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을 맑게 하는 말씀의 가격(加擊)

  • 입력 2021.09.15 22:00
  • 수정 2021.09.16 2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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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68)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영혼을 맑게 하는 말씀의 가격(加擊)

인간의 오만이 어디까지 영광의 말씀을 외면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한도 내에서이다. 인간의 완악함이 하나님의 의지를 꺾을 수는 없다. 갈 데까지 가면 변하거나 깨지고 만다. 강퍅함이란 마음이 굳고 굳어서 더 이상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는 최고 수준의 완악함을 뜻한다. 바로의 강퍅함을 통해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도 같은 길을 걸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계명 앞에서 순종과 불순종을 반복하다 패망하고 말았다. 소수의 남은 자는 그나마 순종의 걸음을 옮겼던 자들이다. 돌같이 굳은 마음의 소유자들이 권능의 말씀에 고꾸라져 고기같이 부드러운 마음의 소유자들로 변화되도록 애써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함은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을 길을 스스로 봉쇄하는 격이므로 자살자와 진배없음을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해야 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시편 말씀을 인용하여 그리스도인을 경계시켰다. 대언의 말씀을 들을 때 마음으로 하나님을 거스르지 말라는 경고는 성령의 음성이었다. 동일한 음성이 오늘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 광야에서 시험하던 날에 거역하던 것 같이 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3:7)

 

마음의 빗장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생명의 소리를 차단하는 것은 괜한 고집이요 비뚤어진 자존심이다. 죄가 주는 묘한 쾌락에 길든 영혼은 생명으로 이끄는 모든 것들을 혐오한다. 인간의 오만이 창조주를 거역하고 부풀린 자신감이 의로운 삶을 외면케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에 농간을 부리고 은총의 접근에 고집의 어깨를 내미는 것은 스스로 파멸을 재촉하는 길이다. 그들뿐만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으며 산다는 우리 중 얼마도 완고함의 속옷을 걸칠 때가 많다. 겉옷이야 경건함에 걸맞은 것들로 치장했지만 어떤 일에 대해서는 감춰진 속옷을 갈아입지 않는다. 기도와 신앙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감히 시험할 경우이다. 인간이 감히 하나님을 시험하겠는가? 그렇다. 불신자는 예의 안하무인으로, 어떤 신자는 기도와 말씀을 들먹거리면서 그럴 듯하게 하나님께 공을 넘겨 반응을 기다린다. 이런 포장된 시험이야말로 고약한 일이다. 별 일 없으면 자신의 의도대로 밀어붙이고 하나님의 부정적 반응을 감지하면 익숙한 회개의 과정을 밟는다. 언제까지? 심각한 손해를 볼 때까지이다. 이미 들통이 났음에도 드러나게 감지되기 전까지는 이런 미친 짓을 지속한다. 그것이 미련한 인간의 전형적 모습이다.

아니다. 어떤 경우에도 말씀은 수용함이 복이다. 전해진 내용이 축복이든 재앙이든 하나님의 말씀은 받아들임이 최선이다. 말씀은 생명의 음료이기에 마실수록 좋다. 말씀은 생명의 음식이기에 먹을수록 유익하다. 때로 입에는 써도 속에서 달다. 말씀의 가격은 경성을 위한 것이기에 맞을수록 영혼이 맑아진다. 중세에는 금욕주의 중에 채찍으로 자신의 몸을 세차게 두드려 죄를 참회하고 영혼을 맑음에 이르게 하려는 채찍질 고행(self-flagellation)이란 게 있었다. 어떤 수도승은 시편 150개를 한 주에 20번씩 읽으며 한 편 읽을 때마다 스스로 100번의 채찍질을 가했다니 기가 막힐 일이다. 13-4세기에는 이런 채찍질 고행단이 성행하여 민간에까지 유행했던 적이 있다. 지금 생각하기엔 무모한 행위이지만 당시로서는 의미 있는 경건의 실습이었다. 찌르고 베고 자르는 말씀을 거역치 않고 받으면 수만 번의 채찍질보다 실제로 낫다. 그런데 사람들은 웬만한 말씀은 수용해도 경성용 말씀을 수용하기 꺼린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말씀의 수용성이 떨어진다. 말씀 사역에서 접근성을 차단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강퍅함 곧 완고함이다. 사람의 마음은 신비해서 물같이, 기름같이 되기도 하지만 때로는 돌같이, 쇳덩이같이 화한다. 그렇게 되는 과정은 놀랍도록 간단하고 재빠르다. 생명과 진리에 대한 반응에 따라 순식간에 유해지거나 굳어버린다.

