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9: 1-3절]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가로되 랍비여(Ῥαββί, Rabbi), 이 사람이 소경으로 난 것이 뉘 죄로(ἥμαρτεν, 罪) 인함이오니이까? 자기오니이까? 그 부모오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가 죄를(ἥμαρτεν)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니라. ※ 소경-> 맹인; (2절) 부모오니이까->부모니이까

예수께서는 길 가시다가 우연히 그를 만나셨다. 문자적으로는 걸으실 때이다. 마이어 박사는 예루살렘 성전 근처를 걷고 있었던 것으로 제안하였다(마이어, 416).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을 보셨다(1절). 예수께서 보신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아버지의 지시, 아버지의 때를 의미한다. 자신의 주된 사역이 병 고치는 일이 아니셨지만, 모든 일은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 속에 일어난다.

날 때부터 맹인(시각 장애인)된 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아름다운 세상, 푸른 하늘과 산과 들, 각양의 동식물들, 특히 사랑하는 가족들을 볼 수 없는 불행한 자이었다. 랍비들의 전설에 의하면 율법을 받았을 때와 출애굽 때에는 맹인이 없었다고 한다(마이어, 416). 구약성경에서 맹인은 특별하게 보호를 받았다(레 19:14, 신 27:18). 세상에는 심신으로 병약자들, 가난한 자들, 외로운 자들, 특히 죄에 빠져 있는 자들이 많다. 옛날 성경에서는 장애인 비하로 묘사되는 언어 형태라 하는데, 비하가 아니라 가치평가를 반영시킨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권익이 증진된 현재의 시각과 당시의 시각에 대한 차이를 분별하는 것도 성경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현재 장애인은 비장애인과 차이가 없는 수준이다. 즉 시각 장애인이기 때문에 사회에서 불이익을 받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사회가 확정되었다.

사람은 죄로 인해 각종 질병을 당한다(신 28장). 그런 죄와 질병을 인과 관계 혹은 특수 관계로 놓은 것은 부당하다. 특히 맹인이기 때문에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논리 역전 현상으로 매우 부당한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고결한 척하면서 부당한 논리 체계로 형제를 정죄한 것이다. 예수께서 그러한 판단을 인정하지 않으셨고, 누구든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타내면 된다고 밝히신 것(3절)이다.

그러나 질병은 육신의 약함, 죄로 말미암아 들어온 보편적 현상이다. 그러므로 야고보는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고 교훈하였다(약 5:16). 그러나 이 소경의 경우는, 자신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고침 받음으로 그를 믿게 하시는 것을 가리킨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난당하는 형제들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난당하는 형제들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요9: 4-5절]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내가](전통본문) 하여야 하리라. 밤이 오리니 그때는 아무도 일할 수 없느니라.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일반적으로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쉰다. 인생에게 낮과 밤이 있다. 젊음도 한 때이며 평안한 환경도 항상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때때로 우리에게는 일할 수 없는 밤이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할 만한 때에 시간을 아끼며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힘써야 한다.

예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자신이 활동하는 때를 낮에 비유하셨다(요 1:4-5). 그가 계시는 세상은 빛으로 가득한 세상이다. 그런데 어둠은 빛을 깨닫지 못한다. 마치 맹인처럼 빛이 가득한 세상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낮에 일하는 것처럼, 빛이신 예수께서 일하신다. 그 일은 깨닫지 못한 어둠에게 빛을 주시는 것이다. 어둠은 결코 빛을 주는 일을 할 수 없다. 또한 예수께서 전도하시는 일은 돌아가신 뒤에 하시지 않는다. 그는 살아계시는 동안 하나님의 일, 아버지의 뜻(보내신 자를 믿는 것)을 수행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가 잡혀 죽으실 때가 오며 그때는 밤 같아서 그가 일하실 수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 “나는 세상의 빛”(Ἐγώ εἰμι 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요한복음 8:12)이라는 말씀을 반복하셨다. 예수께서 행하신 빛의 일, 예수를 믿도록 하는 일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제자들이 수행한다. 그래서 제자들의 사역은 빛을 비취는 일이다. 제자들은 세상의 빛이다. 빛이신 예수를 믿는 사람은 빛이다. 예수님은 빛에서 나온 빛이고, 우리는 그 빛의 백성이고 세상의 빛이다. 지금 세상에는 참빛께서 밝히신 빛이 있는 빛과 어둠이 있는 세상이다.

