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Ἐγώ εἰμι

 

1. 나는 생명의 떡이다(6:35) Ἐγώ εἰμι ὁ ἄρτος τῆς ζωῆς

2. 나는 세상의 빛이다(8:12) 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3. 나는 양문이다(10:7, 9) 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4. 나는 선한 목자라(10:11) 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ὸς

5.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11:25)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6.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14:6) Ἐγώ εἰμι ἡ ὁδὸς καὶ ἡ ἀλήθεια καὶ ἡ ζωή·

7. 나는 참 포도나무다(15:1.5) Ἐγώ εἰμι ἡ ἄμπελος ἡ ἀληθινή,

마이어 박사는 요한복음 10장을 “목자설교”로 정리하면서, 예레미야 23장 이하, 에스겔 34장 이하, 미가 2장이하, 스가랴 11장 이하를 참조해야 하다고 제시하였다(마이어, 444).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백성의 인도자, 자기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한다면, 누구의 인도(지도)를 따르는 가를 보면 정체성을 알 수도 있을 것이다.

 

◎요 10: 1-21, 나는 양문과 선한 목자

 

[요 10:1-6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양의 우리에 문으로(the sheep pen by the gate)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ποιμήν)라. 문지기(gatekeeper)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οἴδασιν) 고로 따라 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οὐκ ἔγνωσαν).

양우리에 들어오는 두 종류의 사람, 다른 방법으로 들어오는(a thief and a robber) 도둑(강도)와 문으로 들어오는(the gate) 양의 목자(the shepherd of the sheep)이다. 양문를 지키는 사람(gatekeeper)은 양의 목자에게 문을 열고, 양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the sheep listen to his voice, οἴδασιν). 양의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불러 내며, 양은 그의 음성만을 듣고 따른다(they know his voice). 그 이유는 타인의 음성을 알아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they do not recognize a stranger’s voice, οἴδασιν). 타인의 음성(the voice of strangers)은 바울이 외친 다른 복음(other Gospel)과 연결할 수 있겠다. 주의 양은 주인의 음성만을 듣고, 타인의 음성을 듣지 않는데, 갈라디아 사람들은 다른 복음에 쉽게 적응하였고, 그 때 바울이 목자(목사)로서 외쳐 교회를 보수(保守)한 것이다(갈 1:6-9). 다른 복음은 사도의 가르침에 배치되는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갈라디아 교회에 할례를 구원의 증표로 세우려는 획책이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여지며 증진되는 것이다. 할례가 고취될 때에 그 곳에서 떠나야 하는데 많은 갈라디아 사람들이 흔들렸고 그곳으로 이끌린 것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이 높아지는 곳으로 주의 양은 따르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비유에서 세 가지 요점을 말씀하셨다. 첫째, 양의 목자는 문으로 들어간다.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이다. 둘째, 목자는 양들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고 앞서간다. 셋째,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고 그를 따라간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음성은 알지 못하므로 따라가지 않고 오히려 도망간다.

예수께서 그 비유의 뜻을 설명하시면서 자신이 바로 양의 문이며 또 자신이 선한 목자임을 증거하셨다. 그가 이 비유로 그들에게 말씀하셨는데, 듣는 유대인들은 그 말씀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비유는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이해하기 쉽게 비유하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내용을 현상으로 계시하기 위함이다. 결국 비유를 이해할 수 있으려면 계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사람의 이해력으로 예수의 비유를 이해하려는 시도는 전혀 생뚱맞는 답을 낼 뿐이다. 그 이유는 1세기 당시 유대인들이 전혀 이해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요 10:7-10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Ἀμὴν 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 나는 양의 문이라(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τῶν προβάτων).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竊盜)요 강도(强盜)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ἐγώ εἰμι ἡ θύρα)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盜賊)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ζωὴ)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께서 자신을 ‘양문’이라고 규정하셨다(I am the gate for the sheep). 예수께서 자기보다 앞선(before me) 사람을 도둑이나 강도로 규정하셨다. 예수보다 “먼저”는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예수보다 자기 자신을 더 높이는 행태라고 볼 수 있다. 마이어 박사는 주후 130년경에 랍비 아키바(Aqiba)가 거짓 메시아인 바 코흐바(Bar-Kokhba, 별의 아들)를 진짜 메시아로 추앙하면서 로마에 대항하여 유대인을 전멸위기로 몰아넣었다고 밝혔다(마이어, 444-445). 양무리로 들어갈 문은 예수이시다. 양문으로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왕래하면서 꼴을 얻을 것이다. 도적의 목적은 도적과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이고, 목자는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10절).

