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65)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하나님의 말씀은 칼일 뿐 아니라 방망이다. 날카롭고 아프다. 대언자는 칼을 날 서게 벼려서 예리함을 유지시켜야 하며 몽둥이에 울퉁불퉁 돋아난 옹이들을 깎아 반들반들하게 다듬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죽일 영혼을 죽이고 살릴 영혼을 살리는 것이 대언자 곧 설교자이다. 구원과 심판, 위로와 경고의 메시지에는 예언적 성격이 짙다. 성경 예언자들의 예언 사역과 오늘날 대언자에 비길 수 있는 설교자들의 설교 사역이 정확히 동일하지 않지만 상이점보다 유사점이 많다. 설교에서 예언적 성격과 신적인 말씀을 중화시켜버리면 하나님의 메시지로 보기 어렵다. 설교는 대언 사역이다. 대언이란 대신 말하는 것이며 설교는 메신저가 하나님을 대신해 그분의 말씀을 전달하는 행위이다. 대언은 대언자의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메시지로서 신탁(oracle)이다.

하나님의 메시지로서 메시지 내용이 설교자가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은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요 특권이다. 아무리 모임의 규모가 작아도 말씀을 가볍게 강론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대언자는 천상에 뿌리를 둔 자존감을 붙들고 어떤 상황에서도 담대함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 대언자가 스스로 자존감을 갖지 못하면 그가 전하는 말씀에 권위가 서지 않는다. 대언자의 자존감은 스스로에게서 솟아나지 않는다. 그가 붙들고 전하는 말씀이 불굴의 자존감을 제공한다. 대언자로서의 자존감은 개인의 인격이나 능력과는 별개로 말씀이 지닌 본래의 권위에 있다는 말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서 하나님 자신이다. 이런 사실의 인식에서 자존감이 솟구친다.

 

예언-대언-설교

대언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설교로 간주될 수 있다. 구약 예언자들의 직접 신탁과는 달리 설교는 설교자의 영성과 해석 가능의 관점에서 간접 신탁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 해서 설교자를 구약의 예언자들과 동류라 단정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예언자들의 경우에는 기록된 말씀이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의 심령에 주시고 머리에 주시고 입술에 주신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성경이 있다. 성경의 존재는 설교자에게 구약의 예언자와 같은 예언이 임할 수 있다는 모든 가능성을 배격한다. 예언은 예언자의 입장에서 해석이 불필요하지만 설교는 해석을 요한다. 같은 본문이라 해도 설교자의 해석 방향에 따라 전연 다른 메시지가 나온다. 어떤 경우에는 정반대의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

성경의 예언 내용을 해석한다는 측면에서 예언자라 부를 수 있다는 견해도 있으나 그것보다는 대언자로 부름이 적절하다. 물론 구약의 예언자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대언자였기에 그 말이 그 말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신탁의 말씀을 전한다는 의미에서 설교자는 대언자가 아니다. 오늘 누가 있어 감히 구약의 예언자들처럼 신탁의 말씀을 전한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신탁”(神託)이란 말은 정확히 하나님이 부탁하고 위탁하신 말씀이다. 성경이 확정된 이후에 하나님께 부탁받은 말씀을 누가 받은 적이 있는가? 당연히 없다. 성경에 하나님의 의지가 완벽하게 반영되었다. 구태여 말하자면 기계적 의미에서의 신탁은 아니어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한다는 관점에서 볼 때 설교자는 대언자이다.

사실 설교자를 예언자라는 호칭에다 직접 결부시켜버리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솔직히 우리는 모든 설교자들을 예언자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것은 구약 예언자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전했는지를 잘 알기 때문이다. 설교자가 구약의 예언자와 동일시되려면 말씀을 해석하고 메시지를 다듬는 모든 과정에 성령님의 역사가 뚜렷해야 하며 동일한 본문을 다루는 설교자의 메시지도 다르지 않아야 한다. 필자가 하나님의 메신저로서의 설교자를 대언자의 의미로 번갈아 사용한 것은 구약적인 의미에서보다 단순한 전달자라는 의미를 강조한 것이다. 설교의 영이라는 말보다 대언의 영이라는 말이 진리의 계시자로서 성령님을 지칭함에 있어 훨씬 낫다. 예언자의 대언 사역은 설교의 한 원형을 이룬다고 보는 것이 옳다.

 

모조품을 부숴버리고 진품을 다듬어라!

설교가 해산의 고통이라면 설교자는 산모이다. 말씀의 씨앗이 잉태되면 복중(腹中)에 품고 10개월을 지나듯 묵상과 성장하는 깨달음이 지속되어야 한다. 하나의 생명이 태어나기까지 그만한 시간이 필요함에 비해 진리의 새생명이라 할 수 있는 한 편의 설교가 태어나기까지 우리는 그리 오랜 시간을 할애하지 않는다. 누가 한 편의 설교를 위해 10개월이나 연구하고 묵상하고 실제로 다듬겠는가? 적어도 한두 주, 혹은 한두 달의 시간을 투자한다면 그렇지 않은 설교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다 숙성된 설교가 태어날 가능성은 훨씬 높다. 아무리 설교의 재능이 뛰어나다 해도 너무 빠르면 내용이 가볍고 깊이도 덜 할 수 있다. 설교 제작의 과정이 무시된 급조형의 설교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전해주기 전에 자신부터 죽는다. 설교가 전해지는 도중에 죽어버린다. 육체는 살아서 설교단을 걸어 내려가지만 영혼은 영안실에 바로 안치된다. 새로운 주일이 되면 다시 영안실에서 나와 강단으로 오르고 다시 영안실로 옮겨지는, 그야말로 희한한 죽음과 부활이 반복된다. 기막히고 슬픈 일이다.

