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귀를 기울여야 하나? 듣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다. 구원과 영생의 놀라운 소식도 듣지 않으면 무의미하다. 모든 좋은 결말의 선두에는 반드시 말씀의 경청이 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들은 교회 밖을 활보하지만 사망의 그늘 아래에서 사는 자들이다. 교회에 출석하면 이미 말씀을 듣기로 한 셈이다.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면 재앙이 따로 없다. 그것 자체가 재앙이다. 교회에까지 나와서 다른 활동에는 열심히 참석하면서 말씀 들음을 소홀히 하면 알맹이 없는 껍데기만 취한 것이다. 마르다는 주님을 대접하는 일에 분주해서 마음의 평정을 잃었다. 마리아는 주님 발 앞에 앉아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말씀을 경청했다. 마르다의 사역도 귀중했지만 주님은 말씀에 귀를 기울여 경청한 마리아의 손을 들어주셨다.
설교는 하나님을 대언하는 말씀이다. 사람이 전하는 설교는 단순한 종교 강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실 때 왕이나 제사장들을 세워 하나님을 대리하거나 위임 받은 권위 안에서 중요한 일익을 담당케 하셨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만은 예언자들을 따로 세워 그들을 통해 진행하셨다. 그들은 말씀이신 주님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 한시적으로 사용된 도구였으니 마치 태양이 빛을 드러내기 전까지 어둠을 밝히고자 켜서 비취는 등불 같았다. 오늘 우리에게 당연시된 이 말씀은 구약의 성도들이 그토록 듣기 원했던 말씀이다.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마 13:17)
거룩한 교회가 설교자들에게 그와 같은 권위를 부여했기에 성경적인 설교는 간접적인 하나님의 말씀 혹은 2차적인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릴 만하다.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은 비할 바 없는 특권이요 잊을 수 없는 은혜이며 감당할 수 없는 축복이다. 언제나 놀라운 부흥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말씀을 사모하는 회중들의 열정이 있다. 예전 한국교회도 그러했지만 마지막 때의 어두운 이 시대에도 부흥의 불길이 치솟는 곳에는 다섯 시간, 열 시간을 집중해서 말씀을 듣는 현상들이 따른다. 말씀이 활력 넘치게 운행되는 곳에 회개와 구원, 치유와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그 시절의 감격을 추억하면서도 그와 같은 삶을 지금 지속시키거나 일상화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허물이다. 하루의 십일조라도 말씀에 바치는 정성을 회복하고프다.
보석 세공사와 셰프 같은 설교자
설교는 청중들에게 감추어진 진리를 드러내 보인다. 원석을 가공하여 아름다운 보석으로 만든다. 모든 설교에는 창조주 하나님을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창의력이 있다. 텍스트는 불변하지만 나름대로의 창의력을 갖고 자기만의 메시지를 다듬기에 모든 설교자는 창작자라 할 수 있다. 누군가의 설교를 흉내 내거나 짜깁기를 하는 형식은 진정한 의미에서 설교라 말하기 어렵다. 독창성은 설교의 묘미이다. 동일한 본문에서 백이면 백, 천이면 천 가지의 독창적인 메시지가 창출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지향하는 궁극적 의도에는 동일한 하나님의 모습이 그려진다. 설교는 원재료를 골라 조리하는 영적 음식이다. 성도들은 설교로 빚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먹는다. 설교는 놀랄만한 은혜의 수단이다.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겨 먹었다. 그것이 그에게 내적인 만족과 희열을 제공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여 나는 주의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자라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 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오나(렘 15:16)
이런 천상의 기품이 서려 있는 음식 먹을 즐거움이 당신에게 있는가? 세상의 그 어떤 진수성찬에 비할 바 없는 진기한 음식,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일정 기간 맛보았던 만나를 훨씬 능가하는 하늘 양식에 감격함이 있는가? 그런 음식을 조리하는 기쁨에 마음 벅찬가? 천상의 재료를 이용해 최상급 요리에 도전하는 설교자들은 영적 셰프에 다름 아니다. 광야의 군중들은 주님께서 차리신 식탁을 대했지만 오늘날의 청중들은 주의 종들이 정성껏 마련한 다채로운 식탁을 대한다. 보리떡과 마른 생선보다 풍미가 더한 것은 천연의 말씀(organic word)에 신학적 흐름과 해석의 방식으로 조리한 설교자의 메시지가 풍기는 맛과 향이 제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다양한 식감을 느껴도 음식 본연의 맛인 복음의 핵심만은 변치 않는다. 취향 따라 들을 수 있는 메시지가 많은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 있긴 해도 이 시대의 성도들이 누리는 특권이다.
왜 교회는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하나? 어찌하여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씀을 중심으로 형성되는가? 교회의 많은 사역 가운데서 말씀 사역이 늘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 성경은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으로 끝난다. 성경의 안팎에 말씀이 그득하고 하나님 자신이 말씀이어서 말씀을 떠난 그리스도인의 존재란 상상할 수조차 없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늘 말씀하시는 분으로 세상을 대하고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신다. 말씀은 각자 그리스도인, 교회, 기독교의 강력한 상징이며 뚜렷한 실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대언의 말씀을 들어야 할 이유는 분명하다. 다섯 가지의 이유를 간략히 서술코자 한다.