 

대언자에 따라 달라지는 말씀의 맛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말씀을 받아먹기를 권했다. 그가 말씀 받아먹기를 거절하면 그것이 곧 동족들이 보인 패역의 길을 답습함과 마찬가지였다. 에스겔이 먹으려고 보니 두루마리 형태의 글들은 안팎으로 온갖 저주와 재앙, 애가와 애곡의 내용들로 가득 차 있었다. 얼마나 두렵고 놀랐겠는가? 에스겔은 의문을 품지도, 망설이지도 않았다. 그럴 여유가 없을 만큼 신비한 그 현실은 매우 긴박했기 때문이다. 에스겔은 패역의 길을 걷지 않으려고 말씀을 받아먹었다. 에스겔이 입을 벌리니 하나님께서 먹여주셨다. 내용은 쓰디썼지만 입에는 달았다. 입으로만 먹었겠는가! 에스겔은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으로도 받고 귀로도 들었다. 에스겔은 자신이 받아먹은 말씀을 백성들에게 모두 토해내야 했다. 어미 새가 벌레를 물고 둥지로 날아가 새끼에게 토해내서 먹이듯 에스겔은 하나님께 받아먹었던 모든 말씀을 토해내서 이스라엘 백성을 먹였다.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먹이신 말씀은 에스겔의 구원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심판을 위한 것이었다.

대언자가 가장 괴로운 순간이 이때이다. 하나님의 백성에게 먹이고 싶지 않은 말씀을 소화해서 먹이는 것은 참으로 고역 중의 고역이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도 없다. 대언자인 에스겔에게는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패역하고 완고함이 극에 이른 그들을 위해 대체할 만한 어떤 양식도 그에게는 없었다. 하나님께도 없었다. 그들을 위한 식량은 말씀을 거역하고 거부한 데 대한 중한 심판뿐이었다. 에스겔이 대언자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나님께 완전 순종하는 길이었고 백성을 위한 사역으로는 그 자신이 먼저 담즙 같은 그 말씀을 오래도록 씹는 것이었다. 그는 오래 씹으면서 그 지독함이 주는 심판의 두려움에 기가 막혀 울고 또 울었을 것이다. 그것은 자기 백성에게 먹이고 싶은 그런 양식이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몽땅 홀로 삼켜버렸을 것이다. 그럴 수 없는 것이기에 더 많이 강하게 씹었고 받아먹기 수월한 상태가 되었을 때 입 벌리고 짹짹거리는 어린 새 같은 동족들에게 남김없이 먹였다.

자신의 영혼을 위해 말씀을 취하는 자는 얻어먹어 기쁨을 취한다. 우리가 진정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진리의 백성이라면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 단 말씀이든 쓴 말씀이든 동일하다. 느낌은 달라도 효능은 같다. 예레미야는 주님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였다. 오늘 우리 역시 주님의 이름으로 불리는 그리스도인이 아닌가! 그리스도인이라면 응당 말씀을 받아먹어 삶의 기쁨과 마음의 즐거움으로 삼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은 꿀꺽하고 삼키는 것과 같다. 말씀은 일단 삼켜야 내 것이 된다. 입에 물어도 우물거리기만 할뿐 씹어서 삼키지 않으면 결국 내뱉게 된다. 받아먹는다 함은 음식을 삼킨 후까지를 말한다. 말씀이 영혼의 양식인 줄 인정하지만 말씀을 입에 물거나 씹으면서도 꿀꺽 삼키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 모든 말씀의 맛이 다르기 때문이다. 재료는 같지만 요리법에 따라 차이가 나듯 대언자에 따라 다를 수도 있고 듣는 상황에 의해 달리 느낄 수도 있다.