소위 대형 교회의 설교자를 본떠서 내용을 카피하거나 적당히 변형을 가해 전하는 목회자들이 많다. 억양과 표정과 제스처까지 판에 박은 듯하다. 이건 모조품이다. 때로는 진품보다 모조품이 더 탁월함을 보인다. 그래도 모조품이다. 모조품은 가짜이다. 청중이 은혜를 받아도 가짜이다. 가짜 설교에 가짜 은혜를 받은 것이다. 설교의 정신은 열정과 확신과 진실이다. 내용과 전달에 있어서 그렇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인 양 활용하는 것은 나쁜 버릇이다. 설교는 진실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답게 진실로 전해야 한다. 주님은 전형적으로 자신이 받은 자신의 말씀을 전하셨기에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amen amen lego hymon)라 표현할 수 있었다. 진리의 사도로서 메신저는 자신이 가꾼 설교를 전해야 한다. 대리모 출산처럼 남의 씨를 받아 말씀을 전하려는 자는 영혼에 대한 애착이 없는 증거이다. 투박하고 거칠어도 자신이 맡은 주님의 양을 먹이는 양식은 오로지 자신에게서 나와야 한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했음에도 메시지가 주어지지 않는 법은 결단코 없다. 본래 말 주변이 없고 문장 실력이 탁월하지 못해도 깊은 묵상과 두터운 기도는 설교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나중에 그 원고를 보면 부끄러울 지경 일지 몰라도 전하던 그 순간의 감동은 명설교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설교란 매끄러운 원고를 읽고 평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며 그 어느 연설이나 강론보다 훨씬 현장에서 역사하는 플러스알파가 있다. 굳이 표현하라면 성령의 역사라 할 수 있다. 말씀의 영이신 성령님이 정성껏 준비한 설교자와 사모하는 마음으로 말씀을 들으려는 회중 사이에서 역사하신다. 필요에 따라 참고를 위해 몇 편의 설교를 살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소위 표절 시비에 휘말릴 정도의 과도 인용이나 복제 행위는 근절되어야 한다.

 

설교는 인간의 창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안물

대놓고 유명 설교자의 설교를 모방하거나 짜깁기 식으로 편집해서 전하려는 얄팍한 시도는 버려야 한다. 쉬운 길은 결코 오래가지 못한다. 매번 그렇게 할 수도 없는 일이다. 설교는 평생의 과업이다. 좋은 설교자가 되기까지 시간이 걸려도 조급함에서 탈피하라! 시행착오는 당연한 과정이다.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의 실패를 거듭해도 정직한 설교를 지향하는 한 당신은 주님의 보배로운 대언자이다. 남의 설교집을 뒤적거리기보다 말씀을 펴서 읽어라! 부지런히 연구하고 묵상하며 반추에 반추를 거듭하라! 남의 것을 도용 아닌 것처럼 포장하고 그럴듯하게 편집하는 정성이면 한 편의 건강하고 정직한 설교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음을 기억하라! 성령이 도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성령이 탁월한 설교자보다 못할까? 쉬운 길을 택하지 말고 늦게 돌아가더라도 정도를 걸어라! 하나님이 바꾸어주신다. 설교는 강의가 아니요 웅변이 아니다. 주님의 설교는 강화 스타일이었다. 강의와 이야기가 적당한 조화를 이루었다.

비유나 예화는 진리 전달에 매우 유용하다. 감동적인 예화에는 시대를 초월한 감화력이 있다. 가장 확실하고 안전한 것은 성경의 예화이다. 성경에 수록된 역사적 사건이나 개인의 경험은 평생을 읽고 다시 들어도 색다른 감동을 준다. 성경 밖에서는 경건 서적이나 신앙 전기에서 말씀을 빛낼 소재를 얻을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전하려는 메시지의 핵심보다 예화가 강하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요한다. 소재가 너무 빛나면 말씀이 광채를 잃기에 조명의 강도를 조절함이 중요하다. 가장 강력한 예화는 자신의 경험이다. 은혜로운 간증은 말씀이 뒷받침되고 기도로 숙성된 하나님 체험이다. 간증은 꼭 필요할 때 정제된 언어로 전해져야 하며 간증자 자신보다 간증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간증에 살이 붙으면 간증자가 실제 이상으로 커 보이고 간증에서 비계 부분을 제거하면 내용이 날렵해져 그런 간증을 허락하신 하나님의 자태를 돋보이게 만든다.

설교는 인간의 창작품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안물이며 설교자의 노력보다 성령의 은혜로 인한 산물이다. 내가 전하려는 내용,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성경 말씀을 통해 특정 시대에 특정 대상에게 전하려는 의지를 반영하는 것이 설교의 품격을 높인다. 설교는 반드시 대독(代讀)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에 전하려는 메시지를 대독하는 것이어야 한다. 자신의 메시지를 낭독하는 것은 메신저의 자세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진리의 매개체인 설교자의 위치는 매우 중요하다. 설교는 영적 예술이다. ‘예수를’(예술) 담아야 영적 예술이라 불릴 수 있다. 피아노 건반은 어디를 눌려도 소리를 낸다. 저음이면 저음, 고음이면 고음, 누르는 대로 소리를 낸다. 설교자는 언제 어디서든 예수의 소리를 내야 한다. 설교자의 영광은 그가 진리의 소리를 들려줌에 있어 전천후라는 사실에 있다. 성악가는 음을 제대로 이해하고 정확히 표현하되 곡을 해석하고 전달함에 기술을 요한다. 설교자는 성령의 역사에만 의존한 채 태만하면 안 된다. 기술은 습득해야 한다. 은혜는 주어지는 것일지라도 기술은 노력하는 자가 얻는다. 영감 없는 기술도 문제지만 기술 없는 영감도 바람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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