1. 대언의 말씀은 개인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허공에 울려 퍼지지 않는다. 누군가에게는 반드시 의미 있는 외침으로 꽂힌다. 엄밀하게 보면 회중을 위한 말씀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말씀 사역은 오로지 한 사람을 위한 메시지이다. 회중에게 선포된 말씀도 결국 개인을 향한 도전과 권고의 말씀이다. 설교자는 회중을 집단으로 만나지 않는다. 한 개인으로 말씀 안에서 만난다. 백부장 고넬료는 가족과 가까운 친지들을 모아 놓고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자 했다. 모인 무리가 다 같이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들었지만 각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그들이 모두 주님을 영접하고 세례 받았지만 그것은 집단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그들은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독립된 개체로서 말씀을 들었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한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행 10:33)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삼천 명이 회개한 것도 집단적인 회심 같아 보이지만 개인의 회심이 모여 집단화된 것이다.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회중이 설교자에게 달려들어 그를 돌로 친 것도 집단적인 히스테릭 같아 보이지만 개인의 거부가 모여 집단화된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외쳐지는 말씀도 마찬가지이다. 청중의 숫자가 얼마가 되든지 각자 개인이 말씀을 경청한다. 어떤 이는 은혜를 받고 어떤 이는 시험에 빠진다. 어떤 이는 말씀을 받아들이지만 어떤 이는 강력히 거부한다. 혹은 경계 선상에서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요점은 말씀이 각자의 한 개인에게 임한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이 인격이시듯 말씀도 인격적이다. 크신 하나님의 말씀은 온 우주라도 품을 수 있지만 티끌보다 작은 한 인간에게 하나의 인격으로 임하신다.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가? 육성보다 더 확실하게 듣는 영의 말씀이 있는가? 고막이 아니라 당신의 영혼을 울리고 기억의 창고가 아니라 심비에 새겨진 그런 말씀이 있는가? 성경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한량없는 주님의 은혜이다. 더욱이 성경 말씀을 해석하여 삶의 정황에 적용시킬 메시지로 풀어 전하는 설교자가 우리 주변에 상주함은 복중의 복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위해 세워주신 메신저를 기뻐하며 그의 말씀 듣기를 사모하라! 당신이 속한 공동체에는 촛대만이 아니라 별이 빛난다. 하나님은 교회의 사자에게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메신저인 사자는 받은 말씀을 회중들에게 기쁨으로 전한다. 이것은 교회가 세워진 이후부터 줄곧 변치 않는 하나님의 방식이며 말씀을 통해 자신의 뜻을 드러내는 장치이다. 다수가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말씀을 전해 들어도 메시지는 각자 개인에게 별개로 임한다. 하나의 말씀이 개개인에게 역사함이 다르고 청중으로서의 반응이 다양한 이유이다.
2. 대언의 말씀은 교회에 주시는 성령의 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집단을 향하실 때는 그 대상이 교회이다. 교회는 말씀의 담지자(擔持者)이다. 교회는 주님께로부터 말씀 전파의 사명을 위임받았다. 동시에 말씀 자체를 위탁받았다. 말씀 사역자는 교회에서 나온다. 교회 밖에서 스스로 일어난 말씀 사역자는 교회를 통해 반드시 검증받아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이 땅에 세우신 영적 질서요 권위이다.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말이나 ‘교회를 어머니로 모시지 않은 자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는 말도 교회가 천상적 기원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하나님은 교회를 통해 영광받기를 원하신다. 역사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교회의 존망이 곧 말씀의 존망과 궤를 같이 했다는 점이다. 교회의 영광이 말씀의 영광이다. 말씀이 멸시당할 때 교회가 세상 권좌를 눌렀지만 하나님의 멸시를 받았다. 말씀이 가려진 교회의 황금기는 곧 영적 암흑기였다.
종교 개혁은 말씀을 말씀 되게 하는 운동이었다. 죽었던 살구나무에 꽃이 피듯, 골짜기에 뒹굴던 마른 뼈들이 살아 일어서듯 말씀이 꽃피고 살아났다.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말씀이 회중의 품으로 돌아왔다. 권력의 치마에 싸여 풀죽어 있던 말씀이 당당한 모습으로 서민들의 눈을 사로잡고 귀를 울렸으며 그들 모두의 입술에서 낭송되었다. 교회가 타락하면 말씀이 애절한 음성으로 다가온다. 교회가 변질되면 진노의 고함으로 덮쳐온다. 교회가 불순종의 길을 고집하면 심판의 우렛소리로 번득인다. 교회가 말씀의 증폭기 역할을 감당하려면 우선 교회의 머리 되신 주님에게서 들려오는 말씀을 각 지체에 담는 몸이 되어야 한다. 메신저의 메시지에 담긴 성령의 음성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이것이 아시아의 일곱 교회에 보낸 편지(계 2-3장)의 말미에 언제나 성령의 음성 듣기를 원하는 주님의 마음이 실려 있는 이유이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