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헤미야 8:1-12절은 말씀이 역사하는 구체적인 사례를 한 사건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오래 전에 무너졌던 거룩한 성벽이 52일 만에 재건되었다. 짐승들이 거하던 성안에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포로 생활에서 돌아온 백성들은 매일 감격 속에 지냈지만 상처와 아픔에서 온전히 치유되지는 못했다. 붕괴와 파괴의 현장에서 이룩한 부분적 재건의 결과물을 바라보며 그들은 성전이 지녔던 영광의 세월을 기억하며 슬픔에 잠겼다. 그들은 모여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찬송했지만 공허한 마음만은 어쩔 수 없었다. 고토로 모여들긴 했지만 패역으로 인한 심판의 흔적을 그대로 방치할 수 없어 합심하여 이룬 성벽 재건의 쾌거였다. 거룩한 영광은 회복되고 그 증표로 성벽이 재건되었으니 이젠 그들 자신의 변화를 이루어야 했다. 묵은 땅은 기경해야 마땅했기 때문이다. 심령의 재건 작업은 이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기 14년 전에 에스라는 일단의 백성들과 함께 이미 돌아와 있었다. 학사요 제사장인 에스라는 율법에 정통했다. 에스라는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결심을 했다.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 7:10)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이스라엘 자손이 수문(Water Gate) 앞 광장에 모였다. 그들은 학사 겸 제사장인 에스라에게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도록 요청했다. 에스라가 특별히 만든 나무 강단 위에 올라 율법책을 펴자 모든 백성이 일어났다. 에스라는 그들을 향해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했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을 연호하며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했다. 에스라는 군중들을 향해 율법책을 강론하기 위해 본문을 읽기 시작했다. 새벽에 읽은 말씀은 오정까지 계속되었다. 6시간을 내리달아 말씀을 읽었다. 백성들은 율법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다. 강론은 서기관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맡겼다. 얼마나 장엄하고 얼마나 거룩한 분위기로 팽배한 장면인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말씀의 폭풍 같은 질주 앞에 모두 순종으로 반응했다.
서기관들과 레위 사람들이 백성들 사이에 자리를 잡고 에스라가 읽은 말씀을 깨닫게 했다. 낭독한 말씀의 뜻을 해석하여 깨닫도록 도왔다.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그들이 연호하던 아멘 소리를 능가하는 함성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그것은 통회와 자복의 흐느낌이었다. 작은 흐느낌이 큰 울부짖음으로 변하더니 모든 백성이 통곡했다. 에스라는 백성들을 진정시키며 기쁜 성일에 울지 말고 오히려 기뻐하며 하나님께 감사할 것을 명했다. 말씀의 대향연이 정점을 향해가면서 울 때 울었던 그들이기에 감사할 때 감사할 수 있었다. 백성들은 이내 울음을 그치고 축제에 동참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청취한 말씀을 밝히 알았기에 즐거움을 배가시켰다. 이튿날에는 백성의 족장들과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에스라의 처소에 모였다. 에스라는 백성들에게 칠일 동안 초막절을 지내게 했다.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했다. 칠월 1일에 시작된 부흥의 역사는 몇 주간이나 계속되었다. 그 달 24일에는 모든 백성이 모여 낮 1/4은 선채로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1/4은 자신들의 죄와 열조의 죄악을 자복했다.