 

말씀이 간식(間食)이 아니라 상식(尙食)되게 하라

그것은 말씀을 받아먹는 사람의 영혼 상태, 성장의 단계에 따라 느끼는 맛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쓰고 단 맛에서부터 텁텁하고 신맛에 이르기까지 말씀이 지닌 다양한 맛은 쉽게 삼키거나 삼키기 어렵도록 만든다. 연약한 심령일수록 부드러운 음식을 선호한다. 강한 영혼의 소유자는 단단한 음식도 먹고 소화를 잘 시킨다. 오미자처럼 다양한 맛을 내도 거부감 없이 아멘으로 받아먹는다. 히브리서 기자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음식을 먹지 못하는 자를 가리켜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라고 못을 박았다. 장성한 그리스도인은 지각을 사용하여 소화를 시키고 연단을 받아 피와 살이 되게 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된다. 사도 요한은 단단한 음식인 계시의 말씀을 받아먹고 소화시켜 시대를 분별하였다. 대언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을 삼아 스스로를 살찌우려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주식(主食)이다. 말씀은 결코 간식용이 아니다. 매 끼니 때마다 취해야 하는 상식(常食)이다.

대언자는 말씀을 기쁘게 받아먹는 청중이 있어 기쁘다. 그들의 은혜로운 반응 자체 때문만은 아니다. 패역한 세대를 향하여 외치는 대언자의 영은 참으로 곤고하다. 돌아서면 생명과 회복이 약속되어 있지만 돌이키기는 태산을 옮길 만큼 힘들고 완악함의 끝 길에서 기다리는 것은 심판의 불칼임을 알기 때문이다. 자신의 대언이 많은 사람들을 살리지 못하고 허망한 결말로 끝날 것을 인식함은 크나큰 고통이다. 열매 없는 대언 사역의 현장에서 대언자는 유산한 임산부와 같이 깊은 슬픔에 젖는다. 대언자의 곤고함을 잠시 잊게 만드는 것이 순히 듣는 무리들이다. 말씀을 받아먹으며 생기로 충만해지는 그들의 모습을 살피면서 대언자 자신이 새 힘을 얻는다.

우유나 젖만 받아먹던 아이가 차츰 자라면서 제법 단단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될 때 가장 기뻐하는 것은 부모다. 아이들은 이유식에서 빵으로 바뀐 식단에 적응하려 애쓸 뿐 특별한 감흥도 느끼지 못한다. 믿음의 초기를 보낼 때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이 부드러운지 단단한지의 구분을 잘 못한다. 다 비슷비슷하다. 그 차이를 느낄 때쯤이면 이미 어느 정도 성숙한 상태에 이른 것이다. 대언자는 믿음의 초기 단계에 있는 청중이 말씀을 받아먹으면서 성장, 변화하는 조짐을 보며 영적 부모로서의 기쁨을 얻는다. 이것이 그의 사역에 불을 지피는 촉매제 역할을 한다.

대언자란 일단 영적으로 성인됨을 전제한다. 그런데 혹시 당신이 특정한 말씀을 수용하기 힘들어한다든지, 소화시키기 어려운 말씀 때문에 자주 힘들어한다면 스스로 살펴야 한다. 심령이 유아기에 머물러 있으면 양육이 필요한 영혼들을 보살피기 어렵다. 소위 아이가 아이를 말씀으로 양육한다는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이는 마치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것과 매한가지이기에 그렇다. 말씀 사역자는 모든 말씀에 거침이 없고 자유로움을 느껴야 한다. 말씀에 관한한 전천후여야 한다. 어떤 상황과 처지에서도 위로부터의 명령만 있으면 즉각 순종할 의지로 철저히 무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진리 인식에 탁월함을 이루고 말씀에 정통하여 모든 의문을 파하는 일종의 득도에 이르러야 한다. 성경을 진지하게 공부함 없이 이루어질 일이 아니다. 너그러운 마음의 소유자였던 베뢰아 사람들은 간절한 말씀으로 말씀을 받고 받은 말씀이 과연 그러한지 날마다 상고했다.” 자세하고 깊이 있게 탐구했다는 말이다. 한 주에 몇 번 정도가 아니라 날마다 곧 성경탐구가 일상이 되었다는 뜻이다. 소위 대언자라면 이 경지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말씀 공부(工夫/功夫, 쿵후)의 달인이 되어야 한다는 도전을 모든 독자에게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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