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64)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희망의 해오름 같은 하나님 음성

여호와의 전은 당신 사역의 터전이면서 삶의 중심이다. 그 옛날 성전이나 성소처럼 당신에겐 움직이는 성소와 움직이지 않는 성소가 있다. 이는 지역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를 일컬음이다. 하늘 성소의 그림자인 지역교회에는 하나님을 향한 예배와 찬양이 있고 헌신이 끝없이 이어지는 축복의 공간이다. 또한 거룩한 영을 모신 당신의 몸이 그분의 성전이다. 하나님의 성령이 당신의 육체 밖에 거하지 않고 당신 몸 안에 거하면서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유념해야 한다. 거룩한 임재의 충만함 속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새벽을 깨우듯 그런 마음가짐으로 삶의 현장에 자신을 눕혀야 한다. 현장과 무관한 임재는 생활신앙에는 무의미하다. 주님의 충만한 임재와 성령의 내주를 느끼며 살아감이 중요하다. 일도, 쉼도 당연히 주님의 품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성령의 전으로서 몸은 어떤 경우에도 거룩과 순결을 보존해야 한다.

당신이 지나치는 모든 곳이 성소로 변하게끔 거룩한 발자취를 남기도록 하라! 아브라함이 종과 횡으로 밟은 모든 땅이 복지로 화했듯이 그렇게 전후 사방을 성역화 시키는 당신의 삶이 되도록 거친 삶의 현장에 믿음의 발자국을 내디뎌야 한다.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이듯이 동서남북 어디든 당신의 손발이 스친 곳마다 주님의 체취(體臭)를 풍겨야 한다. 이런 모습이 성화된 영역에서 땀 흘리고 구별된 땅에서 얻는 당신의 안식이어야 한다. 그런 당신에게 희망의 소리가 들린다. 사무엘에게 들린 하나님의 소리가 희망의 속삭임이었다. 평소처럼 어둡기만 하던 그 밤, 한 소년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성소에 몸을 의탁한지 꽤 오래되었지만 사무엘은 지금까지 한 번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다. 한밤 중 엘리의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익숙하게 살아왔던 사무엘로서는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당연히 엘리일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엘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존중하며 어려서부터 섬겨왔던 사무엘은 부름을 듣자 평소처럼 엘리에게 수종 들고자 엘리의 처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목소리였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본 지 오래 되었던 엘리 역시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했다. 그만큼 엘리의 영성은 마비되어 있었다. 두 번째에 이르러서야 그것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인 걸 깨달았다. 그래서 세 번째 사무엘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면 어떻게 할 것을 지시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엘리로서는 절대 절망이었겠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사무엘에게는 말로 다할 수 없는 영광중의 영광이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에 걸쳐 알아듣지 못하는 사무엘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부르신 것은 하나님의 일관된 사랑이었다. 하나님이 그 밤에 사무엘을 부르지 않으셨다면 이스라엘의 등불은 더 이상 빛을 발하지 못한 채 새로운 지도자의 등장을 보기도 전에 이스라엘은 파국을 맞아야 했을 것이다.

가장 적절한 시기에 하나님은 자신이 세워 사용하실 새로운 지도자를 부르셨다. 때가 무르익자 성막의 밝은 불빛 아래서 하나님 섬김을 배워가던 어린 소년을 하나님이 손수 일으켜 세우셨다. 오랫동안 들을 수 없었던 거룩한 음성이 바로 그 밤, 그 성소에서 거듭해서 들려왔다. 성소의 소소한 일거리도 크나큰 정성으로 대했던 어린 사무엘에게 크신 하나님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작은 자를 크게 만들고 지상의 잡다한 소리들을 잠재우는 천상의 소리였다. 이 소리야말로 절망의 철문을 여는 희망의 열쇠였고 절망의 바다를 메우는 희망의 매립이었으며 절망의 어둠을 쫓아내는 희망의 해오름이었다.