이 전대미문의 부흥은 말씀이 가져온 부흥이었다. 말씀이 모든 것을 회복시켰다. 무너졌던 심령이 재건되고 잊혔던 절기가 회복되었다. 묻혔던 즐거움이 회복되고 회개의 영이 그들의 완고한 고집을 꺾었다. 그들은 잃어버렸던 하나님 백성의 지위를 말씀의 회복으로 재탈환했다. 진정 돌아가고 싶은 은혜의 현장이다. 그 놀라운 현장의 한 컷이라도 삶의 조각에 새겨 넣고 싶다.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 성령의 지혜로 가르칠 말씀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 말씀하시지만 대개는 듣긴 들어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한다. 성경 말씀은 성령으로 기록되었기에 하나님의 성령이 아니면 알 길 없다.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국고를 맡았던 내시는 이사야서의 말씀을 읽고 묵상했지만 깨달을 수 없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빌립이 말씀을 풀어 깨닫게 했다. 성경 박사라고 해서 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은 아니다. 겉으로는 알겠지만 깊이가 얕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아볼로는 많이 배워 성경에 능통한 사람으로 소문났으나 그의 지식은 한계가 있었다. 역사적인 말씀, 교리적인 말씀에는 밝았지만 하나님의 도를 깊이 알지 못했다. 이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그를 데려다가 성령의 지혜로 가르쳐 교회의 유익한 일군이 되게 만들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히
말하기를 시작하거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듣고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이르더라
(행 18:26)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기록된 책이다. 그래서 성경을 다른 경전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말씀이라 부른다. 세상 종교의 다른 경전들과는 감히 비교할 수 없다. 다른 경전들은 모두 사람들이 자기의 깨달음을 자기 방식으로 썼다. 성경만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썼다. 사람이 썼지만 자신들의 지각과 사고의 결과물로 형성된 사상이나 깨달음을 나열하지 않고 표현하기 어렵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역사로 써내려갔다. 쓰는 이의 개성, 언어 선택, 문장의 특색 등을 허용하면서 전체적으로 방향을 결정짓고 내용을 취합하는 과정에 성령이 주도적으로 개입하셨다. 그렇게 만들어진 이 말씀은 전적으로 우리 모두를 위한 말씀이다. 우리 각자의 유익을 위해 주어졌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설교는 이 말씀을 풀어서 대언하는 존귀한 사역이다. 고도의 훈련이 필요하다. 기도 없이 말씀을 해석할 수 없고 기도 없이 말씀을 전할 수도 없다. 끊임없이 연구하고 묵상하며 해석하고 적용하는 노고가 뒤따라야 한다. 연구 없는 기도만의 설교, 혹은 기도 없는 연구만의 설교는 온전할 수 없다. 둘 다 필요하다. 한편의 설교가 마련되기까지 숱한 땀과 눈물의 노력이 있고 사모함과 열정과 기도에 더해 성령의 역사가 짙게 배어있다. 간혹 성경을 억지로 풀어 사람들을 미혹하는 데 이것이 성경에서 경고한 거짓 교사요 이단이다. 신자들의 귀가 옅어지고 분별력이 없어 쉽게 귀신의 가르침을 좇고 사탄의 꼬드김에 빠진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벧후 3:16)
특히 예언이나 종말에 관한 가르침은 조심해서 듣고 깨달아야 한다. 가르치는 사람이 없이 스스로 깨달으려다 자기 영혼을 죽인다. 성경 말씀 자체가 예언의 성격을 띠므로 말씀을 바로 풀어주는 대언자가 귀한 것이다. 마지막 때가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바른 말씀을 듣기 싫어한다. 그것은 그가 이미 말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나라와는 상관없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상한 것, 신기한 것을 추구하다보니 악령에 현혹되어 그 영혼을 패망에 이르게 한다. 사람들은 권면과 위로와 경계로 이루어진 설교, 아비 같은 심정으로 말씀 전하는 설교자들을 무시한다. 소위 단단한 음식을 거절하고 부드러운 젖과 같은 설교를 좋아한다. 제 영혼이 망가질 줄도 모르고 나쁜 습성에 빠져버리는 것이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히 6:12-14)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말씀에 귀를 닫고 듣기 싫다는 신호를 보낸다. 바른 말씀을 거부하고 허탄한 얘깃거리를 좇는다. 오늘날 기독교가 약해진 것은 교회가 약해졌기 때문이다. 교회가 약해진 것은 말씀의 강단이 약해졌기 때문이다. 강단의 쇠약은 설교자가 원초적인 야성을 잃고 제도와 안락에 길들여지도록 스스로 방심했기 때문이다. 명성과 성취 같은 반짝임에 현혹되어 순례의 길을 피하고 안정된 여행 루트를 벗어나려 하지 않아서이다. 전령 의식은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고 안내자 역에 충실할 뿐이다. 일부 대언자들은 아예 신자들의 눈치를 보느라 하나님의 뜻을 변변히 전하지 못한다. 신자들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말쟁이들, 이야기꾼들, 삯군들은 장차 그 엄중한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딤후 4:3-4)
패역한 시대는 진리가 버림받는 때이다. 거룩함이 조롱당하며 비루함이 날뛰기에 거짓 이야기들이 사람들의 청력을 마비시킨다.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선호하고 다른 진리를 추종함에 아무런 주저도 없다. 그럴듯한 이념과 사상의 옷을 입고 인간 사이를 분열시키고 영혼을 파괴하는 사이비가 대세를 이룬다. 다른 교훈을 신봉하고 바른 교훈을 멸시하는 이들은 교만한 자다. 그들은 교회마다 다니면서 다툼과 분열을 조장한다. 알곡 되기를 거절하면서 가라지의 역할을 자청한다. 다툼은 교회를 무너지게 만드는 원흉이다. 다툼의 건너 이웃에 분열이 있다. 이는 금이 간 터전이요 물이 새기 시작한 방축과 마찬가지이다. 다툼의 끝은 싸움이요 싸움의 끝은 파멸이다.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딤전 6:3-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