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8:1-11절, 간음 중에 잡힌 여자(Pericope de adultera)

“많은 헬라어 사본과 고대 역본들이 이 부분을 생략하고 있지만, Byz D itd e ff2 vg copbo-mss fay 등에 있다. 문맥적으로 보아도, 이 부분이 없으면, 본문은 화난 공회원들이 모여 있는 장소로부터 예수께서 성전뜰 연보궤 앞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는 장면으로 매우 부자연스럽게 이어진다”(김효성).

“요 7:53-8:11까지의 기사는, 사본상 문제가 있는 부분이 다. 이 중요한 사본들(B, L, T, W)에는 없고, 중요하지 않는 사본들(D, E)에만 있을 뿐이다. 알포도(Alford)와 하스킨스(Hoskyns)는 말하기를, 이 부분이 진정한 역사성을 띠었지만 요한의 친필은 아니고, 구전적(口傳的)으로 돌아가던 것이 여기에 삽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부분(7:53-8:11)의 순정성(純正性)을 변호한 학자들도 있다(I. W. Burgon, C. H. Van Herwerden, J. J. Van Oesterzee etc)”[호크마 주석].

마이어 박사는 “많은 고대 사본에 이 부분이 없다(이집트 본문 그룹). 한 사본에는 이 이야기가 7:36 다음에 있고, 한 그룹의 사본에는 21:23 다음에, 어떤 사본 그룹에는 누가복음 21:38 다음에 있다. 대부분 사본에는 요 7:52 다음에 있다. 이 본문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떻게 성경에 들어오게 되었는지를 추적하기는 쉽지 않다.(중략) 

첫째, 이 본문은 매우 오래된 예수님 전승에 속하는데, 늦어도 2세기에는 그의 존재가 확인된다. 

둘째, 이 본문은 원래 요한복음에는 없었으나 나중에 삽입되었다. 우리는 이 부분이 믿음직하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아마도 이것은 소아시사에서 요한의 제자들이 적어 넣은 것 같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파피아스와 아리스티온이 그 제자에 속한다. 어째든 파피아스(주후 125년경)가 이 본문을 알고 있었다. 혹시 그가 이 이야기를 자기 스승 요한이 기록한 요한복음에 추가했는지도 모른다”(마이어, 『요한복음 주석』, 359-360)

[요 8:1-5절] 예수는 감람산(橄欖山, the Mount of Olives)으로 가시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니 백성이 다 나아오는지라 앉으사 저희를 가르치시더니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姦淫 中, in adultery)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Teacher, Διδάσκαλε),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 동쪽에 있는 815m의 산이다. 감람산에는 감람(올리브)이 많은 동산이고, 지금도 2,000년된 감람 나무가 많이 있다. 예수께서는 그 밤에 감람산에서 기도하며 지내셨던 것 같다. 예수는 항상 기도에 힘쓰셨다. 예수께서는 마지막 날에 감람산(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고, 승천하신 장소도 감람산이다.

아침에 다시 성전으로 들어오시자 백성들이 그에게 나아왔고 그는 앉으셔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예수께서는 구약을 해석하시며 백성에게 자신이 그이(인자)임을 가르쳤을 것이다. 도무지 알아듣지 못하는 백성을 향해서 생명으로 가르치쳤다.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간음 중에 잡힌 한 여자를 끌고 왔다. 명절에 간음 사건이 발생한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렵다.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예수께 “선생(Διδάσκαλε, διδάσκαλος)”이라고 부르며 시험하였다. διδάσκαλος는 히브리어(라비, רבב)의 헬라어 번역으로 보이고, 랍비(ραββι)는 히브리어를 헬라어 음가로 사용한 것이다.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하며 예수께 말했다. 당시 유대인들은 모세가 율법(Torah, 오경)을 기록했다고 믿었는데, 지금 친 유대적 사상인 새관점학파에서는 모세의 오경저작설에 대해서 신뢰하지 않는다.

구약성경에서 간음죄는 현장범인으로 재판이 필요없이 목격자가 돌로 쳐서 공동체에서 제거시켜야 한다. 그런데 율법데로 행하지 않고 예수 앞으로 끌고 온 목적은 무엇인가? 구구절절이 해설을 하면 민중들은 이해하지 못하며 군중논리에 의해서 정죄될 것이다. 예수는 그들이 율법을 어긴 사안에 대해서 줄줄이 열거하는 것도 문제이며, 죄가 있지만 용서하자고 주장하는 것도 문제이다.

[요 8:6-8절]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告訴할 條件, a basis for accusing)을 얻고자 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 고소->고발, 조건-근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하나님과 동등되다고 주장하는 예수를 미워하여 죽이려고 하였다. 먼저 예수를 좋아하는 민중들의 지지 기반을 상쇄시키려고 예수를 시험한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민중들의 이반으로 보아야 한다. 지도자들의 획책에 민중들이 속아 군중논리에 의해서 빌라도 법정까지 점령하여 십자가에 단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시험을 충분히 이길 수 있었지만 그 법정에서 침묵하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셨다. 성전 법정에서도 예수께서 어떤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 예수께서 땅에 쓰신 글을 보고 모두 입을 열 수 없었다. 마이어 박사는 다니엘(단 5:5)서에서 등장한 벽에 나타난 손가락(메네 메네 데겔 우르바신)을 상상하였다.

예수는 땅에 먼저 쓰셨고(started to write on the ground with his finger, 6절), 일어나서 죄없는 자(Ὁ ἀναμάρτητος)가 돌로 치라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셔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셨다(Again he stooped down and wrote on the ground, 8절).