땅의 엘리가 아닌 하늘 엘리의 음성을 들으라

거룩한 소리는 한 사람을 찾으셨다. 한 시대를 마감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한 사람을 부르셨다. 성소 안에서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을 느끼며 하나님을 부르던 한 소년을 호출하셨다. 부모로부터 떨어져 외로운 곳에서 하나님의 임재 경험을 다져가던 에브라임 산지 출신의 소년을 세상 밖으로 불러내셨다. 하나님이 사무엘을 부르는 그 순간부터 세상의 절망에는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40년간 혼돈의 세월 속에 갇혔던 자기 백성들이 비로소 운신을 하게 되었다. , 진정 그 밤의 소리야말로 만백성이 기다리던 희망의 소리였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시대에 하나님의 존귀한 소리를 들었다. 이상이 흔치 않던 시대에 실체보다 더 뚜렷한 하나님의 이상을 보았다. 어떤 어른들도 듣거나 보지 못한 그 소리와 이상을 어린 소년이 듣고 보았다. 그가 접한 소리와 이상은 이스라엘의 희망이요 다가오는 세상 역사를 구원하는 하나의 징조였다.

하나님은 오늘도 자신에게 속한 사람을 잊지 않고 부르신다. 자신에게 속한 사람을 부르시는 그 음성, 자신의 종을 찾으시는 그 소리가 있는 한 이 세상은 아직도 하나님의 안마당이요 성소의 드넓은 뜰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부르시는데 엘리처럼 들어야 할 자가 듣지 못한다면 기막힌 일이 아닌가? 우리는 소년 사무엘이길 원하며 사무엘의 흉내를 내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올 때는 엘리로 변신해버린다. 소년 사무엘의 마음에 자리한 늙은 엘리를 끌어내야 한다. 겉이 사무엘이면 속도 사무엘이 되어 사무엘을 찾으시는 하늘의 엘리(“나의 하나님”), 그분의 음성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그렇게 아담을 부르시고 아브라함을 부르셨다. 모세를 부르고 사무엘을 부르셨다. 하나님은 이 절망의 시대에서 절망으로 몸부림치며 울부짖는 신실한 종들을 또한 부르신다. 피리 소리와 애곡 소리에 맞추어 춤추며 가슴 치는 광대 같은 무리들을 부르신다. “아무개야! 아무개야!” 누군가를 부르는 한 소리가 메아리가 되고 산울림이 되어 천지의 모퉁이마다 진동시키고 우주 공간에 울려 퍼진다.

이 소리를 들어야 한다. 나를 부르고 너를 부르고 우리 각자를 부르시는 전능자 하나님의 호출에 가만히 귀 기울여야 한다. 자기 백성을 향해 장차 행할 일을 알리시는 소리를 접해야 한다. 듣는 자의 두 귀를 울리게 할 그 소리를 들어야 한다. 예언이 되고 경고가 되고 구원이 되고 심판이 될 그 소리를 놓치지 말고 들어야 한다. 죽어가면서도 이 소리를 듣고자 귀를 기울이려는 집념과 끈기가 메신저에게는 응당 있어야 한다. 당신은 과연 사무엘인가? 하나님께 바쳐진 자로서 자신의 처소가 아니라 성소에 눕기를 즐겨하며 세속의 즐거움보다 거룩한 일에 종사하는 기쁨이 뛰어나서 성소에 머물기를 사모하는 마음인가? 여호와 섬기기를 마음을 다하듯 하며 기도가 호흡처럼 자연스러운 그런 사람인가?

하나님께 세워지기까지 철저히 섬기는 종이 되어 배우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자신을 형성해가는 정성이 당신에게 있는가? 아무런 두려움이나 의심 없이 여호와의 음성 듣기를 기다리는 의지가 아직도 분명한가? 성소 안에 누운 사무엘이 진정 당신의 자화상으로 간주되는가? 아니면 성소 밖에 누운 엘리가 당신의 거짓 없는 모습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당신은 여전히 엘리의 모습을 하고 있진 않은가? 혹 반인반수(半人半獸, lykanthropos)처럼 한쪽은 사무엘이고 다른 쪽은 엘리는 아닌가? 사무엘이라면 기필코 엘리와 달라야 한다. 성소 안의 사무엘이라면 당신은 하늘에서 임한 소리를 간직하고 있어야 한다.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그 소리가 고막을 울려야 한다. 당신 자신이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한 소리를 들었다면 당신은 소망을 잃어버린 이웃들에게 희망의 소리를 전해줄 수 있다. 당신이 엘리가 아니라 사무엘이라면 절망의 세상은 희망의 노래를 다시 합창할 수 있다. 사무엘이 듣고 전하는 소리는 이 세상에 확실한 구원으로 역사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는 자가 이 시대의 희망이다.

