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 사역자에게 고하는 말씀 (78)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한명철 목사는 미국 캘리포니아주 은혜와 평강교회를 담임하며 30권의 저술과 글쓰기를 통해 복음 사역에 애쓰는 목회자다.

말씀을 들음으로 일어나는 역사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깨달음의 역사이다.

말씀을 제대로 들으면 깨달음을 얻는다. 진리의 영이 당신의 영혼을 비추고 마음의 문을 열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진리도 깨달을 수 있고 삶의 이치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인식에도 진보를 보이고 영적 각성을 통한 자의식을 확보하기가 훨씬 수월하다. 말씀이 보여주는 통찰력의 범위 내에서 세상 이치와 역사의 진행 방향에 대해서도 제법 밝은 빛을 얻는다. 말씀에서 깨달음이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하다. 주님의 관심도 언제나 말씀을 들은 청중의 반응에 있었다. 깨달으면 기쁨이 되었지만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청중의 경우에는 안타까워하시거나 책망이 뒤따랐다. 때로는 제자들까지 이 책망의 대상이 되었다. 비판적인 자세로 말씀에 흠집 내기를 즐겨하던 유대인들을 향해 주님은 준엄하게 꾸짖으셨다.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8:43)

 

2. 믿음의 역사이다.

말씀을 들으면 듣는 자의 마음에 영적 역사가 시작된다. 늘 들어도 꿈쩍 않던 마음에 이상 증세가 감지된다. 불신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이 봄눈 녹듯 순간적으로 믿음에 호의적이 된다. 죽음과 내세에 대한 불안감과 함께 평소에 느끼지 못하던 삶에 대한 진지함이 고개를 쳐든다. 굳게 잠갔던 마음의 빗장을 열고 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다. 평소와는 너무 다르기에 자신이 정상은 아닐 것이라 걱정까지 한다.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내면의 변화가 급속히 진행되기 때문이다. 주님이 듣는 자의 마음을 열어 믿음을 허락하시면 듣는 자는 구원의 은총을 경험한다. 산을 옮길만한 믿음의 역사는 겨자씨와 같은 한 마디 말씀에서 시작된다. 말씀의 내용을 믿고 말씀을 전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놀라운 역사가 연이어 일어난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13:48)

 

3. 고침의 역사이다.

말씀에는 치료의 능력이 있다. 병든 육체를 고치고 상한 마음을 고치며 망가진 영혼을 고친다. 비뚤어진 관계를 고치고 망가진 자존감을 고친다. 많은 경우에 주님께서는 말씀만으로 각종 질병을 고치셨다. 오늘날도 믿음으로 선포되는 말씀의 현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성도들의 마음과 생활 속에서 놀라운 치유의 역사가 일어난다. 말씀이 있는 곳마다 고침의 역사는 일어난다. 마음의 완악함은 이 치료의 역사를 가로막는다. 사람이 고침 받아 온전하게 되는 것을 마귀가 싫어하기에 모든 것을 닫아 걸어버린다. 귀도 닫고 마음도 닫고 영도 닫는다. 열어야 산다. 완고함을 버려야 모든 것이 열린다. 귀도 열리고 마음도 열리고 영도 열려서 전인적인 치료의 축복을 얻을 수 있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13:15)

말씀을 들을 때 내적인 마음 자세나 영의 태도도 중요하지만 몸가짐 또한 소홀이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바른 자세에 바른 정신이 깃들고 올바른 몸가짐에 반듯한 영성이 깃든다. 역으로 생각해도 마찬가지이다. 영이 반듯하면 마음도 올곧다. 마음이 올곧으면 몸도 흐트러지지 않는다. 이는 하찮게 여길 일이 아니다. 필연적으로 몸가짐, 마음의 태도, 영적 자세를 바르게 가져야 한다. 말씀을 듣는 태도는 말씀의 수용성과 흡인력에 힘을 보탠다. 말씀을 들음에 있어 외적인 자세와 태도는 내적인 상태만큼 그 비중이 크다.