[요 8:9-10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ἀκούσαντες) 양심의 가책(良心의 呵責)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only Jesus)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γυναικὸς)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Γύναι),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 “양심의 가책(τῆς συνειδήσεως ἐλεγχόμενοι, their own conscience)”은 Geneva, KJV 번역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께서 땅에 쓰신 것을 본 그들에게 읽었다가 아닌 "들었다(heard)"고 표현한 것은 특이한 것이다. 예수께서 땅에 쓰신 것을 들은 사람들은 어른(나이든 사람)부터 시작해서 가장 어린 사람까지 돌을 놓고 나갔다(beginning at the eldest even to the last). 마이어 박사는 “나이는 어리석음에서 보호하지 못한다”는 독일 격언을 밝혔다.

예수께서 손가락으로 땅에 쓰신 것은 지혜로운 어론도 반박이 아닌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오히려 돌을 놓고 그곳을 빠져나갔다. 어른이면 젊은이에게 방향을 주어야 하는데, 그냥 혼자서 나가버렸다.

모두가 가 버리고 오직 예수(μόνος ὁ Ἰησοῦς)만 남았고, 여인(ἡ γυνὴ)은 거기에서 떠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는 일어나사 그 여자를 정죄하던 자들이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 8:11절]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여인은 예수를 주(κύριε)라고 고백하며 없다고 말하였다(11절). 예수께서는 그 여자를 죽음에서 건져주시며 정죄(定罪, condemn)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시 죄(sin, ἁμάρτανε)를 범치 말라고 하셨다(11절).

예수께서 그 여인을 정죄하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사법적 정의는 우리 법정에서 잘 활용되고 있다. 불법으로 수집한 증거는 증거 능력이 없다. 여인이 불법한 것은 실체이지만, 고발한 사람들이 불법으로 여인을 고발하였기 때문에 정죄할 수 없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다시 죄를 범하지 말도록 명령하셨다. 죄악을 싫어하시는 주 하나님께서 죄를 판단하지 않으시며, 죄를 짓지 말도록 판단하셨다. 죄를 판단하는 목적은 죄인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한 자가 다시 악을 행하지 않도록 하는 것에 있다.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는 말씀은 “더 이상 죄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죄에 대한 의미를 명확하게 결정하기는 쉽지 않다. 우리는 죄를 행동의 결정체로 파악하고 있다. 그런데 악을 행하면서 죄의식이 없는 사람이 없는데, 악을 행하면서 그것을 선이라고 착각하거나 정당화하는 사람은 악의 화신이다. 우리사회에서는 소시오패스(sociopath, 반사회적인격장애-인지는 있음), 사이코패스(psychopath, 반사회적인격장애-감정이 없음) 등이 있다.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어떤 죄의식이 없도록 하는 것과 함께 다시는 유사한 악을 행하지 않도록 명령하신 것이다. 무죄를 판결받았기 때문에 그 행위에 대해서 죄의식이 있는 것은 판결에 대한 의심이 되어, 판결자에 대한 불신이다.

1절로 11절까지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모든 사람은 죽을 죄인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주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다 죽을 죄인임을 깨닫게 하시는 말씀이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이든지, 그를 붙잡아 와서 예수 앞에 두고 예수를 정죄할 거리를 찾고 있는 유대 지도자들이든지, 방황하는 일반 대중이든지, 모든 사람은 다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울 죄인들이다. 예수 앞에 있는 죄인인가? 예수를 떠난 죄인인가?가 중요하다. 예수께 죄사함의 판결을 받고 떠난 사람은 의인이다.

둘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여인을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는 죄인들을 심판하기 위해 오지 않으셨고, 죄인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오셨다. 그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도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는 우리 같은 죄인도 정죄치 않으시고 구원하셨다. 복음은 죄인들을 죄와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는 말씀이다. 누구든지 그에게로 나아와 그를 믿으면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다.

셋째, 예수께 용서함받은 자들은 다시는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주께서는 그 여인에게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구원과 거룩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멸망시키기 위해 오지 않으셨고 그들을 죄에서 건져내어 다시는 죄를 짓지 않는 거룩한 백성을 만들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한 삶이다.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고 거룩해졌다.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고 성도(聖徒, saints)가 되었다. 우리는 이제 그 의와 거룩 안에서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요 8:12-20절, 나는 세상의 빛이라(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요 8:12절] 예수께서 또 일러 가라사대 나는 세상의 빛(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τὸ φῶς τῆς ζωῆς)을 얻으리라.

성전뜰에서 앉아서 무리를 가르치시던 주께서는,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끌어와 그를 시험하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 때문에 잠시 방해를 받으셨으나 다시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그 여자를 정죄하던 자들은 다 떠나갔으나 그의 가르침을 듣던 사람들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세상의 빛(요 1:4)이 생명의 빛이다. 예수는 생명의 빛이시다.

빛이 어둠에 왔으나 어둠은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시기로 작정한 자들은 그 빛을 생명으로 받는다.

성경에서 빛은 생명과 기쁨을 상징한다(창 1장). 빛은 창조의 기준이고 생명의 근원이고 생활의 기준이다. 어두움은 무지로서 슬픔과 죽음을 상징한다. 개혁된 교회는 명료한 영적 지식과 명료한 삶을 추구한다. 이사야는 이방의 빛이 될 메시아에 대해 예언하였다(사 42:6; 49:6).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이다. 세상의 누구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없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빛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취고 있다. 그 빛은 영원한 생명의 빛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자들은 그 빛을 받아 영원한 생명의 복을 얻는다. 구원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4:6, “어두운 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에베소서 5:8,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요 8:13-14절] [그러므로](원문, KJV, NASB)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거하니 네 증거는 참(true/valid)되지 아니하도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내 증거가 참되니 [이는]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앎이어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못함이니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 자기를 자기가 증거하기 때문에 참되지 않다고 주장하였다(13절). 바리새인의 주장은 타당하다. 그러나 예수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그렇게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리새인의 주장이 타당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미혹되었다. 타당하게 보이는 주장이 미혹하는 올무가 될 수 있다. 에고 에이미로 하신 말씀에 정면으로 반박하고 거부하며 다른 사람에게 그것을 가르쳤다.

