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6:6를 통해 본 대면예배와 비대면예배의 논란

 

김대운 목사(수원경성교회, 예장 합동
김대운 목사(수원경성교회, 예장 합동

우리는 지난 시간에 요4장과 롬12장 말씀을 통하여 비대면예배가 얼마나 신학적으로 성경적으로 허술한 토대 위에 세워졌는지 살펴보았습니다. 오늘은 위의 두 본문과 비대면 예배론자들이 인용하는 호6:6 말씀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그들은 이 말씀을 인용하여 주께서 우리의 예배보다 도덕적인 삶을 원하신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주장은 결코 본문의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왜곡된 주장입니다. 왜 그런지 함께 생각해 보겠습니다.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6:6)

호세아는 이 한 구절 말씀에서 주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과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비대면예배이고, 원하지 않으시는 것은 대면예배일까요? 이렇게 쉽게 본문이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1. 주님이 원하시지 아니하시는 것.

주님은 제사나 번제를 원하시지 않는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결코 제사나 번제 자체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종교적 형식으로 치우친 제사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제사나 번제는 단번에 영원히 우리 죄를 사하실 그리스도의 대속 제사를 조명하기 위하여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주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는 주장은 성경 전체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자의적 해석이요 심각한 왜곡입니다.

모든 율법, 특별히 성전 제사와 관련된 의식법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는 우리의 무능력함을 깨닫게 하려고 주어졌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주님의 법을 완벽히 지킬 수 없으므로 죄를 범할 때마다 절망하게 되고, 아무리 많은 제물을 드려도 해결될 수 없는 자신의 죄 문제를 인하여 이 율법의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아의 출현을 고대하게 됩니다. 이것이 율법이 주어진 목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제사는 어떠했습니까? 세속에 깊이 빠져 우상숭배와 겸하여 드리는 제사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여호와께 드리는 제단과 함께 각종 우상의 제단들도 함께 있어서 주님의 단과 각종 우상의 단에 함께 재물이 드려졌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주님께 드리는 제물은 그저 형식적인 제사에 불과했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주님의 거부를 선언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나,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과 돌이킴으로 드리는 제사, 이 죄 문제를 영원히 해결해주실 그리스도의 도래를 바라보는 제사를 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제사를 받지 않겠다고 말씀하신 것이었지, 제사 자체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 형식적인 제사를 드리며 우상을 함께 섬기는 사람들이 그 삶에서 얼마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겠습니까? 율법의 명령을 따라서 이웃을 돌아보는 일에 신경이나 쓸까요? 정반대로 자신의 이기심을 더 채우기 위하여 혈안이 될까요? 여기에 거짓 선지자들이 회개와 돌이킴보다는 평화와 번영을 외쳐대면서 이들의 타락을 더욱 부추겼습니다. 그래서 이런 형식적인 제사와 우상숭배를 거부하신 것이었습니다. 말라기서에서는 누가 성전 문 좀 닫았으면 좋겠다는 말씀까지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이런 차원에서 보았을 때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주신 이 말씀은 제사 자체를 싫어하신다는 말씀이 아니었습니다. 우상숭배와 겸하여 드리는 제사, 형식적인 제사에 대한 거부의 의미와 함께 진정한 제사, 율법의 규정을 따라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애통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제사를 원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주께서 우리에게 원하시지 않는 예배가 어떤 것이겠습니까? 형식적인 예배입니다. 그런데 대면예배는 이처럼 주께서 원하시지 않는 예배고, 비대면예배는 주께서 원하시는 예배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객관적인 답을 찾으려면 과연 집에서 영상을 보면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지 생각해 보셔야 합니다.

영상을 통해서는 우선 예배의 회중으로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공중 앞에서의 공동 신앙고백, 학습 세례 예식, 성찬 예식 등을 거행할 수가 없습니다. 영상으로 기독교 교육은 가능하나 예배 자체는 불가능합니다. 예배는 보는 것이 아니죠? 회중의 일원으로 참여하여 주님께 경배하는 종교 행위입니다.

사실 비대면예배는 말만 예배지, 실지로는 예배 현장의 중계방송을 시청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는 예배의 회중으로 참여하는 것이 아닌 시청하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집에서 예배를 보는 사람의 마음 자세가 과연 예배당에 나와서 드리는 예배만큼 경건할 수 있을까요? 자신이 하나님 앞에 나왔다는 두려운 의식을 갖고 예배에 집중할 수 있을까요? 물론 예배 현장에 나와서 예배를 드릴 때와 똑같은 마음과 자세로 예배를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할지라도 여전히 회중으로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아닌 여전히 시청자로 영상을 보는 것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한 가지 더 영상예배의 위험성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바로 비대면 예배는 우상숭배로 이끄는 위험성을 갖고 있습니다. 이 명제를 받아들이기 어려운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드리는 말씀을 차근차근 잘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앞서 우리가 한 번 살펴봤듯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성경이 명령하지 않은 예배는 어떤 선한 의도를 갖고 있어도 영적 매춘행위로 규정하였습니다.

우상숭배란 인격체이신 하나님을 대체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경배하는 행위를 가리킵니다.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은 석상, 목상, 동상, 금상 등 여러 가지 형상 앞에 경배했습니다. 로마천주교에서도 마리아와 예수님을 비롯한 성인들의 형상을 만들었고 로마천주교 신자들은 그 동상 앞에서 혹은 그 동상을 손으로 만지면서 기도를 드립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성인숭배를 우상숭배로 규정하여 모든 형상들을 제거하였습니다.