예수께서 절도(훔치고)요 강도(깨부수는)라고 말씀하신 자들은 거짓 교사들을 가리켰다. 1세기 유대에서 대표적인 거짓 선생은 바리새인과 서기관(書記官, Scribes) 부류일 것이다. 서기관은 학사 에스라에서 기원(스 7:6)한다고 볼 수 있는데, 성전이 아니라 회당에서 필요한 직분이다. 그들은 마카비 전쟁 후에 타락한 권력층에서 이탈하여 구별된 자로 명예를 얻은 자들이다. 그런 자들은 양들의 구원과 영적 성장을 위해 살지 않고 헛된 물질적 이익을 위해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양들의 영혼을 살리고 건강케 하기보다 그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자들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양문이시다. 죄인들이 그 문을 통하여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양들로 새 생명을 얻고 더 풍성히 얻게 하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세우신 양문으로 들오지 않은 교사는 도적이고 강도이다. ‘생명을 더 풍성히 얻는다’는 말은 성도의 신앙 인격과 삶이 강건해지고 온전해지는 것을 말한다. 이렇게 구원 얻은 양들이 모인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요 양들의 우리이다. 구원 얻은 양들은 교회의 여러 모임들을 통해 영의 양식 즉 말씀의 교훈을 얻는다. 목사들은 주 예수께서 소명을 받은 사자(使者, messenger)로서 성경에 근거하여 복음을 선포하여 주의 양에게 영혼의 양식을 공급하여 힘을 얻게하여 온전케 한다. 양들은 읽는 자의 복음을 듣고 지킴으로 복을 받는다(계 1:3).

 

[요 10:11-12절] 나는 선한 목자라(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나는 선한목자(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 ἐγώ εἰμι는 예수의 신적 자기 주장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는 어휘이다. 출 3:14의 여호와의 헬라어 번역(LXX)을 예수께서 주저하지 않고 사용하신다.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직접 그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외모를 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였다.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에 더해서 그 사람, 인자,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죽이는 일까지 벌어진다.

예수의 선하심은 자신이 십자가 위에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실 것을 지시하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0:28에서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히브리서 9:12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가셨다”고 말했다. 사도 요한도,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저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니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위하여 화목제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니라”고 말했다(요일 4:9-10).

선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목자는 양을 목양하여 생존하는 직업인데, 그 양을 위해서 목자가 죽는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비유이다. 그런데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와 삯군 목자(The hired hand, 피고용인)를 비교하면 조금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다. 그는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며 이리는 양을 늑탈하고 헤친다. 삯꾼은 거짓 지도자들을 가리키는데, 위험할 때에 자기 위치를 떠나는 지도자이다(유1:6). 그들은 거짓 목자라도 그곳에 없으면 양들은 이리에게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다. 목자와 삯꾼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 죽지만, 삯꾼은 오직 물질적 이익을 위해 일하며, 이리가 오면 도망가거나 죽음으로 몰아 넣는다.

선한 목자는 단순한 목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목사는 사도의 가르침을 계승하는 진리의 파수꾼으로 선한 목자의 남은 고난에 동참하며 선한 목자께서 위탁하신 복음을 땅끝까지 세상끝날까지 전하는 것이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양을 보호하는 것이다.

마이어 박사는 선한 목자와 유사한 구절로 외경의 솔로몬 송가를 제시한다. “그는 주의 양 떼를 신실하고 올바르게 보호하시고 목축지에서 아무도 길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신다(Ps Sal 17:40)”이다. 마이어 박사는 솔로몬 송가가 요한복음의 계시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밝혔다(마이어, 453). 대속의 죽음이 없기 때문이다. 마이어 박사는 사 53장과 연결하면 이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제언하였다.