예수께서 바리새인에게 자신의 말이 참된 것을 밝히셨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기 때문”에 자기증거가 참되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는 스스로 아는 것이며, 우리는 계시에 의존해서 아는 것이다. 참지식의 근원에서 아는 것이다. 그래도 진리를 알면 자유를 얻는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온 사람 즉 신적 구주이시며 세상을 구원할 사명을 가지고 세상에 온 어린양이심을 밝히신다. 그리고 부활하고 승천하여 하나님 오른편에 앉으실 것을 암시한다. 예수님의 증거는 사람들의 어떤 증거와도 같지 않다. 그는 신성(神性)을 가진 하나님으로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그것은 사람의 그 어떤 최선의 증거보다 더 힘이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증거는 세상에서 가장 힘있고 완전한 증거일 것이다.

[요 8:15절]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κρίνω)치 아니하노라.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이 자기를 판단하는 근거는 육체(human standards/flesh)를 따른 판단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밝히셨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외모로 판단하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사람들을 정죄하기 위하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고 구원하기 위하여 오셨기 때문이다(요 3:17). 예수께서는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힌 여인까지도 정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날에 사람들을 공의로 심판하실 것이다(16절 이하).

[요 8:16-18절] [그러나](원문) 만일 내가 판단(κρίνω, judge)하여도 내 판단(κρίσις, judgement)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아버지]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거가 참되다 기록하였으니 내가 나를 위하여(about myself, περὶ ἐμαυτοῦ) 증거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about me, περὶ ἐμοῦ) 증거하시느니라. ※ περὶ ἐμαυτοῦ, about myself(ESV), NIV에서는 for myself, KJV는 of myself로 번역하였다.

예수께서는 판단하지 않지만 판단하신다고 말씀하시며, 참됨을 밝히셨다. 예수께서 판단(judge)하고 판결(judgemnet)한 것은 참(true)이다. 그것은 예수의 판결은 혼자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는 율법을 밝히며 자기 증거를 밝히셨다. 주 하나님의 겸비는 율법의 제정자께서 율법 집행자에게 설명하며 설득하는 것이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율법 교사로 존경받는 사람이었는데, 그들이 율법의 제정자를 모르고 있으며, 율법도 모르고 있다. 예수님의 특이한 말씀은 신비롭다. 두 명의 증인이 요구될 때 아버지와 나(myself)의 증거로 참됨을 밝히신 것이다. 아버지는 타자로 보이기 때문에 괜찮은데, 자기 증거를 자기가 하는 것이 어떻게 2 사람이 될까? 성육신하신 예수를 증거하는 이는 성자의 신격 혹은 신성으로 볼 수 있겠다. 예수께서 자신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가 세상에 온 사실에 대해 율법의 요구대로 두 증인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하나는 자기 자신이요 다른 하나는 아버지이시라고 말씀하셨다. 아버지의 증언으로 확실할 것인데,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셨다. 율법의 요구를 충족하신 것은 의이며 율법 교사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하나님의 열심이다. 아버지께서는 예수께서 세례 받으실 때 또 그가 베드로, 야고보, 요한과 함께 높은 산에 올라가셨을 때 친 음성으로 아들 예수에 대해 증거하셨다(마 3:16-17; 17:5).

[요 8:19절] 이에 저희가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바리새인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물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자기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명료한 논리 순서이다. 아들을 알아야 아버지를 안다. 아들을 믿어야 아버지를 믿는다.

눈에 보이는 예수,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유대인들은 자기가 믿는다고 주장하는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것이다.

[요 8:20절]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연보궤(捐補櫃)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ὥρα)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가르치신 장소를 밝혔다. 그곳은 연보궤 앞이었다. 연보궤(the treasury) 앞은 많은 사람이 드나드는 곳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예수께서는 이처럼 공적인 장소에서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다. 아무것도 은밀한 것은 없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공개적으로 자기를 증거하셨다. 그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신적 구주로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으시다. 그에게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어두움에서 구원을 받고 영원한 생명의 빛을 받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렇게 자신에 대해 증거하셨으나 잡는 사람은 없었다. 이는 그의 때(ὥρα)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었다. 바리새인들은 그를 믿지 않았고 그를 잡아죽이려 하였으나, 아직 그를 해칠 힘은 없었다. 그것은 아직 그가 잡히실 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를 잡거나 죽일 수 있는 주체가 없음을 밝히시고 있다. 그 예수께서 죽으신 것은 무능 때문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한 것이다. 인간의 생명도 연한이 있지만 그 때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고 하나님의 정하신 시간에 있다. 모든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생의 기한이 있다. 그 기한이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되면 아무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우리가 복잡한 세상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 앞에서도 평안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이런 확신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일생을 작정하셨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이시다. 빛은 지식과 의와 기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생에 대한 또 구원과 영생에 대한 참 지식을 주셨고 죄인인 우리에게 의(義)를 주셨고 슬픔과 근심이 많은 세상에 사는 우리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셨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소식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다. 그를 믿는 자마다 구원을 받아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진다. 아직도 어두움 속에 사는 자는 없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받았는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므로 참 지식과 의와 기쁨을 얻으라. 또 우리는 이 빛을 다른 이들에게도 널리 전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발자취를 따르자. 세상의 빛과 생명이신 구주께서 오셨지만, 바리새인들은 그를 무시하고 그와 변론하며 그를 영접하지 않고 대적하였다. 유대 지도자들은 마침내 그를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는 세상에 오셔서 존경과 영광을 받으시기보다 멸시와 고난을 받으셨다. 그는 마침내 정죄되셨고 십자가에 달려 수치와 고통과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다. 이것이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신 길이었다. 그러므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는 세상에서 칭찬과 영광을 기대하지 말고 또 자신의 자존심을 크게 여기지 말고,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멸시와 천대와 모욕과 고난을 받기를 각오해야 한다.

셋째, 예수께서는 세상에서는 유능하지만 영적으로 전혀 무지한 바리새인을 향해서 생명을 걸고 가르치셨다. 잃어버린 자를 얻기 위해서 하나도 잃지 않기 위에서 가장 위험한 곳에서 과감없이 복음을 가르치셨다.