[6-7절] 이 말씀을 하시고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 (실로암Σιλωάμ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예수께서는 말씀으로 그 소경을 고칠 수 있으셨으나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는 땅에 침을 뱉아 진흙을 이겨 그 소경의 눈에 바르시고 그에게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런 방법을 사용하신 것은 그 소경으로 하여금 주께서 고치시는 것을 느끼게 하시고 또 그에게서 믿음과 순종을 보기를 원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마이어 박사는 이레네우스가 흙(진흙)을 창세기 2:7의 아담 창조와 연결하였다고 밝혔다. 그리고 씻음은 왕하 5:10에서 아람 장관 나아만으로 연결하였다(마이어, 421).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참 믿음과 순종이다. 그 소경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었고 순종했다.

그는 그의 말씀대로 실로암(Σιλωάμ) 못에 가서 씻었다. ‘실로아’라는 이름은 성경에서 이사야 8:6과 누가복음 13:4에서 나온다. 실로아는 기혼 샘에서 터널로 연결한 샘이다. 히스기야가 예루살렘을 방호하기 위한 토목 공사로, 직선 340m이고, 터널은 515m이다. 1838년에 발견되었다. 실로아는 기혼에서 흘러 터널을 지나 모이는 장소이다. 그 못에 가서 씻었고, 맹인의 눈은 시력이 회복했다. 그 소경은 보는 자가 되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아름다운 세상을 보게 되었다. 얼마나 기쁘고 감격적인 순간이었겠는지! 그것은 기적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무엇을 창조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 그는 역사상 많은 기적들을 행하셨다. 그는 기적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기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은 과연 세상을 빛으로 볼까? 어둠으로 볼까?

[요9: 8-12절] 이웃 사람들과 및 전에 저가 걸인[소경](전통사본)인 것을 보았던 사람들이 가로되 이는 앉아서 구걸하던 자가 아니냐? 혹은 그 사람이라 하며 혹은 아니라 그와 비슷하다 하거늘 제 말은 내가 그로라 하니 저희가 묻되 그러면 네 눈이 어떻게 떠졌느냐? 대답하되 예수라 하는 그 사람(Ὁ ἄνθρωπος)이 진흙을 이겨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 저희가 가로되 그가 어디 있느냐? 가로되 알지 못하노라 하니라.

맹인이 눈을 떴고, 그 맹인이 보지 못하였던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맹인이 눈을 떴다. 이웃들은 도무지 믿을 수 없을 정도이다. 소경은 이웃들에게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말씀하셔서 그대로 했더니 보게 되었다고 증거하였다. 이 사실은 뒤에 15절에서도 또 증거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내용은 진실한 내용이다. 그것은 반복해 기록됨으로써 더 확실히 증거된다.

사람들은 그 사람(Ὁ ἄνθρωπος)을 찾았지만, 그 사람을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11-12절). 우리도 예수께로 말미암아 빛을 본 사람이지만, 빛을 보여준 그 이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점차 그를 알게 되며 그의 이름을 증거해야 한다.

[요9: 13-17절] 저희가 전에 소경 되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the Pharisees) 갔더라.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a Sabbath).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 어떻게 보게 된 것을 물으니 가로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바리새인 중에 혹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서 온 자가 아니라 하며 혹은 말하되 죄인으로서(ἄνθρωπος ἁμαρτωλὸς) 어떻게 이러한 표적(σημεῖα, sign)을 행하겠느냐 하여 피차 쟁론이 되었더니 이에 소경 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Προφήτης ἐστίν) 한대.