 

[요 10:13-15절] [삯꾼이]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ἐγώ εἰμι ὁ ποιμὴν ὁ καλός).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소유에 대한 의식. 삯군은 일할 뿐 소유 의식이 없는 피동적인 인격이다. 그러나 선한 목자는 양을 자기 소유로 생각하기 때문에 양을 위해서 생명을 건다. 농부는 한 톨의 곡식에 생명을 건다. 옛날 수확한 벼를 길 위에 건조시킬 때에, 거두고 펼치는 것을 반복해서 건조시켰다. 한 톨의 곡식을 바닥에 떨치고 거두려하자 나의 아버지는 나에게 무척 화를 내셨다. 그리고 그 한 톨을 주어 담으셨다. 일하기 싫은 어린 학생에 한 톨은 아무 의미가 없었지만, 한 해 동안 농사해서 수확한 아버지는 한 톨의 곡식이 자기 생명과 같았던 것이다. 군대에서 식판 앞에서 감사히 먹겠습니다.. 외치던 그 식구호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형식적인 외침이라도 꾸준하게 유지되었으면 좋겠다.

좀 더 과도한 의미로 삯군 목자의 유익은 이리가 도래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큰 문제가 없는 것으로 상상해 본다. 그것은 현재 많은 교회에 삯군 사역자들이 있다는 가정 아래에, 삯군 사역자 아래에 있는 성도들에게 위로를 주고 싶은 마음이다. 1935년 오방 최흥종 목사는 신사참배를 결정하려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보면서 성도들에게 목사들을 믿지 말고 스스로 세워져야 한다고 외쳤다. 지금도 그러한 때이지만 어느 곳에서 든지 주 예수를 굳건하게 붙들고 서려고 힘쓴다면 주의 위로와 선한 인도하심이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양들은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려고 창세 전에 택하시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자녀들이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들만 예수님을 알고 영접하고 믿고 구원 얻고 그를 따를 것이다. 자기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 선한 목자를 사랑하며 섬기는 것이 구원받은 자의 당연한 도리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상호 앎이다(γινώσκει με, γινώσκω). 그 관계에 의해서 프로바톤(양들)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신다(15절).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암노스(어린 양)이고(요 1장), 예수님의 양은 아르니온과 프로바톤(요 21장)이다. 요한 21장에 양은 아르니온(새끼 양), 프로바타, 프로바타이다. 요한 1:29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αμνος)이다. 요한계시록에서 어린양은 아르니온(το αρνιον)으로 29번 등장한다.

[요 10:16절]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말씀은 영혼 구원과 전도에 대한 그의 사명을 증거한다. ‘다른 양들( ἄλλα πρόβατα)’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았으나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가리킨다. 사도행전 13:48은 사도 바울이 전도할 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은 다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민족이나 언어나 피부색의 구별 없이 그들은 다 한 교회가 되고 한 목자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하게 될 것이다.

다른 양들도 주의 음성을 듣고(τῆς φωνῆς μου ἀκούσουσιν) 한무리가 되어 한 목자 안에 있어야 한다. 다른 양들을 한 목자, 한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로 세우도록 열심해야 하고, 교회에 다른 복음이 세워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요 10:17-18절]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아버지께서 예수, 아들을 사랑하신다(17절). 아들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지만, 그 아들께서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사랑하신다. 예수께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스스로 버리시는 것이다. 예수는 내려놓을 수 있는 권위와 다시 세울 수 있는 권위가 있다(I have authority to lay it down and authority to take it up again, 18절). 이 권위(권세)는 아버지께 받은 것이다(18절).

혹자는 십자가의 죽음을 수동적 의미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스스로 놓으신 권위이다. 예수님의 사역 중에서 순종을 능동과 수동으로 구분하는 것은 과도한 사변이다. 바빙크 박사가 개혁교의학에 제시한 것은 사상화가 아닌 집대성으로 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권세 문제로 보아야 한다. 3 복음서에서 예수님의 권위 문제에 대해서 토론하였다. 예수님의 권세는 하늘에서 온 것인데, 요한복음에서는 아버지께 받은 권세, 계명(command)이라고 하셨다. 선한 목자로 양을 위해서 목숨을 내 놓으신 것은 아버지의 계명이다.