 

●요 8:21-30절, 아버지의 가르침은 보내신 자를 믿는 것, 예수영생 불신죽음

[요 8:21절] [예수께서는] 다시 이르시되 내가 가리니 너희가 나를 찾다가 너희 죄(τῇ ἁμαρτίᾳ) 가운데서 죽겠고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예수께서는 자신이 가실 것을 말씀하셨다. 그것은 그가 아버지께로 즉 천국으로 돌아가시는 것을 의미하였다(7:33; 8:14). 예수는 왜 오심과 어떻게 가심에 대해서 아셨다. 예수님이 가신 것은 십자가의 죽음이지만, 부활하셔서 승천하시기 때문에 알지 못한다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백성을 살리기 위한 죽음이고, 유대인들이 죽은 것은 죄 가운데서 죽은 것이다. 죄 가운데서 죽은 자들은 예수께 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죽은 자들은 예수께 나온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기회를 저버리면 다시는 회개치 못하고 믿지 못하고 죄사함을 받지 못하고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마이어 박사는 ‘죄’가 단수형이기 때문에, 메시아를 거부하고 죽이는 것으로 주해하였다. ὅπου ἐγὼ ὑπάγω ὑμεῖς οὐ δύνασθε ἐλθεῖν “원문을 보면 나와 너희는 날카톱게 대죄되어 있다”(마이어, 378).

[요 8:22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저가 나의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 하니 저가 자결[자살]하려는가?

그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것인가라고 생각했다. 마이어 박사는 유대인들이 예수를 조롱하는 것으로 제시하였다(마이어, 378).

[요 8:2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I am from above)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는 유대인들이 수근거림에 대해서 자살을 의미하지 않고, 자기가 세상에 속하지 않음으로 밝히셨다. 예수님은 위에서 오셨다(ἐγὼ ἐκ τῶν ἄνω εἰμί, I am from above).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선민이라는 의식이 있었지만, 위로부터 오신 자는 오직 한 분 인자 예수셨다. 유대인들이 아무리 선민을 강조해도 아래(from below), 세상(this world)에 속한 자였다. 예수님은 위(from above)에서 또한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ἐγὼ οὐκ εἰμὶ ἐκ τοῦ κόσμου τούτου).

예수께서 자기를 명료하게 밝히시며, 예수의 자기 증거는 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예수의 자기증거를 부정하였고, 상승기독론(from below to above, von unten nach oben, Aufstiegschristologie), 은닉기독론, 간접기독론을 제안하였고, 우리시대에 성경을 읽는 신학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자기를 명료하게 밝히시는 예수, 위로부터 기독론(하강기독론, Abstiegschristologie, from above to below)이다. 예수는 세상에 오셨지만 육체, 세상에 속하지 않으셨다. 어둠(세상)은 빛을 깨닫지 못하였고, 빛을 죽였다. 그러나 빛은 죽지 않았고 참빛을 비취신다.

[요 8:24절] 이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ἁμαρτίαις)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ἐγώ εἰμι)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확증하셨다. 그러나 그 죽음의 길에서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었다. 예수를 믿지 않는다면(γὰρ μὴ πιστεύση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는 죄사함의 구원을 얻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을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을 것이다(요 3:36).

[요 8:25절] 저희가 말하되 네가 누구냐?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그들은 예수께 정체성을 물었다(Who are you?). 그런데 예수님은 처음부터 자신에 대해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예수는 믿는 자에게 영생의 근원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밤에 그를 찾아왔던 니고데모에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3:16). 그는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믿고 있었던 수가성 여인에게 “내가 그로라”고 말씀하셨다(요 4:26). 그는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38년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에 유대인들과 변론하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셨다(요 5:17-18). 이와 같이, 예수께서는 처음부터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임을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증거하셨다.

[요 8:26-27절] 내가 너희를 대하여 말하고 판단할 것이 많으나 나를 보내신 이가 참되시매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 하시되 저희는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는 앞에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러나 그들은 판단받을 것이 많았다. 그러나 예수는 자기를 보내신 이의 참을 수행하는 아들, 종이었다.

보냄을 받은 인자는 보내신 자의 증언으로 세상에 말씀하셨다. 아들이 전한 말씀을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으로 받아야 한다. 예수는 깨닫지 못하는 이들을 향해서 끝까지 전하였고, 십자가에 매달리시기까지 전하셨다. 마지막까지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사죄를 구하셨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전하신 것이 모두 참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마지막까지 깨닫지 못하였고 예수를 죽였다. 그런데 그 잘못을 2,000년이 지난 뒤에도 깨닫지 않고 있으며, 예수를 죽인 것에 대해서 반성이 없다. 왜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하는가? 왜 빛은 어둠에게 설득하며 고난을 당하면서 끝까지 설득하는가?

[요 8:28절]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는 인자(人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유대인들이 지금은 예수님에 대해 알지 못하고 있으나 그들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후에는 그를 알게 될 것이다. 십자가는 유대인에게 인류에게 주신 마지막 대답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세상 안에 있고, 지금까지 그 자리는 보존되어 있다. 인자는 십자가에 들릴 세상죄를 지신 어린양이시다.

십자가의 어린양을 구주로 믿는 자들은 그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로 믿는다. 그리고 그가 가르치신 것은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알 것이다. 아버지의 뜻은 자기가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3일 만에 부활하시고 40일 만에 승천하신 후 오순절이 되었을 때 사도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마음의 찔림을 받았고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 그 날 3천명이나 세례를 받았다(행 2:36-37, 41). 교회는 예수를 믿고 전하였다.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해서 교회는 논쟁하였고, 자유주의에서는 예수를 믿지 않기로 합의하고 배우고 따르는 것으로 뜻을 모았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을 알아야 한다.

