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79)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3. 눈의 초점을 맞춘다.

지난주의 좋은 자리 선정귀를 기울여 듣는자세에 이어 오늘도 네 가지 자세를 간략히 언급코자 한다. 지면 길이를 고려하여 나머지 세 자세는 다음번에 기고하려 한다.

설교자와 회중이 눈을 맞추는 것(eye contact)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다. 눈은 마음의 창이요 거울이다. 가장 소중한 것이나 사람을 표현할 때 눈동자(the pupil of the eye)에 빗대어 눈의 사과”(the apple of the eye)라 부른다. 눈동자와 눈동자가 마주치는 것과 같은 안촉(眼觸)이 초점의 궁극점이다. 설교자는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 거리에서도 상대방의 동공을 본다. 루스드라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던 자가 바울의 말하는 것을 보았다. 바울과 앉은뱅이의 눈동자가 마주쳤다. 바로 그 순간에 바울이 본 것이 있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 지각이 바울에게 생겨나자 그에게 구원받을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다. 동공 너머의 영혼 저 깊이에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앉은뱅이를 구원에 이르게 할 믿음이었다. 바울의 눈에 비친 그 믿음이 앉은뱅이를 걷고 뛰도록 만드는 기적을 가져왔다.

오늘의 대언 사역에 기적이 나타나지 않음은 대언자가 말씀을 전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눈을 하나님께 맞추지 않기 때문이다. 진리의 핵심에 대언자의 영적 시선이 집중될 때 영광의 말씀은 반드시 폭발한다. 이사야가 성전에서 야훼의 영광을 직면했을 때의 상황을 연상하면 알 수 있다.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늘 중심에 계신 여호와의 보좌를 우러러보았다. 하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현존이 자각되며 자신의 감춰졌던 내면의 실상이 드러나고 영광의 하나님을 떠나 화의 지경에 처해 있던 백성들의 영적 정황을 보였다. 물론 말씀을 듣는 청중에게도 상당한 책임이 있다. 단지 시선을 집중하는 차원이 아니라 설교자가 먼저 맞추었던 하나님의 시선을 설교자를 거쳐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 시선으로 설교를 듣는 이가 설교자의 눈에 들어온다. 청중 편에서 설교자의 눈동자 중앙을 맞추는 절대적인 바라봄이 있어야 하나님도 설교자의 눈에 듣는 이의 영혼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을 주신다. 주의해서 들으면 들리지 않던 것도 들리고 주목해서 보면 보이지 않던 것까지 보이는 게 사실이다.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14:9-10)

 

왜 말씀 듣는 태도나 자세가 그토록 중요할까? 말씀을 들음에서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말씀을 들음에 있어 몸의 자세는 매우 중요하다. 왕의 메시지를 듣는 신하나 백성들은 말씀이 지닌 권위 앞에서 모두 무릎을 꿇었다. 오늘날에 와서 이런 자세까지는 아닐지라도 말씀을 존중하는 자세를 취하는 것이 좋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 자세이다. 많은 경우에 말씀을 열심히 들음에도 불구하고 열매 맺지 못하는 것은 마음 자세에서 실패했기 때문이다. 마음은 하나로 뭉치면 한 덩어리가 되지만 나뉘면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진다. 말씀을 들음에 있어 마음을 다잡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4. 잡생각을 버리고 정신을 집중해야 한다.

잡생각은 자질구레한 생각의 파편들이 마음의 구석구석을 차지하는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일들이 갑자기 생각나거나 별안간 출처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간다. 안절부절 못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잡생각은 악령이 심어주는 쓰레기이다. 잡생각은 특히 기도와 말씀을 실패로 이끌어 신앙생활을 어렵게 만드는 가시이다. 잡생각은 순식간에 마음으로 침투해서 매우 빠른 속도로 잔가지를 뻗쳐간다. 민첩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이 온통 쓰레기장으로 화해버리고 만다. 잡생각은 고개를 쳐드는 즉시 과감하게 잘라내야 한다.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으로 잡생각은 마음 밭을 누빈다. 쓸데없는 망상도 그렇다. 무익한 공상도 마찬가지이다. 번잡한 생각이 떠나지 않으면 정신이 산만해진다. 정신이 흐트러지면 마음을 추스를 수 없다.

마음이 쓰레기장으로 화해버리면 정결한 말씀이 설 자리를 잃어버린다. 정신을 집중하려 들수록 지각이 흐려져 마치 시력이 좁아지는 녹내장처럼 내면의 시력이 약화된다. 이런 경우에는 생각 훈련이 큰 도움이 된다. 쓰레기더미를 뒤져 뭔가를 찾아내듯 잡다한 생각을 일단 인정하고 생각의 자유로운 흐름에 내맡긴다. 초기에는 공상과 망상의 경계를 넘나들다 상상의 고개만 넘으면 반은 성공이다. 정신력이나 사고의 능력에 따라 시간 차이는 있겠지만 상상의 나래를 펴는 사이에 쓰레기처럼 쌓였던 잡생각들이 대부분은 소멸되고 일부는 정돈되면서 결국 사상(思想)의 재료가 될 생각의 파편들이 퍼즐 조각처럼 제 모습을 지니게 된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사상이 서고 뚜렷한 이상이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물론 생각하는 본인의 마음이 분열되지 않는 조건을 전제로 해서이다. 수직을 넘어 수평 사고, 아날로그를 지나 디지털 사고, 평면을 거쳐 입체 사고, 발산을 건너 수렴 사고, 점과 선과 절선을 극복한 나선형적 사고, 이런 생각의 학습에 몰입해서 획득하는 것은 생각하는 인간이 지닌 투명한 마음이다. 이런 마음 한쪽에 직관력이 있고 다른 쪽에 통찰력이 자리 잡는다.