예수께서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시기로 스스로 결정하셨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아셨다. 그는 죽은 후에 다시 목숨을 얻을 것을 아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에게 스스로 목숨을 버릴 권세도 주셨고 다시 얻을 권세도 주셨다. 그가 비록 다시 살아나실 것을 아셨지만, 죽는 것은 결코 쉬운 결단이 아니셨다. 그는 그 죽음을 피하기 위해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흘리시며 눈물의 기도를 아버지께 올리셨다(눅 22:44; 히 5:7).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뜻을 확신하셨고 그 뜻에 즐거이 순종하셨다. 그는 죽기까지 복종하셨다(빌 2:8). 아버지께서 예수, 이 땅에 보내신 아들을 사랑하셨다. 아들은 아버지께서 보내신 모든 뜻을 세상에 계시하시고 성취하셨다.

[요 10:19-21절] 이 말씀을 인하여 유대인 중에 다시 분쟁이 일어나니 그 중에 많은 사람이 말하되 저가 귀신 들려 미쳤거늘 어찌하여 그 말을 듣느냐 하며 혹은 말하되 이 말은 귀신 들린 자의 말이 아니라. 귀신이 소경의 눈을 뜨게 할 수 있느냐 하더라.

예수의 말씀으로 인해서 유대인들은 분쟁하였다(19절). 예수님은 이 땅에 화평이 아닌 분쟁을 주시려고 하신다(마 10:32-26, 눅 12:49-59). 예수의 말씀에 대해서 귀신들려 미친 사람이라는 주장과 소경의 눈을 뜨게 한 하늘에서 온 선지자로 나뉜 것이다.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한 사람의 증언의 위력이 얼마나 큰가?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은 양문이시다

양들이 그를 통해 들어가면 구원을 얻는다. 사도행전 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죄인들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 문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둘째, 예수님은 선한 목자이시다. 

왜 그가 선한 목자이신가? 선한 목자이심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가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시면서 선한 목자이심을 증명하셨다. 누구든지 그 이를 믿으면 구원을 받으며, 구원받은 사람은 자기를 구원한 그 이의 이름을 안다. 그는 죄인들을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이제 자기 양들을 부르시고, 자기의 양들을 하나도 빠짐 없이 다 영생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양은 자기를 부르신 음성을 알며, 삯꾼의 음성도 알아 피하게 될 것이다.

셋째, 우리는 주의 양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 주신 양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구원을 받는다. 그들은 한 우리에 들어가 한 무리가 된다. 참 교회의 교인이 되는 것이다. 또 그들은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큰 목자이시고(히 13:20) 목자장이시다(벧전 5:4). 목사와 장로들은 주께서 세우신 작은 목자들이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은 충성된 목자들이 되어야 하고, 교인들은 좋은 양이 되어야 한다. 주께서 세우신 목자의 음성에서 주의 음성, 성령께서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듣고 지켜야 한다.

중요한 성경 구절들을 몇 곳 살펴보자. 요한복음 21:15, 16, 17,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목양의 사명을 주셨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주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전통사본). 목사와 장로들은 교회의 목자와 감독자로 세움을 받았다.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교인은 목사와 장로들을 존경해야 한다. 

히브리서 13:7, 1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교인은 목사와 장로들을 본받고 그들에게 순종해야 한다.

요 10:22-42절, 수전절 솔로몬 행각을 떠나 요한의 세례터까지: 믿는 자를 이룸

 

[요 10:22-26절] 예루살렘에 수전절(修殿節, the Festival of Dedication)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예수께서 성전 안 솔로몬 행각에서(行閣, in Solomon’s Colonnade) 다니시니 유대인들이 에워싸고 가로되 당신이 언제까지나 우리 마음을 의혹(疑惑, suspense)케 하려나이까? 그리스도(the Messiah, Χριστός)여든 밝히 말하시오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였으되 믿지 아니하는도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나를 증거하는 것이어늘 [내가 너희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내 양에게 속하지 않으므로](원문) 믿지 아니하는도다. ※ 행각(行閣)과 회랑(回廊), 행랑(行廊). Colonnade는 회랑으로 번역되는 것이 좀 더 쉬운 이해가 될 것이다. 중국어 廊下(복도)와도 같지 않다. 일본어 廊: 참고 사랑방(舍廊房), 화랑(畫廊)

수전절(修殿節)은 구약성경에 있는 절기가 아니다. 수전절(Hanukkah)는 주전 165년 유대 지도자 마카비우스가 수리아 왕 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를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승리한 후에 성전을 정결케 하고 다시 봉헌한 것을 기념한 날이다. 하누카는 빛의 축제인데 7개의 메노라인데, 수전절 촛대는 9개이다. 유대인의 달력으로 9월 25일부터 8일간이며 우리 달력으로 12월 중순쯤 될 것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이해가 있는데 촛불을 밝히는 순서에 대한 것이다. 힐렐 학파(the school of Hillel)는 촛불을 켜나가는 것이고, 샤마이 학파(the school of Shamai)는 꺼가는 방식으로 수행하였다.