[요 8:29-30절]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아버지께서](전통사본)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신 이와 함께하신다고 밝혔다(The one who sent me is with me, 29절). 예수님은 항상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 예수님은 자기를 믿도록 사람들에게 주장하셨다. 예수의 주장을 믿는 자가 없었지만 아버지는 기뻐하셨다. 그리고 예수와 함께 하셨다. 아버지께서는 항상 보내신 자와 함께 계시고 그를 혼자 두지 않으셨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는 버림을 받으셨고 배척을 받으셨으나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와 항상 함께하셨다. 이 말씀을 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many believed in him).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구원의 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때가 있다. 죄인들을 긍휼히 여기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거두어지고 천국문이 닫힐 때가 올 것이다. 죄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나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때가 올 것이다.

둘째,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확신하자.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시며 신적 구주이시며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심과 인간의 목마름을 해소시켜 주실 유일한 구주이시며 어두운 세상에 빛이심을 믿어야 한다. 우리는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는 주의 간곡한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확신하자. 예수께서는 유대교인들에게 이 말씀을 하셨다. 다른 종교인들은 물론이고, 유대교인들도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멸망을 당할 것이다.

셋째,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천국에서 영생 복락을 누릴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할 것이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 곧 중생한 자들이며 그들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항상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의 도우심을 체험할 것이며, 비록 세상에서 배척과 핍박을 받을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하시며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는 자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며 죄인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영원한 지옥 형벌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요 8:31-36절, 죄로부터의 자유

[요 8:31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To the Jews who had believed him)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씀을 믿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의 제자는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거하(hold to my teaching/word)는 사람이다. Abide in Christ 예수님의 말씀은 자기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항상 함께하시는 것이며 자기를 증거하시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것은 자기가 보낸 자를 믿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가 친히 하신 말씀들과 그에 관한 사도들의 모든 말씀들을 다 포함한다. 그것이 곧 신약성경이다. 성경적 기독교는 바로 성경 교훈 위에 바로 선 기독교이다. 성경을 벗어난 말을 하는 기독교는 참 기독교가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진 자들은 대략 네 부류로 나뉜다. 첫째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성경보다 중요시하는 자유주의이며, 둘째는 신비적 경험을 추구하는 은사주의이며, 셋째는 성경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유주의와 은사주의를 포용하는 타협적 복음주의이며, 넷째는 성경적 교훈 안에 거해야 한다고 믿고 그대로 행하는 입장이다. 모두 기독교 안에 있는 사조이지만 그 길을 따르면 안 된다. 오늘날 우리가 갈 길은 좁은길이다. 좁은길은 아버지의 가르침, 그의 아들을 믿는 것이다.

[요 8:32절]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καὶ γνώσεσθε τὴν ἀλήθειαν, καὶ ἡ ἀλήθεια ἐλευθερώσει ὑμᾶς).

예수께서는 또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다.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며(요 14:6) 그의 말씀과 그에 관한 말씀이다. 진리는 진리의 영, 성령이시다.

구원의 복음이 진리의 말씀이다(엡 1:13). 복음의 요지는, 사람이 죄인이며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지만,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십자가에 대속 제물로 주셨으므로 그를 믿음으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과 영생을 얻는 것이다. 여기에 모든 죄인들에게 구원과 천국과 영생 소망을 주는 진리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장 큰 복은 죄로부터 자유이다. 죄로부터의 자유란 죄책(罪責, guilt) 즉 죄의 법적 책임으로부터의 자유, 죄인이라는 신분으로부터의 자유, 죄의 형벌 즉 영원한 지옥 형벌과 그 공포로부터의 자유이다. 죄로부터의 자유가 바로 복음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자유(free)를 알아야 한다. 자유는 free와 liberty가 있는데, 우리는 free는 죄로부터의 자유이고, liberty는 그리스도(율법) 안에서 자유라고 규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0:4에서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신 의가 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율법이라도 신자를 정죄치 못하며 이런 의미에서 성도는 율법에서 벗어났다고 표현된다(롬 7:6; 갈 5:1).

물론, 성도가 죄의 세력 곧 죄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한 것은 아니다. 땅 위에서의 성화는 불완전하다. 완전 성화는 부활 때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의(義)는 무효화되지 않을 것이다. 의와 죄의 싸움은 있으나 최종적 승리가 보장되어 있다. 물론,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 안에서 의를 행하고 거룩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면, 다시는 죄가 우리를 지배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이다.

[요 8:33절]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였다(33절). 그들은 자기가 종이 된 적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남유다는 바벨론에게 멸망되어 70년 유수를 당하였고, 셀류커스의 강압에 의해서 마카비에 의해서 자치권을 얻었다. 그리고 로마로부터 자치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종된 적이 없다고 하는 주장은 부당하다. 그들은 로마의 압제에서 벗겨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종된 적이 없다”고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었다면 AD 70년에 독립전쟁을 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죄악된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 속에 있다는 사실은 자신들의 죄성을 증거하고 있었다. 중생치 못한 자들은 영적인 문제를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몸의 질병이나 물질적 손실에 대해서는 잘 알아도 죄 문제나 구원의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도 깨달음도 없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었다. 오늘날도 하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는 많은 교인들이 실제로 죄악된 일들을 버리지 않고 살고 있다면 그들은 저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다. 그들의 구원 확신은 헛된 망상에 불과할 것이다.

[요 8:34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Ἀμὴν ἀμὴν) 너희에게 이르노니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a slave to sin, τὴν ἁμαρτίαν δοῦλός)이라.

예수께서는 종된 상태와 죄를 연결하였다. 종의 특징은 자기가 종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자기부정 상태이다. 참된 부정은 자기가 의인이라는 것을 부정하며 겸손한 것이다. 죄를 범하는 사람은 다 죄의 종이다(ὅτι πᾶς ὁ ποιῶν τὴν ἁμαρτίαν δοῦλός ἐστιν τῆς ἁμαρτίας). “죄에 속한 종은 죄인이다(everyone who sins is a slave to sin)”로 이해될 수 있다. 죄에 속한 사람은 죄를 범한다. 종은 자기 상태를 인지하지 못하지만, 아들은 자기 상태를 인지한다.