눈을 뜬 맹인에게 바리새인이 방문하였다. 바리새인이 심방한 이유는 축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어떤 빌미를 잡기 위한 것이었다. 심방의 목적은 사랑, 돌봄, 격려에 있다. 죄를 책망하는 심방도 돌봄이고 격려이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선하고 복된 일에서도 책망거리를 잡으려하고 있다. 천주교는 고해성사를 빌미로 죄를 보속하는 행태를 갖고 있다.

바리새인들은 맹인에게 경과를 물었고, 맹인은 그 사람(Ὁ ἄνθρωπος)이 진흙으로 바르고 실로움에 씻고 나았다고 밝혔다. 바리새인은 맹인에게 이 사람이(Ὁ ἄνθρωπος) 안식일을 범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온 사람이라고 판단하였다.

예수께서 안식일에 소경을 고쳐주신 것이 잘못이었는가? 그렇지 않다. 안식일은 죄로 인해 안식을 잃어버린 인생에게 장차 하나님께서 주실 참 안식의 예표이었다. 참 안식은 빛을 보는 것이다. 소경은 이제까지 빛을 보지 않아 참 안식을 모르고 있었고 마음에 늘 슬픔이 있었을 것이나, 고침을 받음으로 빛을 본 맹인은 큰 기쁨과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래서 빛을 보게한 그를 선지자라고 증언하였다(Προφήτης ἐστίν, 17절). 소경을 눈을 뜨게 한 그 사람은 선지자로 불렀고, 선지자가 한 말은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할 여호와의 종이었다. 우리는 보고 살지만 불평이 심하다. 빛에 있으면서도 어둠에 사는 모습이다. 어둠은 결코 빛이 행복하지 않다.

[요9: 18-23절] 유대인들이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이는 너희 말에 소경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되어 보느냐? 그 부모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가 우리 아들인 것과 소경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그러나 지금 어떻게 되어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저에게 물어 보시오. 저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저희를 무서워함이러라.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저가 장성하였으니 저에게 물어 보시오 하였더라.

유대인들의 마음은 어둡고 강퍅하였다. 그들은 그 소경이 예수님에 의해 고침받은 사실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들 속에 있었던 불신앙적 선입견은 그들로 하여금 명확한 사실 조차도 믿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맹인의 부모까지 소환하여 심문(審問, 자세히 따져서 물음)하였다. 그런데 맹인의 부모도 사회적 상황을 두려워하여 증언을 회피하였다. 이미 예수를 시인하는 자들은 출교하기로 결의한 것을 밝히고 있다(if anyone should confess Jesus to be Christ, he was to be put out of the synagogue).

그러나 그들이 그 불신앙적 편견을 버린다면, 예수님을 바로 알고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사람은 잘못된 선입견을 버릴 때에 어떤 사물이든지 바르게 분별하고 판단하고 믿을 수 있다.