마이어 박사는 9월 말에 초막절(Tischri, 15-21일)과 12월 중 후반에 있는 수전절 사이가 3개월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갈릴리로 가셨다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셨다고 생각하기 어렵다고 계산하였다. 즉 수전절까지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셨다면 6 개월 정도를 유대 지역에 계셨다고 추론하였다(마이어, 462).

예수께서 솔로몬 행각을 거니실 때에 유대인들이 에워싸며 항의하였다(24절). 예수의 가르침에서 자기들의 마음이 요동한 상태를 폭로한 것이었다. 마음이 흔들리지만 믿지는 않았다. 예수께서 사역 초기부터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분명하게 증거하셨다. 요한복음에서는 매우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또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시는 일들, 즉 그의 행하신 기적들이 그를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그를 믿지 않으면서, 그 책임을 예수께 부가시키고 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어둠이었고, 예수의 양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앞에서도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 6:44). 예정, 하나님의 선택은 두렵고 심오한 진리이지만 성경에 명백히 계시된 하나님의 진리이다.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죄인들 중 어떤 자들을 그들의 행위에 근거해서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에 이르도록 선택하셨다(엡 1:4-5; 딤후 1:9).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것이다.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구원에 필수적이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택의 결과이다.

 

[요 10: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예수 그리스도의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으며 그를 따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의 말씀을 듣고 깨닫고 지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37). 예수 그리스도의 양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그를 따른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마음으로 이미 순종한 것이요 마음으로 순종한 자는 범사에 그의 말씀에 순종할 것이다. 로마서 6:17-18,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로서 의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하나님의 의롭고 선한 계명들에 순종한다.

예수께서 자기의 양을 알며, 양은 자기 목자이신 예수를 안다.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부르며, 양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는다.

 

[요 10:28-29절] 내가 저희에게 영생(ζωὴν αἰώνιον)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οὐ μὴ ἀπόλωνται εἰς τὸν αἰῶνα)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 저희를 주신 내 아버지는 만유보다 크시매 아무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양무리 안에 있는 양에게 영생을 주신다(28절). 예수께서 주시는 영생은 영원히 멸망치 않는다. 또한 예수 안에서 빼앗아 갈 자도 없다. 영생은 온 인류가 사모하는 바이다. 그러나 죽지 않은 영생을 사모하는 죄의 굴레에 있다. 그리스도인은 죽지만 죽지 않는 영생을 믿는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전 3:11).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딛 1:2).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썼다(요일 5:13).

예수께서 양에게 준 영생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자기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양들을 주신 아버지께서 만유보다 크시므로 그들을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자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양들이 받는 영생은 아무도 빼앗을 수 없는 영생, 안전하게 보장된 영생이다. 예수의 양은 예수 안에 있을 때에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그것은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죽음을 믿고 알며 사랑하기 때문이다. 그 아들은 죽음에서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구주이시다.

 

[요 10:30-33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 하신대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아버지께로 말미암아 여러 가지 선한 일을 너희에게 보였거늘 그 중에 어떤 일로 나를 돌로 치려하느냐? 유대인들이 대답하되 선한 일을 인하여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는 것이 아니라 참람(僭濫)함을 인함이니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being a man, make yourself God, 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듦이로다].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ἐγὼ καὶ ὁ Πατὴρ ἕν ἐσμεν, I and the Father are one)”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신성(神性)에 대해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증거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실 때도 하나님과 동일 권위를 가진 분임을 의미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므로 그것은 하나님과 아들의 일체를 증거한 것이다. 그는 이제 보다 명확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그가 단지 한 인간으로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면, 그는 신성모독의 죄를 범한 것일 것이다. 성경은 신성모독한 문서이든지 신의 진리를 담은 문서이든지 양자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성경비평학은 아버지와 아들께서 하나인 것을 믿지 않는 방식이 많기 때문에 신성모독적 이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결정을 구체적으로 내린 학자는 칼 바르트이다. 그는 전통적인 삼위일체를 신성모독적 우상숭배라고 제시한다. 마이어 박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신비 앞에 서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이슬람 교도가 그리스도인은 두 신을 섬긴다는 비난이 신약성경의 내용에 대한 무지로 평가하였다(마이어, 467).