그런데 영상에 접속한 사람들을 그 예배의 참여자로 간주하여 그 영상을 보고 경배하고 기도하게 합니다. 예배의 회중으로 포함할 수 없는 대상을 회중으로 포함해서 영상을 보고 경배하고 기도하게 하는 행위는 결국 현대문명이 만들어 낸 영상이라는 형상 앞에 경배하게 하는 우상숭배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위험성을 간과한 채 영상예배를 드린 성도들도 예배에 참여한 것이라고 눈감아 주고 그들의 양심의 고통을 덜어주는 일이 과연 올바른 자세인지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성도들의 신앙을 형식적인 신앙인, 주께서 원하시지 않는 예배를 드리도록 이끄는 비대면 영상예배를 어떻게 추천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예배야말로 주께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하신 형식적인 예배로 나아갈 위험성이 농후하지 않습니까? 주님은 제사 자체를 원하지 않으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식적인 제사를 원하시지 않으셨다는 말씀으로 이는 곧 진정한 제사, 진정한 예배를 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보았을 때 비대면 영상예배가 원하시지 않는 형식적인 예배 아니겠습니까?

 

2. 주님이 원하시는 것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인애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호세아서는 창기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주님을 떠난 이스라엘을 향한 주님의 사랑을 보여주었습니다. 주님을 떠난 그들을 다시 돌이켜 주님의 거룩하고 구별된 백성으로 회복시키겠다는 주님의 언약에 대한 신실함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죄악 된 본성으로 주님을 떠난 자들을 돌이키셔서 주님을 기쁨으로 섬기는 백성으로 회복시키겠다는 주님의 일방적인 은혜를 조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거룩한 백성으로 회복시키시는 거룩하신 주님의 열심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토록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주님께 어떻게 나와야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정말 사랑하는 사람을 비대면으로 교제할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비대면으로 인격적인 갈망이 채워질까요? 군대에 간 아들과 영상통화만으로 만족할 수 있을까요? 매일 영상통화를 해도 직접 만나고 싶지 않겠습니까?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외국인들 보면 늘 가족들과 영상통화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과연 그런 비대면 통화에 만족할까요? 아니면 많은 돈이 들어가도 직접 가서 만나고 싶을까요?

만약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가 그 아들에게, 해외에 출장 가서 오랜 시간 동안 집에 오지 못하는 아빠에게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 “집에 오지 마, 안 와도 돼”, “우리 영상으로 비대면으로 늘 대화하는데, 뭐 하러 와. 힘들고 돈 들잖아이렇게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당장 화내지 않을까요?

인격적인 하나님을 어떻게 영상으로 만나고 예배할 수 있겠습니까? 예배 자체가 인격적인 대면 행위입니다. 구속받은 주의 백성들이 함께 주님을 대면하여 주님의 은혜를 높이는 행위가 예배입니다. 그런데 그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고 영상을 보고 기도하고 경배한다고요?

이러한 이유로 그동안 신학자들은 영상예배, 인터넷 예배를 성경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예배, 인간의 편의를 위하여 고안된 예배, 영적 매춘행위로까지 규정하였습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대신 측 교회 생활 바른 용어집에서는 이 영상예배가 결국 우리 한국교회를 서구의 교회들처럼 쇠락으로 이끌 것이라고 경고하였습니다.

그들의 주장대로 영상예배가 진짜 예배라고 한다면 이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만남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그 열매가 어떻게 나타나고 있을까요? 비대면 영상예배가 지속되자 이제 현장 예배를 갈망하는 신자들과 영상예배의 편리함에 익숙해진 신자들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튜브를 통하여 자신의 교회 영상만 아니라 더 은혜로운(?) 교회 영상에 접속할 수 있으니 그 달콤한 유혹을 어떻게 성도들이 이겨낼 수 있겠습니까? 실제로 소속된 교회 영상에 접속한 사람들의 수가 예상외로 너무 적은 교회들이 속출하는가 하면, 예상보다 몇 배의 수가 접속하여 교역자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현상이 이제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렇게 비대면 영상예배는 교회의 몸과 그 몸의 지체됨이라는 인격적 관계를 완전히 허물어 버리는 심각한 부작용을 낳고 있습니다.

과연 영상예배라는 편리함을 맛본 교인들이 과연 교회에 나올 수 있을까요? 이웃사랑을 내세워 교회에 나오지 않는 교인들과 편리함에 중독된 교인들, 다른 교회의 예배 영상에 접속하여 교회의 공동체성과 인격성을 허무는 일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교인들에게서 얼마나 인애와 자비를 기대할 수 있을까요? 이들에게 신앙은 삶으로 입증해야 할 무엇이 아닌 그저 하나의 종교적 장식품에 지나지 않다고 말하면 지나친 표현일까요?

주님께서 원하시는 인애, 자비를 베푸는 삶은 단순한 도덕적 삶이 아닙니다. 주님과의 인격적인 교제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따라서 이는 인격적인 주님과의 교제 없이 기대할 수 없는 열매입니다.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 없이 나오는 도덕적인 삶이 있다면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위선에 불과합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인애는 결국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알게 된 주님의 뜻의 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인애, 자비를 베푸는 삶을 살기 위하여 주님과의 인격적인 만남, 성도들과의 인격적인 만남인 공 예배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는 짧은 지면을 통하여 호세아 6:6 말씀이 비대면예배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하였습니다. 주께서 원하시지 않는 것은 제사 자체가 아닌 형식적인 제사입니다. 주께서 원하시는 것은 주님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하여 주님의 뜻을 알고 그 뜻을 따라 인애 베푸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볼 때 비대면 예배야말로 주께서 원하시지 않는 예배의 방식입니다. 교회와 교인의 인격적 관계를 파괴하는 치명적 결함을 안고 있는 예배의 방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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