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63)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하나님은 절망의 시대에서 희망의 시대를 계획하신다. 절망의 인간들을 뒤로 하고 희망의 사람을 앞세우신다. 세상에 하나님의 사람이 사라진다면 낙원 같은 환경일지라도 세상은 절망의 장소로 화해버릴 것이다. 모두가 잠든 밤에 하나님이 은밀하게 부르는 대상이 바로 하나님의 사람이다.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이상이 흔치 않은 시대에 꿈을 꾸고 이상을 보는 자가 하나님의 사람이다.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밭에 감추어진 보화처럼 흔치 않은 하나님의 사람은 참으로 존귀하고 보배롭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한 사람이 있다면 세상에는 아직도 희망이 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람을 하나님이 손수 부르시는 한 희망의 소리는 세상을 뒤덮은 온갖 절망의 함성도 잠재울 수 있다.

 

성소에 누운 사무엘이 희망이다.

여호와의 전 안에 누운 사무엘이 희망이다. 모두가 자신의 집에서 잠자리를 준비하고 있을 때 소년 사무엘은 성소에 몸을 눕혔다. 엘리마저 성소를 벗어나 자신의 처소에 몸을 누일 때 사무엘은 성소에 마련된 자신의 공간을 지켰다.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법궤가 모셔진 그 가장 거룩한 곳을 숙소로 삼은 사무엘이야말로 절망의 암세포를 제거하는 대식 세포 같은 존재였다. 옛적 믿음이 기억나지 않는가? 학교가 끝나고 직장을 파한 후에 집으로 가기 전에 교회를 먼저 찾았다. 철야! 요즈음 같은 심야기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철저하게 밤을 새는 철야로 기도에 몰입했다. 영적 훈련을 위한 기도가 아니라 사뭇 주님이 그립고 마음이 뜨거워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 수면 부족으로 늘 피곤하고 힘겨웠지만 마냥 기도하는 것이 즐거웠고 그 시간이 사무치게 기다려졌다. 그 때엔 한국 교회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그랬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는지 모를 정도로 이미 깊은 절망에 익숙해져 있었다. 절망을 인식하지 못한 그들이었기에 희망의 필요를 느낄 수조차 없었다. 이스라엘은 희망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오래 전부터 잊고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들의 하나님을 잊어버린 그 순간에도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잊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자신에게서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처절한 절망을 보셨다. 멸망과 심판으로 완전히 빠져들기 전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위해 무엇인가 준비해야 했다. 이스라엘의 등불과 희망으로 세웠던 엘리는 이미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새로운 희망을 위해, 새로운 출발을 위해 한 사람을 섭리 가운데 준비하셨다. 그가 바로 사무엘이다. 하나님은 절망의 시대에 절망할 수밖에 없던 자기 백성들 속에서 사무엘을 희망의 전조로 여기셨다. 사무엘의 존재는 그야말로 절대 절망을 깨뜨릴 수 있는 절대 희망이었다. 절망을 비웃는 희망의 하나님께서 소년 사무엘을 희망 없는 시대에 희망 중의 희망으로 준비하셨다. 그리고 때가 되자 자신이 준비하고 기르시던 소년 사무엘을 절망의 환경에서 불러내셨다. 그를 희망의 횃불로 타오르게 하셨다. 절망의 벼랑 끝에서 끝없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시대를 희망의 끈 삼은 사무엘로 붙들게 하셨다.

그는 새 역사를 위해 잉태된 시대적인 생명체였다. 기도하던 여자 한나의 울먹임 속에 배태되었던 소망의 씨앗은 그렇게 세상에 드러났다. 아이 사무엘은 한나의 서원을 따라 젖 뗄 무렵 하나님께 바쳐졌고 성소에 기거하면서 절망의 시대에 절망적 인간 군상들 중에 희망을 바라보며 소망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는 엘리의 그늘에 묻히지 않고 주님이 찾으셨단 바로 그 엘리”, 곧 야웨 하나님의 옷자락에 묻혔다. 늙은 엘리의 변질된 현재가 아니라 참신했던 젊은 날의 엘리에게서 사사다움과 제사장다움을 익혔다. 그의 과거를 정면교사 삼고 그의 현재를 반면교사 삼으면서 사무엘은 미래의 일군으로 진보해갔다. 참으로 사무엘은 새로운 희망의 불씨로 자라갔다.