오늘 하나님은 희망의 소리를 희망으로 들을 수 있는 사무엘을 찾으신다. 하늘을 가르고 산을 쪼개며 성소의 작은 처소에 이를 때까지 그 소리는 잠시도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종다운 종을 찾으시고 말씀을 나누고 싶어 하시는 절대자의 외로움이 그 소리에 배여 있다. 정답게 하나님과 밀담을 나눌 자는 아이라 해도 성소에서 부단히 하나님을 앙망하는 자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종들을 부르셨는지 모른다. 엘리도 하염없이 불렀을 것이다. 그러나 엘리의 닫힌 귀가 그토록 명확한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하게 했다. 지난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못했다. 엘리가 듣지 못했다면 아무도 듣지 못한 것이다. 사무엘은 막혔던 물꼬가 트이듯 하늘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또 하나의 새로운 시작이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듣노라!’는 이들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들었다는 하나님의 소리에는 하나님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권위가 없고 능력이 뒷받침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자신들의 마음으로 듣고 환청으로 들었을 뿐이다. 그들의 이율배반적인 삶이 하나님의 소리를 부정하게 만든다. 당신은 나와 함께 기도하며 부르짖어야 한다.

 

주님, 우리를 불러주십시오! 우리 각자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옵소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에 합당하도록 순하고 깨끗하게 만들어 주옵소서! 세상이 듣고 두 귀가 울릴 그런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심판과 구원의 메시지를, 위로와 권면과 경계의 말씀을 들려주십시오! 그래서 그 소리가 우리의 고막을 통하여 우리의 혀와 입술에 미쳐 세상에 외쳐지게 하옵소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되기 이전에 광야에 임했던 그 한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거짓을 산산조각 내는 진리의 음성을 들려 주옵시며, 지옥의 통곡소리를 잠재우는 천국의 환호를 들려주옵소서! 하늘의 음성에 민감한 사무엘의 두 귀를 주옵소서! 우리 속에 거한 엘리의 망령을 쫓아내 주옵소서! 저급한 영들과의 교통을 차단하여 주옵소서! 이 땅의 무수한 엘리들이 사무엘로 전환되게 하옵소서! 아니라면 그들이 사무엘의 의식과 영성으로 온전히 뒤바뀌게 하옵소서! 주님처럼 엘리 엘리를 부르게 하옵소서!

 

당신 자신이 희망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어느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부름을 듣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지옥 문턱에서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것이 곧 희망이다. 땅 끝의 절망 가운데 엎드려 있다 할지라도 소망의 하나님이 당신의 소망을 하늘에 쌓아 두셨다. 그분만이 당신에게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다. 절망하는 사람들은 그 상황을 소망으로 인내할 수 없어서 더욱 절망한다. 왜일까? 소망이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소망의 사람은 아직도 소망이 살아 있다. 소망의 사람은 절망에도 요동하지 않는다. 소망이 흔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영혼이 흔들리지 않도록 소망의 닻을 이미 주님께 내렸기 때문이다.

소망의 사람은 풍성한 소망으로 인내한다. 소망은 기다림의 다른 이름이다. 소망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인내로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희망을 잃어버린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의미에서 기쁜 소식이 되고 희망의 소리가 될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 빠져 있다. 절망의 심연에서 허우적거린다. 주위 사방을 살펴보아도 상처 입은 영혼들로 가득하다. 절망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은 희망의 인간이 되어야 한다. 좌절과 실의에 빠져 슬픈 눈물에 젖어 사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소리를 전해 주어야 한다. 당신이 사무엘 되는 삶이 곧 세상의 희망을 키우는 첩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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