대언의 말씀을 들으려면 우선 듣는 몸의 자세를 바르게 해야 한다. 빼곡히 들어찬 기둥들로 떠받쳐진 건물이 있다 상상하자. 삐딱하게 세워진 기둥들을 지나가려면 몸도 삐딱하게 눕혀야 한다. 이마를 부딪치지 않으려면 기둥의 기울기만큼 삐딱하게 몸을 맞추어야 한다. 불량한 자세는 말씀 수용에 있어 나쁜 영향을 미친다. 비록 눈에 보이지 않고 외부에 드러나지 않지만 불량한 자세가 말씀의 흐름에 부정적으로 작용하리라는 것은 짐작키 어려운 일이 아니다. 비뚤어진 청중의 자세나 태도는 말씀 전파자의 눈을 거스른다. 이는 설교자의 집중력을 떨어뜨려 나머지 회중들의 영적 복지를 해하는 결과를 낳는다. 앉는 자리에서부터 몸의 자세에 이르기까지 좋은 태도를 유지하는 것은 만만히 볼 일이 아니다. 말씀을 들을 때 바른 자세를 유지하는 것은 은혜 받는 입장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몸이 삐딱하면 말씀도 삐딱하게 들리기 십상이다.

1. 자리를 잘 잡는다.

앞자리부터 앉는 습관을 길러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충만히 임재하시지만 말씀의 작용면에서는 앞이 뒤보다 이점을 갖는다. 설교자들이 앞자리를 강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회의 회중석은 제한되어 있다. 누군가는 앞에 앉고 누군가는 중간이나 뒷자리에 앉아야 한다. 모두가 앞자리를 차지할 수 없지만 적어도 예배에 임하기 전이나 설교 말씀을 듣기 이전에는 앞자리부터 빼곡히 채워가야 한다.

소리의 파장은 거리에 따라 다르다. 반경 10m 이내가 다르고 반경 50m 이내가 같지 않다. 설교자의 음색이라든지 소리의 진동 폭이나 주파수 음역은 가까울수록 유리하다. 청자와 화자가 감정 이입을 하기에도 근거리가 훨씬 낫다. 뒤에 앉은 사람이 앞에 앉은 사람보다 집중력이 떨어지고 설교자와의 친근감도 덜 느낀다. 설교자와의 공간적 친밀감은 영적 접촉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가까운 사람보다 멀리 떨어진 사람이 졸음에도 약하다. 유두고는 멀찌감치 창에 걸터앉았다가 졸음에 빠졌다. 말씀이 선포되는 모든 곳이라면 두말 할 것 없이 앞자리가 가장 좋은 자리이다.

2. 귀를 기울여 듣는다.

가청력을 높여야 한다. 어떤 환경에서도 청자의 말을 놓치지 않으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귀가 있다 해서 모두가 듣는 것은 아니다. 귀가 있어도 들어야 할 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훈련을 통해 가청력을 높이면 어떤 소리도 놓치지 않고 들을 수 있다. 화자는 복선을 깔거나 다중적인 의미를 언어의 굴레에 싸서 말한다. 상대방의 복심을 읽고 말이 지닌 의미를 파악하려면 듣기에 능해야 한다. 시끌벅적한 중에도 핵심적인 단어들을 놓치지 않고 붙들 수 있어야 한다. 폭포 소리에 묻혀서도 풀벌레 소리에 민감할 수 있어야 한다. 폭풍과 지진 속에서도 들려오는 세미한 음성이 설교에 담겨있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가며 들어야 한다. 한 마디도 놓치지 않고 들으려면 집중력을 키워야 한다. 양 귀를 쫑긋이 곤두세우고 가장 작은 소리로부터 큰 고함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 귓가에 대고 속삭이듯 하는 소리도 붙들어야 한다.