한 사람의 마음도 분열되면 천 조각, 만 조각으로 나뉘지만 백 사람의 마음도 결집되면 한 마음으로 뭉치는 것이 마음의 신비이다. 일단 마음이 잡생각의 서식으로 세포분열을 일으키면 분열의 끝이 어디까지 이를는지 알 길이 없다. 단단한 돌도 가루가 되면 진리가 굳게 터를 내릴 근거지로 삼기엔 부적합하다.

 

5. 간절한 마음으로 듣는다.

마음의 간절함은 깊은 감동이라는 보상을 제공한다.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끼면 하나님이 주실 말씀을 강력히 기대하게 된다. 마음의 간절함은 바른 자세와 집중된 정신력으로 말씀 선포자의 시선을 한 순간도 놓치지 않게 한다. 간절함은 타는 목마름이요 애타는 기다림이다.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방도가 당신이 지녀야 할 간절함이다. 이 간절함이 기적을 낳는다. 백부장 고넬료에게도 이 간절함이 있었고 마리아에게도 이 간절함이 있었다. 2년간이나 날마다 두란노 서원에 모여 바울의 말씀을 듣고 배우던 에베소의 제자들에게도 이 간절함이 있었다. 베뢰아 사람은 이 간절함으로 놀라운 믿음의 역사를 경험할 수 있었다.

 

베뢰아 사람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자가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하나(17:11-12)

 

그야말로 뼈가 저리고 간이 절여질 만큼 혼신의 힘을 다하는 상태이다. ‘경영의 신으로 일컬어지며 일본항공의 회장을 역임한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간절함이 없다면 꿈도 꾸지 마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무엇이 되고 무엇을 하든 인간의 존재와 삶에는 간절함이 모든 꿈의 기저(基底)에 자리한다. 간절함이란 희망의 실현을 위해 한 개인이 쏟아 붓는 열정과 정성의 극점을 가리킨다. 연인에게는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용사에겐 목숨 건 필승의 의지로! 오늘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이 있다면 간절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간절하면 절실함이 하늘을 찌른다. 간절함을 보좌의 우편까지 치솟게 하는 것이 바로 치열함, 열정과 열망, 그리고 일관됨이다. 기도의 사람 바운즈는 죽을 만큼의 간절함을 기도가 응답되는 바로 그 순간으로 포착했다. 죽음을 각오한 간절한 기도에 응답이란 당연한 비답이다.

조금은 다른 예이지만 천지현황(天地玄黃)으로 시작되는 사언고시(四言古詩)인 천자문은 억울한 누명으로 옥에 갇혔던 주흥사(周興嗣)가 중국 양() 나라 무제의 명에 따라 하룻밤 사이에 지었다. 초인적인 노작에 그가 쏟은 열정과 간절함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었겠는가! 백발이 대수이겠는가? 신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듣는 사람으로서 정말 간절함의 정상을 거닐고 싶다. 순식간에 절명에 이른다 해도 정녕 거룩한 간절함에 스스로 녹아들고 싶다. 영혼을 위한 간절함을 바울과 디도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이 비천한 영혼에게도 한껏 심어주시길 앙망한다.

 

6. 마음을 열고 듣는다.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싫어한다. 본능적으로 말씀에 척을 지고 산다. 마음을 열어 말씀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귀로 듣는 것(hearing)이 아니라 마음으로 듣는 것(listening)은 말씀을 역사토록 하기 위해 불가피한 조처이다. 마음이 열려야 말씀이 깨달아진다. 부활하신 주님은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를 만났다. 문답을 나누는 가운데 두 제자는 예루살렘에서 들었던 부활의 증거를 낯선 동행자에게 전했다. 주님은 그들을 책망하시며 모세와 선지자의 글들에 나타난 메시아에 관한 말씀을 풀어주셨다. 주님은 그들의 마음을 열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관한 성경 말씀을 깨닫게 하셨다. 두 제자는 떠나시려는 주님을 붙들고 숙소를 잡았다. 주님이 떡을 떼고 축사하시는 순간에 두 제자의 눈이 밝아졌다. 낯선 동행자는 바로 그들이 잃었다고 생각한 부활의 주님이셨다. 마음의 열림이 눈의 밝음으로 이어졌다.

 

이에 저희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24:45)

 

마음을 열면 말씀도 자신을 연다. 말씀과 영혼의 상호 소통이 이루어진다. 소통은 상대의 벽을 허물어 서로를 깊이 알게 한다. 깊이 앎이 곧 깨달음이다. 말씀의 속성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는 시편은 마음을 열면 지혜자만 아니라 우둔한 자에게도 깨달음의 역사가 일어남을 노래했다.

 

주의 말씀을 열므로 우둔한 자에게 비취어 깨닫게 하나이다(119:130)

 

마음에 찔림이 있어야 회개가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 귀를 막으면 설교자를 때려죽이는 죄에 빠진다. 마음을 열어야 듣고 따를 결심이 선다. 성령이 마음을 먼저 움직여야 하는 것이지만 결국 최종 열쇠는 듣는 본인에게 달려 있다. 말씀이 임할 때 당신이 먼저 마음을 열어야 하나님이 그 마음을 말씀 역사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주신다. 성령이 경건한 한 여인으로 하여금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듣게 했다. 복음이 그녀의 마음 문을 두드렸다. 그녀는 마음을 열었다. 하나님은 그녀의 경건한 갈망을 따라 그 마음을 활짝 열어 주셨다. 단순한 들음에서 깊은 들음에로, 귀의 들음에서 마음의 들음에로 그녀를 이끄셨다.

 

두아디라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1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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