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가 막센티우스(Maxentius)가 밀비우스 다리 전투에서 승리한 뒤(312년 10월 28일), 313년 밀라노에서 공동황제 리키우스와 함께 칙령을 발표한 것이 밀라노 관용 칙령(Edict of Milan)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전투에서 꿈에 본 “키로(XP)” 문장을 들고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하며, 그 승리 문장은 승리한 기독교의 문장으로 자리잡기도 하였습니다. 콘스틴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Helena)도 빠질 수 없는 요소입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면 요소, 요소마다 ‘헬레나’를 셀 수 없이 들을 것입니다. 콘스탄티누스는 대제라는 호칭을 부여하였고, 수도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콘스탄티노폴리스/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로 천도하여 천년왕국을 유지하였습니다.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에 대한 관용령이고 국교령은 아닙니다.

380년 테오도시우스 황제(Flavius Theodosius)가 자신이 병이 낫자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데살로니가 칙령). 그리고 392년 모든 로마 지역에 기독교를 국교로 선택하였습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395년 로마 제국은 동과 서로 분열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이 중심도시로 문명과 문화의 중심을 이루었습니다. 1453년 5월 29일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합니다. 철옹성이 1,000년은 보호하였지만 결국 무너졌습니다. 그러면서 로마가 기독교 중심 도시의 위치를 이룹니다.

먼저 313년 이전에는 기독교는 박해를 받는 종교였습니다. 303년에도 대박해(Great Persecution)가 있었을 정도로 로마 제국은 기독교를 300년 동안 박해하였습니다. 그런데 정권을 획득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에 대해서 관용령을 선포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도 몰랐고 어느 누구도 알기 어려웠던, 교회 안에 일치되지 않은 모습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교회사에서 사벨리안주의(Sabellianism, 190년경), 말시온주의(Marcionism, 160년경), 몬타누스주의(Montanism, 170년경)등 다양한 이단 사상이 있었지만, 더 위험한 것은 이단으로 분류되지 않고 있던 유명한 사역자들이었습니다. 박해 기간에 교회는 공식적으로 이단을 규정할 자유로운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313년 기독교가 관용되면서 알렉산드리아에서 대 격돌이 발생하였습니다. 너무나 사소한 차이처럼 보이기 때문에 쉽게 분별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i'(이오타) 차이로 이단(homoiousion)과 정통(homoousion)이 되는 논쟁입니다. 앞에서 교리 논쟁은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성(사벨리안), 계시의 범위(말시온주의), 성령과 능력, 정화 운동(몬타누스주의)이었습니다. 그러나 교리 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준에 대한 이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신성 이해에 대한 민감한 격돌입니다.

아리우스(Arius, 250/256~336)는 알렉산드리아의 한 교구 장로였고, 대주교는 알렉산더였습니다. 알렉산더의 집사(deacon)이 아타나시우스였습니다. 교회의 교리 논쟁에 대해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니케아에 교회 회의를 소집하였습니다. 니케아 공의회에서 예수를 아버지와 동일실체(homoousion)으로 결정하였고, 아리우스의 견해를 배격(anathema)하였습니다. 325년 니케아 이단은 영원한 이단입니다. 그런데 아리우스는 니케아 결정을 번복하려고 여러 시도를 하였고, 자기 신분 회복까지 약속받았습니다. 그러나 회복하러 가는 도중에 죽었습니다. 니케아 공의회는 예수를 믿는 것인가?에 대한 고백입니다. 교회는 결정하였지만 쉽게 용인하지 않았고,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다시 공의회를 개최하여, 동일한 결정(homoousion)에 성령에 관한 내용을 포함시켜 신조(Creed)를 공포하였습니다. 325년 니케야 신조(Creed)와 381년 콘스탄티노플 신조는 homoousion(동일실체)에서는 동일하지만, 성령조에서 차이가 있고, Anathema 어휘를 뺀 것도 차이가 있습니다. 325년 니케야 신조는 Anathema가 있는 매우 엄중한 공회의의 고백입니다. 참고로 16세기 트렌트 공의회 법규(canon)에서는 종교개혁 사상에 대해서 수 없는 anathema를 쏘았습니다. 우리는 anathema 논쟁을 할 수 없는 종파적 기독교에 있습니다. anathema 논쟁은 보편 교회가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Extra ecclesiam nulla salus)는 체계에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장로교 밖에 구원이 없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왜 이러한 이해가 중요하겠습니까? 세상의 중심은 로마입니다. 이스탄불도 로마의 수도였습니다. 서로마가 476년에 멸망하였지만, 로마가 유럽을 지배하였습니다. 세계사에서 드러난 교회는 시작되자마나 교리 논쟁으로 세계사에 예수의 흔적을 새겼습니다. 니케야 공의회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두 번의 결정으로 씻을 수 없는 흔적을 역사에 새겼습니다. 예수 믿음(신앙)은 계시 신앙이지만, 역사적으로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어서 누구도 핑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테오도시우스는 넓은 로마 제국을 두 아들에게 분할 통치하였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395년 뒤에 동과 서로 분열되었습니다. 정치와 문화(라틴어와 헬라어)는 분열되었지만, 교회는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결국 교회도 1054년에 분열하였습니다.

410년 로마가 함락되었을 때에 어거스틴(354-430)은 “하나님의 도성(De civitate Dei)”으로 로마를 개혁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결국 476년에 최종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통상 7대 공의회라고 합니다. 7대 공의회는 황제가 세운 회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혹자는 세례받지 않은 콘스탄티누스가 소집한 교회회의를 불법회의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역사에 대한 무지라고 볼 수 밖에 없습니다. 개혁된 교회는 451년 4차 공의회까지 합당한 교리 체계로 수용합니다. 4차 공의회는 각각의 이름이 있으며, 각각의 신조가 있습니다. 니케야 신조(325년), 콘스탄티노플 신조(381년), 에베소 신조(431년), 칼케돈 신조(451년)로 명확하게 구분되어 이해해야 합니다.

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553년), 3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680년), 2차 니케야 공의회(787년)이 5-7차 공의회입니다.

449년에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가 소집한 회의는 불법으로 간주하여 빼며, 회의 이름을 도적 회의(robbers council)라 부릅니다.

최소한 로마법에서 예수 이해는 명확하게 참 하나님이시다. 로마법은 세계 모든 법의 기본 체계입니다. 세계의 시간은 7일 간격으로 진행되며, 서력(西曆)을 사용합니다. 성경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도록 훈련시키며, 시간과 공간은 예수 안에서 운행합니다.

380년 로마는 니케야 신조로 국교로 결정하였고, 381년에 콘스탄티노플 신조로 재차 확정함으로 로마는 완전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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