 

칠월 일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2-3)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가 외치는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listened attentively). 하나님의 교훈을 듣고(hear) 하나님의 입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listen) 한다. 귀의 들음(hearing) 없이는 마음의 들음(listening)도 없다. 하나님의 입의 말씀을 싸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교훈이다. 겉에 있는 교훈을 들어서 속에 있는 입의 말씀을 듣는다. 많은 사람이 귀의 들음에 머문다. 마음 듣기에 소홀히 한다. 말씀을 귀로 듣는 것도 듣지 않는 완악함에 비해서는 훌륭하고 복되다. 더 훌륭하고 복된 것은 말씀을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귀로 듣는 말씀이 마음의 들음에 이르지 못하면 말씀의 인식 단계에 머무를 뿐 깨달음에 이르는 마음의 인지에는 다다르지 못한다. 단지 귀로 듣기만 한다면 교훈을 통한 유익이야 얻겠지만 말씀이 지닌 생명에 접하지 못한다. 내면으로 듣는 청취의 능력이야말로 말씀 듣기에 있어 절실한 문제다. 아삽은 귀의 들음과 마음의 들음을 잘 구별했다. “듣는 것이 다르고 귀를 기울이는 것이 같지 않다.

 

내 백성이여, 내 교훈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78:1)

 

사람에게 두 귀가 있어 소리를 양쪽 방향에서 들을 수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스테레오로 듣는 음악은 사람을 편안케 한다. 두 귀를 열고 산들바람의 소리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집중력을 보이면 말씀이 마음에 쏙쏙 들어온다. 정확한 주파수에 맞추었을 때 가장 선명한 음질을 느낄 수 있듯 화자의 말씀이 그대로 마음에 전달된다. 소음은 제거되고 투명한 소리를 접한다. 소리의 입자들이 더 이상 나뉠 수 없는 크기에서 미세한 부분들을 남김없이 울려준다. 마음은 백지처럼 붓 가는 대로 정직한 형체를 남긴다. 주의 깊게 듣노라면 말씀의 내용이 빠른 속도로 정리되면서 그 장면들이 입체적으로 전개된다. 상상력이 가미되어 말씀의 의미가 선명히 새겨진다.

양 귀로 들어야 한다.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지 짐승으로서 말씀을 흘려보내서는 안 된다. 우이독경(牛耳讀經)이란 사자성어가 있다. “소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다. 마찬가지이다. 한쪽 귀로 말씀을 들으면서 다른 쪽 귀로 말씀이 빠져나가게 해서는 안 된다. 양쪽 귀로 들어야 들어오는 구멍만 있고 나가는 구멍이 막힌다. 팔짱을 풀고 다리를 꼬지 말아야 한다. 설교단에서 내려다보면 설교 도중에 다리를 꼬는 사람들이 많다. 좋은 자세가 아니다. 중요 인사와 담화를 나눌 때에도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은 상대에 대한 무례이다. 다리를 꼬면 마음까지 꼬인다. 생각도 꼬이고 해석도 꼬인다. 다리를 펴고 반듯이 앉아야 한다.

팔짱을 낀 경우도 종종 있다. 설교자를 부담스럽게 하는 자세 중에서 가장 흉한 것이 팔짱낀 모습이다. 이는 설교자의 시선을 빼앗고 집중력을 흐트러지게 하는 자세이므로 모든 회중의 적이다. 웬만한 사람 앞에서도 팔짱을 까지 못하는데 엄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팔짱끼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도무지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디 뭐라 말하는지 한번 들어나 봅시다.’ ‘웬 사설을 풀려고 그러시나!’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내가 다리를 꼬면 말씀도 꼬인다. 바른 말씀이 바르게 들리기 어렵다. 몸의 자세는 영의 말씀이 들어오는 정도를 강약으로 조절한다. 좋은 자세는 좋게 들리고 나쁜 자세는 나쁘게 듣도록 한다. 이것은 내 의지와 상관없는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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