리는 부끄러운 당신의 모습이 아닌가? 당신은 쉬어야 할 시간에 깨어있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은 모든 것이 적당한 선에서 유지되며 지탱되기를 바라는 온건주의자이다. 거대 선박의 완만하고 여유 있는 선회를 원하지 쾌속정의 급선회 같은 것을 원치 않는다. 급격한 변화를 두려워하는 당신의 안전제일주의가 시대의 갱신이나 인간성의 극적 반전을 명하시는 여호와의 뜻을 거부한다. 그래서 택하는 것이 누워 잠드는 엘리의 등 돌림이다. 깰 때 깨어야 할지라도 자야 할 때 잠드는 것이 순리라 주장하면서 말이다. 엘리의 분신인 당신도 그렇게 뇌까리며 잠을 청한다. 당신은 잠들기를 좋아하며 깨어 있기를 즐거워하지 않는다.
자기 처소에 누움은 이기적인 사람이 찾는 마지막 시도이다. 이기심은 모든 것을 자기 본위로 축소시키고 자신에 속한 것을 무한히 확대시켜나가는 마음의 태도이다. 자신의 뜻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두 눈을 부릅뜨지만 자신과 무관한 일에 대해서는 부러 외면한다. 못 본 체 하여 눈을 내리깐다. 방관과 무관심으로 일관한다. 슬프게도 하나님을 위하고 모두를 위하던 사람 엘리가 자신만을 위하는 이기적 인간으로 변질되었다. 하나님을 위하고 모두를 위하던 성소에서 하나님과 모두를 위하던 제사장직의 수행이 이기적 인간으로 전락해버린 엘리에게는 이미 버거운 짐이 되었다. 엘리의 주된 공간은 성소에서 자기 처소로 뒤바뀌었다. 영적 전진을 포기하고 뒷걸음질 친 공간 이동이었다.
엘리의 주된 공간은 성소에서
자기 처소로 뒤바뀌었다.
엘리는 서서 할 일을 찾지 못하자 누워 쉬기를 청했다. 누우면 행동반경이 축소되고 고정되어버린다. 그것은 죽은 시체가 차지하는 공간과 별반 다르지 않다. 엘리가 잠든 처소는 그의 죽은 영혼이 안치될 영안실 같았다. 엘리가 깨어 있을 때, 그가 늘 서서 성소의 구석구석을 살필 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구원을 즐거워했다. 적들은 안절부절못했고 원수의 세력들은 기를 펼 수 없었다. 하나님의 공의가 때를 따라 내리는 빗줄기처럼 백성들 삶의 지경을 적셨으며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의 마음과 생각 저변까지 가득했다. 골짜기에는 곡식이 가득했고 황량한 사막에도 샘물이 흘러넘쳤다. 그때에는 피곤한 육신을 자리에 눕혀야 할 시간에도 엘리는 깨어있기를 즐겨했다. 거룩한 일이, 하나님의 뜻을 이룩하는 일이, 백성들의 삶을 살피는 일이 더 중요했고 긴요했으며 즐거웠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엘리는 하나님의 기쁨이요 이스라엘의 축복이며 엘리 자신의 흔들림 없는 자존감이었다. 그때의 엘리를 회상하면 할수록 현실의 엘리는 슬픔이요 수치가 아닐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