유대인들이 예수를 돌로 치려하였다(31절). 유대인들은 예수의 자기 주장을 자칭 하나님(make yourself God)으로 규정하였다(33절). 신성모독은 두 세 증인으로 즉결 심판이다(레 24:16). 유대인은 종교법으로 돌로 쳐 죽일 수 있었다. 유대인들이 돌로 쳐죽이려 했던 까닭은 그가 자신을 아버지와 하나인 자 곧 하나님이라고 말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일을 수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성모독을 용인한 죄도 있다. 신성모독이 각인된다면 반드시 그 행위에 대해서 지적해야 할 양심과 용기가 있어야 한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즉 참된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으로 믿지 않으면서 그를 훌륭한 분이라고 생각한다면 유대인들보다도 못한 개념을 가진 것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神性)을 밝히 증거하셨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참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참 하나님이 아니라는 학설에 대해서 명료한 자기 증거를 해야 한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선한 일은 인정하면서 자칭 하나님으로 참람한 행위라고 결정한다. 선한 사람은 결코 참람하지 않다. 귀신의 왕이나 종은 선한 일을 할 수 없다. 귀신, 사탄의 종이 선한 일은 하는 것이 아니라, 일반에 있는 하나님의 그림자이다.

 

[요 10:34-35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율법(τῷ νόμῳ)에 기록한 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신이라 하셨거든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I have said you are “gods", Ἐγὼ εἶπα Θεοί ἐστε)”는 시편 82:6(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다 지존자의 아들들이라 하였으나)을 인용하시면서 ‘율법에 기록한 바’라고 표현하셨는데, ‘율법(τῷ νόμῳ)’은 오경(Torah)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신들”이라고 부를 것을 말씀하셨다(시 82:6). 그런데 예수님의 신(God) 주장에 대해서 경악을 품었는데, 구약성경에 대한 무지를 폭로시키신 것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게로 나온 사람(ὁ λόγος τοῦ Θεοῦ ἐγένετο, the word of God came)은 신(神, θεοὺς)이라고 하신 말씀이라고 명확하게 밝혀주셨다(35절). 마이어 박사는 여호와 앞에 선 모세를 한 예로 제시하였다. 이스라엘은 모세를 하나님처럼 대하였다(마이어, 471).

예수께서 “성경은 폐하지 못하느니라(Scripture cannot be broken)”고 말씀하심으로 시편을 포함한 모든 성경의 신적 권위성을 증거하셨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폐지될 수 없는 절대적 권위의 말씀임을 증거하신 것이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것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교의 성경관이며 예수님 자신과 사도들의 성경관이었으며 정통적 기독교회의 성경관이다. 정규철 박사는 성경무오 사상이 고대교회에서부터 견지된 것이라고 밝혔다(정규철, [성경무오], 그리심, 2003).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우리의 믿음과 행위에 대한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구약성경(정경)의 시작을 에스라의 집대성에서 본다(주전 458). norma normans(norma primaria)에 대한 깊은 사색이 들어가기도 한다.

예수께서는 인용하신 시편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자들 즉 재판관들을 신이라고 부른 것을 언급하시면서, 하물며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이 어찌 참람한 일이냐고 반문하셨다. 유대인들이 예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보냄을 받은 자이심을 안다면, 그들은 예수께서 자신에 대해 하신 증거를 대항하고 반론하지 못할 것이다.