[요9: 24-29절] 이에 저희가 소경 되었던 사람을 두 번째 불러 이르되 너는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라. 우리는 저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 저희가 가로되 그 사람이 네게 무엇을 하였느냐? 어떻게 네 눈을 뜨게 하였느냐? 대답하되 내가 이미 일렀어도 듣지 아니하고 어찌하여 다시 듣고자 하나이까? 당신들도 그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 저희가 욕하여 가로되 너는 그의 제자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결국 바리새인들은 맹인이었던 사람을 다시 소환하였다(24절).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를 대립시켰다. 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 주장하였다.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은 우리 신학의 핵심 중 하나이다. 우리는 예수를 믿으며, 그들은 예수를 죄인이라고 규정하였다(ὁ ἄνθρωπος ἁμαρτωλός ἐστιν).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죄인이라고 단정하였고 그 일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예수께서 죄인인 증거는 무엇인가?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이 죄라고 판정한 것이다. 예수는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신 것은 창조회복으로 말씀하셨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친 것이 죄라면 안식일에 숨쉬는 것도 죄가 될 것이다. 예수는 정죄받을 도덕적인 죄악이 없으셨다. 예수는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율법을 회복하신 것이다. 그는 참으로 정죄받을 일이 없으셨다. 그들이 모세를 믿는다는 것은 표리부동한 것이다. 그러나 모세 이후에도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많이 있었다. 참 선지자들은 그 교훈과 인품과 행위에 의해 그 진실성이 증거되었다. 유대인들은 예수께서 참 선지자이신지에 대해 양심적 판단을 해야 하며 그를 무조건 거절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저 유대인들은 어둡고 무지하고 강퍅한 마음으로 그를 정죄하였다. 유대인들은 모세도 선지자도 믿지 않았다.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의 제자라고 자처하였고(We are disciples of Moses), 맹인이었던 사람은 예수의 제자라고 하였다(You are this fellow’s disciple). 필자는 성경 읽음에서 ‘우리’에 좀 민감하게 반응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하나님을 안다고 자처하였다. 역사적 사실 지식에서는 전혀 하나님을 알 수 없다.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길은 예수뿐이다.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행 4:11-12). 오신 메시아를 믿지 않고서 하나님을 안다고 주장하는 것은 교만의 극치이다.

[요9: 30-34절] 그 사람이 대답하여 가로되 이상하다. 이 사람이 내 눈을 뜨게 하였으되 당신들이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 하나님이 죄인을 듣지 아니하시고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 창세 이후로 소경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 저희가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고침받은 그 소경은 그들의 주장에 대해 오히려 의아해 하면서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셨음을 확신하며 증거하였다. 유대인의 지도자들 앞에서 증거하는 매우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의 판단은 유대 지도자들의 생각과 판단보다 더 타당성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맹인이었던 그 사람은 자기 눈을 뜨일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만이 할 수 있다고 확증한 것이다. 그는 하나님은 죄인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확증하였다(God does not listen to sinners, 31절). 이 사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라고 확증하였다(this man were from God, 33절).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의 증거를 자기들을 변화시키려 한다고 곡해하고, 그를 쫓아내어 보냈다. 유대인은 이 사람이 죄(ἁμαρτίαις) 가운데 있다고 선언하였다. 인간은 전적으로 어둡고 부패되어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그 무지함과 완고함이 제거되고 고쳐질 수 없다.

[요9: 35-38절] 예수께서 저희가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가라사대 네가 인자[하나님의 아들](전통본문)를 믿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가로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프로스퀴네오)[경배하는지라](worship)(KJV, NASB, NIV).

예수께서 그 사람이 유대인의 법정에서 쫓겨났다는 소식을 듣고, 그 사람을 방문하셨다. 예수는 그에게 인자를 믿느냐?(Σὺ πιστεύεις εἰς τὸν Υἱὸν τοῦ ἀνθρώπου)고 물으셨다. 그 사람은 τίς ἐστιν, Κύριε, ἵνα πιστεύσω εἰς αὐτόν라고 답변하였다. 36절은 매우 단순한 문장이지만, 세 어휘로 배열시킨 심오한 문장이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주(Sir)여, 내가 믿고 싶습니다”라고 배열하는 것이 문자 번역이다. 예수께서 그에게 당신이 믿고자 하는 사람이 자기라고 밝히셨다. 그 사람은 “주님, 내가 믿습니다”라고 고백하며, 경배하였다(38절). 그 사람은 Πιστεύω, Κύριε· καὶ προσεκύνησεν αὐτῷ.이라고 말하였는데, “믿습니다. 주님, 그리고 그에게 경배하였습니다”이다. 36절과 38절은 유사한 문장 패턴이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한 그는 하나님을 향해 마음이 열려 있었다. 사람이 하나님과 그 진리를 믿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미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증거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관심도 가지지 않을 것이다. 부패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율법을 만가지로 기록하셨으나 그것을 자신들과 관계없는 것으로 여겼다(호 8:12). 그러나 그 소경에게는 하나님을 향해 열린 마음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공개적으로 분명하게 증거하셨고 소경은 그를 믿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할 때 죄사함의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요 3:16, 36; 20:31).