[요 8:35-36절] 종(a slave)은 영원히 집에(τῇ οἰκίᾳ) 거하지 못하되 아들(a son)은 영원히 거하나니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케 하면 너희가 참으로(indeed) 자유하리라.

“종과 아들”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다. 종은 주인의 집에서 어쩔 수 없이 살고 있다. 죄의 종인 사람은 하나님의 집인 천국에 거하지 못한다. 시편 1편에서 악인은 의인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유케하면 참으로 자유롭게 될 것이다. 그는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실 수 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통해 죄인들을 죄로부터 자유케 하신다. 그것이 구원이다. 그것이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다.

자유는 아들께서 자유를 주시며, 아들이 자유롭게 하면 참으로(indeed) 자유를 얻을 것이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거함으로 그의 참 제자가 되자.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막연히 그를 믿는다는 생각으로 되지 않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에 관한 말씀 곧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모든 말씀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다. 이것이 좁은 길, 바른 길이며 성경적 기독교이다. 우리는 성경말씀을 감사함으로, 그러나 두렵고 떨림으로, 읽고 듣고 믿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함을 얻고 그 자유를 지키고 누리는 자가 되자.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다. 그는 죄성의 지배를 받고 죄의 형벌의 두려움 속에서 산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의를 이루셨고 우리가 그를 믿을 때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함 즉 죄의 법적 책임과 형벌로부터의 자유함을 얻었다. 모든 신자는 죄로부터의 자유를 얻었다. 또 이 자유를 얻은 자마다 이제는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와 상관없이 살아야 한다. 중생한 자는 결코 계속 죄를 짓거나 계속 죄 가운데 낙을 누리지 않는다. 죄성은 죽을 때까지 남아 있으므로 우리가 항상 깨어 있지 않으면 죄의 유혹에 쉽게 넘어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즉시 일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거룩을 의지하며 의와 거룩의 길로 행해야 한다.

 

●요 8:37-47절, 1세기 유대인은 마귀의 자녀: 진리를 말하면 절대로 믿지 않음

[요 8:37-38절] 나도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아노라. 그러나 내 말(my word)이 너희 속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아버지와 함께, 아버지 곁에서](원문) 본 것을 말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아비와 함께, 아비 곁에서](전통본문)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

예수께서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인정하신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없기 때문에 죽이려고 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들 안에 거하면 제자가 될 것이며, 당연하게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오신 약속된 메시아를 죽이려 한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요한복음 5장에서부터 요한복음 전체에 여러 번 증거되어 있다(5:16, 18; 8:37, 40; 11:53).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그의 말씀이 그들 속에 있을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생명의 떡이요 세상의 빛이며, 유대인들이 그 사실을 믿지 않으면 그들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거절하였고 그의 신성(神性)도, 그의 그리스도 되심도 믿지 않았고 도리어 그를 죽이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께서는 사람으로 나시기 전 천국에서 아버지와 함께 계셨고 항상 함께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의 뜻을 말씀하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조상들과 함께(혹은 조상들에게 들은, heard from your father/with your father) 조상들의 말을 반복하였다. 유대인들의 아비란 그들의 육신적 아버지를 가리킬 수도 있으나, 근원적으로는 마귀를 암시한다. 주께서는 모든 죄인이 마귀의 자녀임을 암시하신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버지의 성질을 닮듯이, 모든 죄인은 그 죄성에 있어서 마귀의 성질을 닮았다.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육적 아브라함의 후손(이스마엘, 에서, 그리고 1세기 유대인)은 예수를 죽이려 하였고, 지금도 그것은 동일하다.

[요 8:39-40절]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유대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처럼 경건하고 의롭고 선한 행위를 보여야 할 것이지만, 그들은 육신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으나 영적으로는 아브라함을 닮지 않았고 오히려 마귀의 속성을 지니고 마귀의 행동을 하고 있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그의 자손인 인류는 하나님의 형상 대신 마귀의 형상을 닮은 자가 되었다. 사람 속에는 태어날 때부터 죄성이 유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유대인들의 행위는 아브라함의 행위와 매우 달랐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말한 예수님을 죽이려 하고 있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인간의 말이 아니고 그가 하나님께 들은 진리의 말씀이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 한 것은 하나님과 대적 상태에 있음을 증거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이었다면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아브라함은 시날 왕, 엘라살 왕, 엘람 왕, 고임 왕 등의 연합군을 파하고 조카 롯을 구하여 돌아올 때 자기를 축복한 멜기세덱에게 노획물의 10분의 1을 주었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존중한 한 예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처하는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에 보내주신 독생자 예수를 죽이려 하고 있는 것이다.

[요 8:41절] 너희는 너희 아비의 행사를 하는도다. 대답하되 우리가 음란한데서 나지 아니하였고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ἕνα Πατέρα ἔχομεν τὸν Θεόν).

유대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처럼 불경건하고 부도덕하고 악하였다. 그들의 조상들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배척하고 죽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과는 매우 달랐다. 실상 그들의 아버지는 마귀이었다. 그들은 마귀적이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부정하며 자신들이 음란한 데서 나지 않았고 그들의 아버지는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록 그들의 신앙고백은 경건하고 좋아 보였으나 실제로 그들의 심령 상태는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심령 상태는 하나님과 거리가 멀었고 선함과 진실함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들 속에는 죄악된 욕심과 미움이 가득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무 죄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죽이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요 8:42-43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 나서 왔음이라.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요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니라. 어찌하여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느냐? 이는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로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Εἰ ὁ Θεὸς Πατὴρ ὑμῶν ἦν) 이라고 그들의 불법을 지적하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스스로 오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신 것(I have come here from God. I have not come on my own; God sent me)임을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왜 자기 말(language, τὴν λαλιὰν)한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을 지적하셨다. 그들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τὸν λόγον, my word)을 수용할 능력이 없었기(unable) 때문이다.

