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66)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설교자는 탁월함을 추구해야 한다. 이는 반드시 탁월한 설교자가 되어야 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탁월한 설교자의 당위성보다는 탁월함을 추구하는 학습자로서의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 표현이다. 설사 탁월한 설교에 미치지 못하고 탁월한 설교자의 반열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한 사람의 정직한 설교자로서 탁월함에 초점을 맞춰 분투노력하는 한 그는 훌륭한 설교자이다. 이런 의지와 애씀 없이 적당한 수준에서 만족한다면 하나님의 대언자, 진리의 메신저로서는 부족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수준을 획득해야 하나님도 최고의 역사를 행사하실 수 있다. 설교자는 그릇이다. 그릇이 스스로의 품격을 높여야 내용물도 달라진다. 질그릇과 금그릇에 담기는 내용물이 같을 수는 없다.

위대한 설교자라 칭함 받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기까지 스스로를 갈고 닦았다. 헬라 최고의 웅변가를 꿈꿨던 청년 데모스테네스는 첫 대중연설에서 심한 야유를 들으며 좌절감을 맛보았으나 포기하지 않았다. 말더듬이로서 결정적 약점을 지니고 있던 그였지만 이를 악물고 자신의 핸디캡을 극복해나갔다. 해변을 찾아 태양을 향해 크게 외치며 입에는 한 줌의 자갈을 물고 이빨 사이에 칼을 끼우고는 피나는 훈련을 지속했다. 그 결과 그는 역사상 가장 뛰어난 웅변가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이는 단순히 선천적 장애를 극복하고 기술을 익힌 인간 승리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그의 후일담이 아름다운 것은 한계 극복에 전력투구한 그의 철석같은 의지에 있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영광의 메신저의 경우야 말해 무엇 하겠는가?

위대한 설교는 하나님과 인간의 합작품이다. 하나님이 시동을 걸지만 인간이 운전대를 돌려주어야 성령이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이끄신다. 인간의 사역이 있는 곳에는 성령의 역사 또한 있다. 설교는 영혼을 놓고 사탄과 줄다리기를 하는 영적 전투이다. 전쟁은 포괄적이지만 전투는 매우 급박한 현장이다. 한눈을 팔 틈이 없다. 어조는 단호하고 표현은 분명하며 내용의 무장 능력은 완벽하고 탄탄해야 한다. 성령의 권위로 선포하지만 보이지 않는 사탄과의 전투에서 공수 교환이 적시에 이루어져야 하고 판세도 정확히 읽어야 한다. 가벼운 잽으로 견제하다 강펀치도 날려야 하고 사탄을 무력화시킬 일격 필살의 주 무기도 갖추어야 한다. 설교에는 설교 투라는 것이 있다. 이는 평소와 다른 어조를 말한다. 인위적으로 조작한 어조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이 실린 어조는 그때그때마다 터져 나온다. 때에 맞는 어조는 감정을 격발시키고 청중의 완고함을 무너뜨리는데 결정적인 한 몫을 한다.

 

남의 수원지를 엿보지 말고 자신의 수원지를 확보하라!

거듭 강조하지만 누구를 닮으려 하지 말라! 닮으려 애를 쓰는 만큼 하나님이 주셔서 그렇게 될 자신의 모습은 점차로 멀어진다. 메신저는 나 자신일 때 가장 큰 능력의 역사가 뒤따른다. 당신이 소위 주목 받는 메신저를 닮으려 애쓰는 한 당신은 설교자로서 진보를 이루기 어렵다. 내용을 완전 카피해도 삶과 인격을 닮기 어렵고 어투와 표정을 부지런히 익혀도 동일한 분위기를 자아낼 수 없다. 모방은 창조 행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의 학습법이다.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고 강점을 부각시키며 단점을 보완하고 장점을 극대화시키는 편이 훨씬 낫다. 설교자가 닮고 따를 분은 오로지 주님 밖에 없다. 인기 있는 설교자를 본뜨기보다 도리어 복음서를 통해 주님의 메시지 전달을 주시하라! 세례요한을 본받고 예언자의 어투를 본받아라! 여기에서 어투란 소위 인위적으로 거룩하게 음조를 만들어 내는 것(holy voice)이 아니다. 예언자의 어투란 목청이 아니라 무릎에서 나온 음성이다. 그들은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가공하지 않고 그대로 전했기에 실질적인 음성의 고저강약이 조화로웠다. 웅변조가 아니어도 위대한 웅변을 능가했고 현란한 수사학과는 거리가 멀어도 심금을 울리는 생동적 표현이 꿈틀거렸다.