또 그 소경은 예수께 경배하였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선지자로 절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 행동을 수납하셨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에서 기적을 베풀 때에 섬기려는 것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거부하였다(행 14장). 그런데 예수는 그 사람의 경배를 수납하셨다. 그것은 예수께서 사람에게 경배를 받으시는 하나님이심을 인정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자기 주장은 요한복음에서 매우 뚜렷하게 나타난다. 예수는 단순한 선지자가 아니시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은 그를 경배해야 한다. 그는 단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범만이 아니시고 우리가 경배해야 할 대상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 어떤 피조물도 경배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 외에 어떤 피조물을 섬기는 것은 십계명의 제1, 2계명을 어기는 우상숭배의 죄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경배를 받으실 하나님이시다. 요한계시록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요한계시록 5:14, “네 생물이 가로되 아멘 하고 장로들은 엎드려 경배하더라.”

[요9: 39-4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소경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가로되 우리도 소경인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소경 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저 있느니라.

예수께서 심판하러 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복음을 통해 신자와 불신자, 구원받는 자와 멸망하는 자를 나누신다는 의미이다. 예수는 세상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독생자로 세상을 구원하시려고 오셨다. 그러나 그 아들을 믿지 않는 사람은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는 동시에, 어떤 의미에서는 심판이 된다. 그것은 듣는 사람들을 구원과 멸망, 천국과 지옥의 두 부류로 나누는 점에서 그러하다.

예수께서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신 것은 영적 소경인 죄인들의 눈을 뜨게 해주실 것을 암시한다. 그가 세상에 오신 것은 영적 소경들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위함이었다. 예수 믿고 구원받는 것은 영적 소경이 고침받는 것과 같다. 우주와 인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모르고 삶의 목적도 방법도, 죽음의 이유와 그 후의 세계도, 구주 예수 그리스도도 모르던 자들이 구원을 받아 눈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영적 소경임을 알지 못하고 본다고 말하는 자들은 영적 소경이 될 것이다. 스스로 인생의 삶에 대해 안다고 생각하는 자들, 그래서 돈을 버는 데나 세상의 행복을 추구하는 데 눈이 밝은 자들은 영적인 소경으로 드러날 것이다. 그들은 다 자신들이 죄인임을 보지 못하고 창조자, 섭리자, 심판자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구주를 알지 못하고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구원과 영생과 천국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마지막 심판 날을 대비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맹인이라고 규정하며 죄가 있다고 규정하였다.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하는 선언(요 1:4)은 이해할 수 없지만 현실에서 발생하였다. 빛으로 나온 그리스도인도 어둠을 좋아하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나면서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의 신성(神性)을 증거하는 또 하나의 기적이었다. 고침받았던 그 소경은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지 못함을 이상히 여겼다. 그는 예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으셨다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혜롭게 말했다. 예수께서는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증거하셨고, 소경은 예수님을 믿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다. 죄인들은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한다.

예수께서는 소경의 심령의 눈도 밝게 해주셨다. 그것이 주께서 하시는 구원의 사역이다. 구원은 하나님을 알고, 자신의 죄인 됨을 알고, 구주 예수님을 알고, 인생의 정로(正路)를 알고, 천국과 영생을 아는 것이다. 주께서는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시고 보는 자들은 소경 되게 하신다(39절). 영적 소경들은 창조자, 섭리자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과 의롭고 선한 길과 천국과 영생을 알아야 한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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