[요 8: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魔鬼, τοῦ διαβόλου, the devil)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거짓말쟁이]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 τοῦ διαβόλου, 분리하는 자, 중상모략하는 자, 고소자, 비방자, 대적이라는 의미가 있다.

예수께서는 보다 더 분명하게 그들이 아비 마귀에게서 났다고 말씀하셨다. 마귀는 욕심이고(your father’s desires, τὰς ἐπιθυμίας), 마귀의 자녀들은 처음부터 욕심에 끌려 살인한 자이다. 그들이 마귀의 자녀인 증거는 그들이 마귀의 욕심을 행하고자 하기 때문이었다. 마귀의 욕심은 교만과 명예심 등이며 거기에서 미움과 시기와 살인이 나온다. 마귀는 처음부터 살인자이다. 그는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 함으로 죽게 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죄인이 되고 죽게 되었다. 또 마귀는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the father of lies)이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한 것은 그들이 마귀 자녀임을 증거하였다.

마귀의 자녀의 특징은 거짓말이다. 신천지에서는 자기를 감추고 타인을 속여 자기들의 사상을 포교하는 것을 ‘모략’이라고 한다고 한다. 법원에서 신천지의 모략 전도를 위헌이라고 판정했다고 한다. 거짓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자기 아버지가 마귀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요 8:45-47절]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진리를 말씀하셨기 때문에 세상에 속한 유대인은 예수를 믿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에게 어떤 죄를 찾지 못하였지만,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믿지 않았다.

진리의 말씀을 믿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 사람, 믿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죽이려 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고 마귀의 자녀이었다. 그들이 마귀의 자녀인 증거는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듣지 않고 깨닫지 못하고(43, 47절) 받지 않고(37절) 믿지 않고(45-46절) 예수님을 사랑치 않고(42절) 도리어 죽이려 하기 때문이었다(37, 40절). 오늘날에도 마귀의 자녀들은 하나님의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적 기독교를 깨닫지 못하고 받지 않고 믿지 않으며 또 주께서 보내신 참된 목사들과 복음 사역자들을 사랑하지 않는다.

 둘째로,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경적 기독교를 깨닫고 받고 믿고 따른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들인다.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모든 사람들은 이 둘 중의 하나이다. 여러분은 어느 쪽인가? 여러분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확신하고 그 앞에 복종하기로 결심하며 실천하고 있는가?

 

●요 8:48-59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요 8:48절] 유대인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너를 사마리아 사람이라 또는 귀신이 들렸다 하는 말이 옳지 아니하냐?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자기를 마귀의 자녀라고 주장한 것에 대해서, 자기들도 예수를 사마리아인이라고 부른 것과 동등하게 여겼고, 귀신들렸다(Σαμαρείτης εἶ σὺ καὶ δαιμόνιον ἔχεις, a Samaritan and demon-possessed)고 주장하면 좋겠느냐고 반문하였다.

[요 8:49-5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는 귀신 들린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를 공경함이어늘 너희가 나를 무시하는도다. 나는 내 영광을 구치 아니하나 구하고 판단하시는 이가 계시니라.

공관복음서에서 유대인들은 예수께 바알세붑에 들렸다고 주장하였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어떤 왕국도 서로 싸우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참고로 제종교의 축귀 사역은 서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리 양분으로 볼 수 있으며, 더 강력한 귀신을 도입시키는 것이다. 강력한 귀신에 붙들려 예수를 믿지 못한다. 자기 영광과 권세를 높이는데 힘쓴다. 최근에는 사탄을 하나님을 세워 높인다. 하나님을 높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사탄의 종들은 자기 주인 사탄을 하나님이라고 부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자기는 귀신에 들린 것이 아님을 밝히셨다. 그렇게 판단한 이유는 아버지를 공경하는 자기를 무시하기 때문이라고(I honor my Father, and you dishonor me) 밝히셨다. 아버지를 공경(honor)하는 자는 아들을 믿는다. 아버지를 공경하지 않는 자는 아들을 무시한다(dishonor).

예수는 오직 아버지의 영광(honor)를 구하였다. 아버지의 영광만을 구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참(true)이시다. 예수께서 주신 진리를 거부하면서 예수를 무시하는 것인데, 그것은 아버지를 무시하는 것이다.

[요 8:51절] 진실로 진실로(ἀμὴν ἀμὴν)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obeys/keeps)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표현은 예수께서 중요한 진리를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표현이다. 그는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내 말을 지킨다’는 말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의 말을 믿고 그의 교훈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킨다. 사도 요한은 듣고 지키는 자가 복되다고 하였다(계 1:3).

예수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죽음(death)을 보지 않을 것이다(51절). 예수를 믿는 자는 세상이 끝날 때에 죽음이 아니라 영생을 볼 것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는 그의 말씀을 지킬 것이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그의 말씀을 지키는 행위는 참 믿음의 증거가 된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며 행위는 구원의 증거이다. 사람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순종의 행위 없이 구원받는 것은 아니다.

[요 8:52-53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지금 네가 귀신 들린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과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네 말은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맛보지 아니하리라 하니 너는 이미 죽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보다 크냐? 또 선지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너를 누구라 하느냐?

유대인들은 다시 예수님을 귀신 들렸다고 판단하였다. 그들은 참 백성이라고 판단된 아브라함, 선지자들이 죽었다고 증거를 제시하였다. 그들은 니고데모처럼 육신의 방법으로만 이해하였다. 그들은 죽음을 단지 몸의 죽음으로만 이해하였고 또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요한복음은 유대인들이 예수께 정체성을 질문하고, 예수께서 답하셨다. 무지하고 잔혹하고 계략적인 질문에 모두 자세하게 대답하시는 모습이다. 또 다시 너는 누구냐?라고 질문하였다(Who do you think you are?).