설교자의 말씀이 살아 역사하려면 선포한 말씀이 자신의 삶에서 흘러넘쳐야 한다. 갈릴리의 물을 받아들인 사해는 내보내지 않음으로 죽은 바다가 되었다. 반대로 요단강은 받아들이는 만큼 흘러 보냈다. 흘러넘치면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린다. 설교의 능력은 현장에서 증거 되는 실천적인 삶의 능력이다. 청중은 귀로 들은 말씀을 기억의 창고에 담고 눈으로 본 말씀을 마음의 금고에 담는다. 설교자의 인격은 자신이 살아 보인 말씀으로 측정되기에 실천적인 말씀이야 말로 진정한 말씀의 육화(肉化, incarnation))라 할 수 있다. 구체적 삶으로 자신의 전하는 바를 뒷받침하지 않는 설교는 공허하기 짝이 없다.

말씀이신 하나님은 주님의 인격 속에 육화되고 그분이 선포하여 들려주시고 삶으로 보여주신 말씀은 제자들의 순종하는 삶에서 다시 분명한 모습으로 육화된다. 설교자는 주님의 말씀을 육화하는 선두주자여야 한다. 쉼 없이 육화하는 말씀으로 인해 신자는 오늘도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의 권위를 인정한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설교는 전인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선포하고 살아감으로 증명된다. 말씀이 말씀답게 역사할 길은 달리 없다. 말씀이 역사하면 먼저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고 뒤따르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어둠이 걷히고 사탄의 기가 꺾이며 인간의 문제들엔 해결의 서광이 비친다.

언어의 공교함을 버리고 말씀의 권세를 힘입어라!

대언자가 말씀을 붙들고 말씀에 붙들려 살면 세상에 두려운 것 없고 부러운 것도 없다. 말씀으로 충만하면 전천후의 대언자가 된다. 말씀의 강자가 최강자이다.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새벽이슬처럼 하늘의 메시지가 임한다. 진리의 성령과 교통 되면 수도꼭지를 틀자 항상 물이 쏟아지듯 그렇게 말씀의 진리가 임한다. 수원지의 물은 마르지 않는다. 말씀의 수원지는 영원한 샘터다. 사람들은 늘 생수를 갈급해한다. 수도꼭지도 이상 없는데 물이 나오다 막히면 수도관의 어딘가 막혔다는 증거이다. 막힌 곳을 뚫거나 아니면 관 자체를 교체해야 한다. 관의 교체보다 수월할 것은 막힌 곳을 뚫는 공사이다. 당신이 말씀에 막히면 관이 막힌다. 당신의 말씀 생활이 지속적이고 진지하지 않으면 관에 부식물이 생기거나 혼잡물이 섞인다. 이 상태를 방치하면 오래잖아 관이 막혀버린다. 막힌 말씀을 소리높이 외쳐도 허공을 치는 메아리처럼 빈 소리만 울린다. 대언자 자신의 마음을 때리지 않는데 청중들의 영혼에 가 닿을 리 없다. 심판 날에 알곡 추수할 때면 공허했던 쭉정이의 실상이 낱낱이 드러난다.