누워도 여호와의 전에 누워야 한다. 어둠 속에 잠길지라도 여호와의 등불이 아른거리는 거룩한 그림자에 휩싸여야 한다. 성소의 등불로 인한 그림자는 어둠이 아니었다. 그것은 강렬한 빛과 빽빽한 어둠을 중화시키는 가교와 같았다. 성소를 환하게 밝힌 등불을 보며 사무엘의 영혼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스라엘을 밝힐 거대한 횃불로 형성되고 있었다. 교회와 연관된 어두운 이야기들과 일부 성직자들의 파행적 모습,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지도자들의 일탈적 행동이 구설수에 올라 그것들이 세상의 어두움에 편승하여 영광의 빛을 가릴 때 빛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은 수치를 당하신다. 그렇다 해서 떠나거나 외면할 수 없는 것이 교회이다. 덕지덕지 달라붙은 흑암의 외피들을 하나둘 벗겨내어 교회가 지닌 본연의 빛을 드러내야 하는 것은 빛의 자녀들인 신자들이다. 공동체의 일원이기에 도매금으로 싸잡아 도리질당해도 어둠의 세력에 굴복할 수 없는 것이 신자의 본성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교회는 최후의 피난처이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지금은 자다가 깰 때이다. 잠들 때가 아니다. 깨어 생명과 구원, 진리와 희망의 불빛을 밝혀야 할 때이다. 정히 졸리면 몸을 자신의 처소가 아닌 성소로 향해야 한다. 쓰러져도 성소의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잠들어야 한다. 다수의 교회가 영적 미지근함으로 광채를 잃고 가물거리며 명멸하는 처지에 놓일 때 소수의 교회만이라도 보존된 불씨를 되살려 불꽃을 일으켜 그것이 주변을 삼킬만한 거대한 불길로 번지기까지 포기하거나 물러서지만 않는다면 교회는 얼마든지 새로워질 수 있다. 그런 뜻으로 실제로 행하기란 힘겹고 두려운 일일 수도 있다. 불가능해도 시도해야 옳다. 익숙한 잠자리를 거부하는 불편함에의 의지만 확실하다면 세상이 천 길 낭떠러지 끝에 매달린 형국이 된다 해도 희망의 노래를 읊조리게 만든다. 희망이 있으면 작은 티끌에서도 웅장한 산의 자태를 본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성전을 떠나지 않았다. 일과 잠을 구별할 수 없을 만큼 사무엘은 거룩한 일 배우기를 즐겨했다. 그는 성소에서 깨어나 성소에서 일하고 다시 성소에서 잠들었다. 그의 활동 반경은 성소 안에 국한되었지만 성소의 사람 사무엘은 하나님 안에서 온 우주를 품는 원대함을 키웠다. 사사로서의 식견과 제사장으로서의 배움을 부지런히 갈고 닦았다. 당신이 교회 안에 웅크려 기도와 말씀으로 영혼의 광도(光度)를 키우는 것은 너른 세상을 향해 진군하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과정이기 때문이다. 힘찬 도약을 위해선 더욱 바짝 엎드려야 한다. 비출 빛이 없이 어둔 세상에 대항해보았자 금세 흑암에 함몰되어버릴 것이기에 그렇다. 소금이 본래의 짠맛을 잃어버리면 발에 밟힐 뿐이며 광도를 잃은 등잔은 버려진다.

그의 활동 반경은

성소 안에 국한되었지만

성소의 사람 사무엘은

하나님 안에서

온 우주를 품는 원대함을 키웠다.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성소를 지킴이다.