[요 8:54-55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내게 영광을 돌리면 내 영광이 아무것도 아니어니와 내게 영광을 돌리시는 이는 내 아버지시니 곧 너희가 너희 하나님이라 칭하는 그이시라.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되 나는 아노니 만일 내가 알지 못한다 하면 나도 너희 같이 거짓말장이[거짓말쟁이]가 되리라. 나는 그를 알고 또 그의 말씀을 지키노라.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神性)-아버지와 동등됨과 연합됨-과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던 자로 제시하였다.

예수께서는 구원 사역에서 스스로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예수를 영화롭게 하는 것은 아버지셨다. 우리가 예수께 영광을 돌리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유대인이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그분(My Father, whom you claim as your God) 이셨다. 먼저 유대인에게 주는 것은 그들이 부르는 하나님이 예수님의 아버지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신은 예수의 아버지가 아닐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는 잠재적 구원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 잠재적 구원(implict)이 허용되지 않는데, 그것은 유대인에게 먼저된 선교 원리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유대인은 자기에게 주어진 특권을 자기 욕심으로 돌렸다. 그 욕심은 우리시대에 충분하게 증명되어 있다. 유대인의 탐욕이 아닌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

1세기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불렀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그들이 불러야 할 하나님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거짓말쟁이고, 예수님은 참말을 하는 인자이시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알고 그 말씀을 지킨 유일한 사람이다(I do know him and obey/keep his word).

유대인들은 말로만 하나님을 알 뿐 실제로 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하나님의 아들을 핍박하고 배척하고 있었다. 예수님만 하나님을 바르게 아신다. 그래서 그는 마태복음에서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마 11:27).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는 특별히 친밀하며 신비한 관계이다.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외친 말씀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인지 알 수 있다.

[요 8:56절]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day, τὴν ἡμέραν)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유대인의 조상 아브라함이 나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였다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은 언제, 어디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때를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는가? 어떤 이들은 아브라함이 예수님 당시에 천국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기뻐하였다는 뜻으로 이해하였으나, 많은 주석가들은 아브라함이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먼 훗날에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면서 즐거워하고 기뻐했다는 뜻으로 이해하였다(김효성). 서철원 박사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사로 드릴 때에 고백한 여호와 이레를 제시한다. 아브라함이 그 때를 보고 즐거워하였다는 것은 영적 지식의 신비로움이다.

[요 8:57절] 유대인들이 가로되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그런데 유대인들은 거꾸로 예수가 아브라함을 보았느냐?고 질문하였다. 이때 예수님의 나이가 33세 정도이었을텐데, 유대인들은 왜 그에게 “네가 아직 오십도 못되었는데”라고 말했는가? 물론 그의 얼굴이 실제보다 나이가 많이 들어 보였을지도 모르나 ‘네가 인생의 절반도 살지 못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는 뜻일 것이다. 마이어 박사는 40세로 추정하였다(마이어, 410). 마이어 박사는 별자리를 근거로 주전 6년으로 탄생을 잡았다. 이레니우스도 40-50세에 가르쳤다고 제시하였다(이단에 대항하여, II, 22.5: 마이어, 410). but was beginning to be about thirty years of age (for thus Luke, who has mentioned His years, has expressed it: Now Jesus was, as it were, beginning to be thirty years old, Luke 3:23 when He came to receive baptism); and, [according to these men,] He preached only one year reckoning from His baptism. On completing His thirtieth year He suffered, being in fact still a young man, and who had by no means attained to advanced age. Now, that the first stage of early life embraces thirty years, and that this extends onwards to the fortieth year, every one will admit; but from the fortieth and fiftieth year a man begins to decline towards old age, which our Lord possessed while He still fulfilled the office of a Teacher, even as the Gospel and all the elders testify(https://www.newadvent.org/fathers/0103222.htm)

[요 8:58-59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진실로(Ἀμὴν ἀμὴν)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저희가 돌을 들어 치려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나가시어 그들 가운데로 통과하여 지나가시니라](전통본문).

그런데 예수께서 오해하여 한 질문에 대해서 자기의 선재성을 대답하셨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셨다는 증거는 신성에 대한 증거이고, 성육신에 대한 증거이다. 그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었느니라”고 말하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있느니라(ἐγὼ εἰμί)’는 말씀은 구약에 ‘여호와’라는 명칭을 생각나게 하는 표현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직역하면 ‘나는 있는 자니라’고 말씀하셨다(출 3:14). 출 3:14 스스로 계신 자에 대한 헬라어 번역(LXX)가 ἐγὼ εἰμί이다. 70인경 성경을 충실하게 읽는 사람은 ἐγὼ εἰμί라고 하면 구약성경의 여호와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기신성화를 주장하는 예수를 돌을 들어 치려하였다.

예수께서 그들을 피하셨다. 모두 드러난 장소에서 숨어서 나갈 수 없다. 마치 누가복음에서 나사렛 회당에서 강론하시다가 군중에 밀려 벼랑까지 몰렸지만 군중 사이를 지나가신 것과 유사한 상황이다(눅 4:30).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예수께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바로 알자. 사람은 어머니의 배에 잉태된 날과 출생한 날이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계신 분, 즉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자이시며(요 1:1)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시다(계 22:13).

둘째,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다. 예수께서는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죽음을 영원히 보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셨다(51절).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킨다는 것은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 안에 거하며 그의 말씀을 행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요 3:16; 요 5:24; 엡 2:8).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참 믿음은 그의 말씀을 행하는 바르고 거룩하고 선한 행위로 증거된다. 사람은 행함으로가 아니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지만, 선한 행위 없이 받는 것은 아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행위는 구원의 조건은 아니지만, 구원의 열매요 증거와 표가 된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은 자들은 이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증거해야 한다. 사람이 예수님 믿고 죄사함 받고 영생을 얻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복된 소식이다. 전도는 하나님의 가장 큰 소원이며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이며 모든 성도의 기본적인 의무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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