 

[요 10:36-42절] 하물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가 나는 하나님 아들이라 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참람하다 하느냐? 만일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행치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려니와 내가 행하거든 나를 믿지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으라. 그러면 너희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음을 깨달아 알리라[알고 믿으리라](전통본문) 하신대 저희가 다시 예수를 잡고자 하였으나 그 손에서 벗어나 나가시니라. 다시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으로 세례 주던 곳에 가사 거기 거하시니 많은 사람이 왔다가 말하되 요한은 아무 표적도 행치 아니하였으나 요한이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은 다 참이라 하더라.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

예수는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Υἱὸς τοῦ Θεοῦ εἰμι)이라고 밝히셨다(36절). 에고 에이미(ἐγώ εἰμι)에 하나님의 아들 에이미이다. 마이어 박사는 36-37절에서 랍비의 논증 방법, a maiore as minus(큰 것으로부터 작은 것으로, 혹은 보편적인 것으로부터 개별적인 것으로)라는 원리를 제시하였다(마이어, 471). 이러한 원리는 우리도 성경해석의 합당한 원리로 채택하고 있다. 명시적인 진리에서 덜 명시적인 해석으로 라는 구도이다. 예수는 구약성경을 근거하면 자기를 신성모독으로 평가할 수 없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언하면 아멘으로 믿어야 하였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렇게 증거하는 예수를 향해서 오히려 참람하다(Βλασφημεῖς)고 외쳤다. 그러한 유대인을 향해서 예수는 자기를 믿지 못하겠거든 자기가 행한 일이라도 믿으라고 권면하였다(38절). 믿음의 신비이다. 아버지의 일, 예수를 믿음이 없더라도 예수께서 행하신 일을 믿으면 되었는데, 그것조차 믿지 않았다. 많은 무슬림들이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을 보고서 회심한다고 한다. 착한 행실을 그대로 보고 믿어도 그 것에서 구원이 시작될 수 있다. 구원의 시작은 신비의 영역이다. 예수께서 행하신 기적들은 그의 신성(神性)의 증거이며 예수께 대한 우리의 믿음의 근거가 된다.

이렇게 증거하는 예수를 유대인들은 잡으려 하였고, 예수는 그들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요단강 저편 요한이 처음에 세례주던 곳에 거하셨다(40절). 많은 사람이 예수 앞에 나와서 요한에게는 표적이 없었지만 이 사람은 표적을 행하기 때문에 참이라며 모여 들었다(41절). 그래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었다(πολλοὶ ἐπίστευσαν εἰς αὐτὸν ἐκεῖ, 42절). 마이어 박사는 많은 사람이 모임을 고난과 죽음의 임박함으로 이해하였다(마이어, 478).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는 믿음은 완전한 믿음이 아니다. 많은 사람에서 부활의 증인이 500명이고(고전 15:6), 다락방에 모인 숫자는 120명이다. 많은 사람들은 세례 요한도 믿고 예수도 믿는 것이 합당하다. 예수의 제자들은 세례 요한이 지시한 손을 따라서 실체에 다다랐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지시한 손가락만 보고 있는 사람이 당시에도 있었다(행 19장).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께서는 이 사실을 처음부터 밝히 말씀하셨고 그의 행하신 일들이 그를 증거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아들, 곧 아버지와 한 실체, 한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지 못하였지만,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을 보고 믿는 사람이 있었다. 성경에서 이러한 믿음에 대해서 중립적인 위치에 있다. 그러나 계시가 종료된 이후에는 명시적 믿음(explict faith)만을 추구하는 것이 개혁된 신앙의 자세이다.

둘째, 양의 특징은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르는 것이다.

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른다는 것은 그를 믿고 순종하는 것을 말한다. 유대인들이 그를 믿지 않은 것은 그의 양에게 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속한다’는 표현은 하나님의 선택을 뜻한다. 요한복음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게 주신 자들’이 양들이며 그들은 다 믿고 순종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다.

셋째, 목자를 믿고 따르는 양이 받는 복은 영생이다. 

예수 믿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다.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양을 아시고 양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또 그가 주신 영생을 받은 자들은 영원히 멸망치 않으며 그들에게서 그 영생을 빼앗을 자는 아무도 없다.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예수님 믿고 순종하며 사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롬 8:1). 택자들은 다 죄사함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거룩의 열매를 맺다가 영광에 이를 것이다(롬 8:30). 세상에서 혹시 성도들에게 닥칠 환난, 곤고, 핍박, 기근, 헐벗음, 전쟁,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을 것이다(롬 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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