당신 자신을 성소 지향적이 되게 해야 한다. 해바라기가 해를 바라보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성소에 당신의 삶과 사역 방향을 정하고 태양을 따라 도는 행성들처럼 그렇게 매사에 성소를 중심삼아야 한다. 어느 방향에서 바라보아도 하나님이 당신 존재의 목적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 한다. 형통의 방향에서도 하나님이 중심이 되고 고난의 방향에서도 하나님이 중심에 계셔야 한다. 하나님이 당신 삶의 중심이 되기만 하면 형통과 고난 자체는 별 의미가 없다. 당신은 환경의 변화에 따라 울거나 웃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 만족을 누릴 수 있다. 교회가, 교회의 주님이 당신 삶과 사역의 중심점임을 명심하라!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이 어디에서 바라보아도 그들 삶의 중심이었다. 당신이 세상을 향해 진군할 수 있음은 당신의 존재 기반이 성소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성소 안에 제한을 당하는 만큼 당신의 영혼은 성소 밖의 세상에서 무제한으로 자유하다. 태양을 쫓아가는 해바라기처럼 하나님을 초점 삼은 당신의 의지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영혼의 따스함으로 넉넉히 작용할 것이다. 당신의 학습과 삶의 모든 동정은 성소에 매여 있다. 성소 안에서 배움으로 성소 밖에서 익힐 수 있다. 성소 안에 누움으로 성소 밖을 거닐 수 있다. 성소는 하나님 임재의 곳이다. 성소에는 시대를 일깨우는 사역 원리가 있고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원천이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경륜과 섭리가 있다.

오늘 당신에게 있어 성소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교회 중심의 삶을 사는 것이 당신의 생존을 희망 속에 거하게 만든다. 또한 그의 사랑이 뿌리내린 가정이다. 주님을 모신 거룩한 가정으로 가꾸어가는 것이 온 가족들의 희망을 키우는 길이다. 나아가 그의 뜻이 구현되어야 할 삶의 구체적인 정황이다. 하나님 앞에 서 있는 단독자로서 책임 있는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당신의 희망을 보존하는 길이다. 오늘 당신에게 있어서의 성소는 모세가 광야에 세웠던 성막도, 솔로몬의 웅장한 성전도, 에스겔의 환상 속에 그려진 신비한 성전도 아닌 바로 당신 삶의 현장이다. 거룩한 영향력이 미치는 삶의 뚜렷한 공간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능력으로 역사하는 삶의 현실이다.

그렇다면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성소를 지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족의 일원으로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하나의 영적 실존으로서 주어진 삶을 성실하게 사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의 내용이 성소 안에 몸을 눕혔던 사무엘의 전부라 할 수 있다. 당신은 성소를 찾기 위해 실로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을 서두를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임재 의식을 느끼며 성령과의 거룩한 합일 속에서 영적 해후를 이룩하는 삶의 장이 주어진다면 어디에서라도 자리를 잡고 뿌리내려야 한다. 그곳을 발판 삼아 진실한 삶을 일궈나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인간다운 삶의 현주소, 거기가 하나님이 머무시는 곳으로서의 성소이다.

삶의 자리를

떠나지 않는 것이

성소를 지킴이다.

대단한 능력을 보이고 신비로운 경험을 보이는 것이 아니다. 가정과 일터를 버리고 교회에서 사는 것만이 성소를 지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더욱 바르고 옳다. 하나님이 지으신 한 사람의 피조물로서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거룩한 삶의 실체는 인간적인 평범함에 있다. 능력의 극치는 평범해짐에 있다. 비범함에도 불구하고 비범함이 뛰쳐나가려는 것을 누르고 평범함을 내보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는 자와 함께 울고 웃는 자와 함께 웃는다.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기 위함이다. 주님이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사실 이것이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비범함을 이루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비범해졌다 다시 평범해지려면 더 많은 시간을 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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