청중의 마음 상태가 길가, 돌밭, 가시덤불, 옥토로 구분되듯 대언자의 영혼도 마찬가지이다. 말씀을 전하기 전에 사탄이 생명의 메시지를 거둬간다. 메시지 없는 대언은 청중의 귀에 들려도 마음까지 연결되지 않는다. 마음에 떨어져도 생명 없는 메시지이기에 감흥만 일으킬 뿐 감동이 없다. 설령 감동을 일으켜도 지속적이지 못해 금세 사라진다. 대언자는 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전하고 허기진 영혼들에게 생기를 불어넣는다. 십자가를 전하는 대언자의 마음에 헛된 생각이 있는데 십자가가 영혼에 어른거릴 수 없다. 대언자가 십자가에 죽은 자가 되어 십자가의 죽음을 전하지 않는데 어찌 청중이 자기를 죽음에다 넘겨줄 수 있겠는가?

주님의 말씀이 능력이었음은 말이 곧 삶의 증거였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대언자의 삶을 살핀다. 대언의 내용과 삶의 일치 여부를 확인하기 원한다. 대언자가 말쟁이인지 실천가인지를 보고 싶어 한다. 말씀에 정통하다 함은 그 말씀을 연구하고 준행하여 삶과 일치를 이루었을 때를 의미하며 그런 상태에서 전하는 가르침에는 설득력이 있다. 이성적으로 수용하고 신앙적으로 확신한다. 필요하다면 표적과 기사가 말씀을 뒤따르도록 하신다. 이것이 산 말씀이다. 모든 설교자는 학사겸 제사장이었던 에스라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적당히 본받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본받기를 애쓰라!’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7:10) 연구과 가르침 사이에 존재하면서 둘을 이어주는 것이 준행이다. 실천적인 삶이 연구를 빛나게 하고 가르침에 능력을 제공한다. 학사로서 제대로 연구했고 제사장으로서 실천력을 키웠기에 그가 전한 말씀은 역사상 가장 놀랄만한 부흥의 시대를 도래케 하였다.

바울은 능력의 대언자였다. 그는 세상적인 관점에서 지혜의 왕자였다. 당대 최고의 지성인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율법에 정통한 박사였다. 당시 인구의 소수를 차지하고 있던 7,000명의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었다. 그러한 그의 메시지에는 지혜의 권하는 말이 없었다.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이 특색을 이루었다. 언어의 공교함이 아니라 말씀의 권세가 남달랐다. 마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교훈과 현격한 차이를 보였던 주님의 권세 같았다. 바울의 대언이 독특한 것은 형식이 아니라 내용에 있었고 메시지 자체보다 대언에 따르는 성령의 역사에 있었다. 그것은 꼭 성령의 은사에만 국한할 이유가 없다. 어쨌든 바울의 메시지는 영적 현상이든지 심령의 극적인 변화이든지 청중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켰다. 바울의 대언에는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청중의 믿음이 지혜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에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당신의 믿음이 대언을 통한 지혜의 말씀에 영향을 받는가? 아니면 성령의 권능에 통제받는가? 대언을 통해 유익한 정보(information)을 얻는가? 아니면 심령의 변화(transformation)를 경험하는가? 대언자도 청중도 모두 정신 차려야 한다. 왕의 전령! 주님의 대언자! 하나님의 전권 대사! 참으로 존귀한 칭호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말씀 사역자들이 고려할 점이 있다. 말씀 선포를 들을 자가 누구인지? 말씀 선포의 내용이 무엇인지? 말씀 선포의 자세가 어떠해야 하는지? 말씀 선포에 대한 청중의 반응이 어떨지? 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말씀을 선포하기에 앞서서 이토록 세밀하게 준비하고 신중함을 잃지 않는다면 말씀의 역사 또한 더욱더 강력할 것이다. 무턱대고 전하는 것보다 사전 준비를 통해 마음가짐을 추스르는 것은 권장할만한 일이다. 에스겔 선지자의 경험은 이 점에 있어 좋은 실례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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