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7가지 표적. 첫째,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표적(요 2장) 둘째, 왕의 신하의 아들을 살리신 표적(요 4장) 셋째,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표적(요 5장) 넷째, 5천명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신 표적(요 6장) 다섯째, 바다 위를 걸어 오심(요 6장), 여섯째, 날 때부터 소경된 자를 고치신 표적(요 9장) 일곱째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요 11장). ※ 물고기 153마리를 잡게 하심(요 21장).

요한복음 7가지 고백(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첫째 세례 요한(요 1:34), 둘째 나다나엘(요 1:49), 셋째 베드로(요 6:69). 넷째 예수님(요 9:35; 10:36; 11:4), 다섯째 마르다(요 11:27). 여섯째 도마(요 20:28), 일곱째 사도 요한(요 20:31).

◎요 11:1-32절,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요 11:1-3절]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촌[마을]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이 마리아는 향유를 주께 붓고 머리털로 주의 발을 씻기던 자요 병든 나사로는 그의 오라비[남동생]러라.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가로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 Now a man named Lazarus was sick. He was from Bethany, the village of Mary and her sister Martha.

마르다는 마리아의 언니이었던 것 같다(김효성). 마이어 박사는 마리아를 최고 연장자로 마르다, 나사로로 제시하였다(마이어, 481). 그들이 거주한 지역은 베다니(Bethany)였다. 베다는 요단강 동편 베다니가 아닌, 예루살렘 동편으로 약 2.7Km에 위치한 지역이다.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있는 마을이다.

사도 요한은 마리아(히브리어 미리얌)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정보를 제시하였다(2절). 마리아가 예수께 향유를 붓는 사건은 12장에서 말씀한다.

병든 나사로로 말미암아 마리아와 마르다는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초청하였다. 그녀들은 예수를 주(Κύριε)로 부르며, 나사로를 “사랑하는 자”라고 하였다(φιλεῖς ἀσθενεῖ, You love is sick). 예수와 나사로와 그의 자매들의 긴밀한 관계와 신앙적 관계를 예단할 수 있다. 그들은 예수를 “하늘에서 오신 참 선지자”로서 주(主)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나사로는 부활 표적의 예시인데 사도, 12제자 안에 속하지 않는다.

[요 11:4-5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τῆς δόξης τοῦ Θεοῦ, ἵνα δοξασθῇ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δι’ αὐτῆς) 하시더라.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 ἠγάπα δὲ ὁ Ἰησοῦς τὴν Μάρθαν καὶ τὴν ἀδελφὴν αὐτῆς καὶ τὸν Λάζαρον(5절). Now Jesus loved Martha and her sister and Lazarus. 마르다와 마리아의 손위 관계에 대해서 sister로 명확하게 규정할 수 없다.

예수께서 메신저에게 나사로의 소식을 듣고 나사로의 상태가 죽을병이 아니라고 하셨다(4절). 그것은 나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아들의 영광을 위한 표적이 될 것임을 밝히셨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을 등치시킴으로 아버지와 아들이 한 실체이심을 밝히고 계신다.

예수는 마르다와 자매(sister) 그리고 나사로를 사랑하셨다(5절). 마이어 박사는 마르다의 이름을 기명함으로 요한이 마리아에 치중된 관심에 대한 균형된 의식이 있음을 밝히면서, 셈어의 문법에서 뒤에 있는 것이 강조되고 중요한 문법이라고 제시하였다(마이어, 483).

[요 11:6-8절] 나사로가 병들었다 함을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그 후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his disciples) 말하되 랍비(Ῥαββί, Rabbi)여, 방금도 유대인들이(the Jews)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서 나사로의 병든 소식으 듣고서 즉각 움직이시지 않았다. 마이어는 예수께서 요단 동편 베다니에 있었을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마이어, 484). 이틀 후에 베다니 유대로 가려고 하자(Let us go to Judea again, 7절), 제자들이 그곳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 위험한 상황을 주지시켰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께서 유대 베다니로 가시지 않은 것을 위험한 상황에 대한 인지로 생각하였는지 모르겠다. 마르다 식구들은 예수를 주(Κύριε)라고 불렀고, 제자들은 랍비(Rabbi)라고 부르고 있다.

예수께서 유대로 다시 들어가시는 것은 나사로를 살리시는 것과 함께 자기 죽음을 위한 길이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예수는 십자가의 길로 가셨다. 지금은 그 승리의 보좌에서 우리를 살리시고 계신다.

[요 11:9-10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두 시(twelve hours of daylight)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τὸ φῶς τοῦ κόσμου, world’s light)을 보므로 실족(失足)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

예수께서는 일상 생활의 예를 비유로 드셨다. 사람이 낮에 다니면 빛이 있으므로 넘어지지 않고 밤에 다니면 빛이 없기 때문에 넘어지기 쉽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은 좀 쌩뚱맞다. 예수께서 자기의 길을 명확히 아심을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낮 열두 시간”처럼 명확하게 자기의 길을 아신다. 그러나 제자들은 낯 열두시이지만 전혀 예수님의 길을 알지 못하였다. 세상의 빛에서 실족하지 않아도, 밤이 되면 실족한다. 그러나 세상의 대낮이어도 참빛에 어두우면 영혼이 실족하게 된다. 세상의 빛과 참빛은 두왕국 이론의 중요한 계기이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실족하지 않아야 하고, 영혼에서도 실족하지 않아야 한다. 예수께서 참빛이지만 제자들은 세상의 빛만 보았다.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뒤에 보좌에 앉으셔서 성령을 보내심으로 제자들은 참빛을 볼 수 있었고(의로운 태양), 세상의 빛도 분별한 주의 자녀가 되었다.

[요 11:11-14절]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Our friend Lazarus has fallen asleep).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제자들이 가로되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하더라. 예수는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나 저희는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심인 줄 생각하는지라.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예수께서 베다니를 떠나려는 시점에 나사로가 잠들었음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사로를 깨우러 가자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나사로가 잠들어 쾌유할 수 있겠다고 의견을 밝혔고, 예수께서 나사로가 죽었다고 정확하게 말씀하셨다(14절).

예수께서 죽음을 깨우는 전능하신 주 하나님이심을 밝히신 것이다. 죽음은 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왔지만, 그 죽음을 깨우시는 분이 예수, 구주이시다. 살아 있으나 죽은 사람을 부르셔서 깨우시고, 죽어 무덤에 있는 자를 깨우시는 전능하신 하나님, 생명의 심판주이시다.

주께서 잠자는 자를 깨울 수 있듯이, 주께서는 마지막 날 죽은 자를 깨우실 것이다. 성도의 죽음은 육으로는 슬픈 사건이지만, 영으로는 슬픈 사건이 아니다. 육신의 슬픔의 과도함이 영혼에 침체를 주지않도록 해야 한다. 성도의 죽음은 마지막 부활의 소망을 가진 채로 잠드는 것이다. 누가복음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눅 16장)를 보면 뜨거운 불에 있는 부자는 양심이 있는지 자기가 있는 곳으로 자녀들이 오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요 11:15-16절]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신대 디두모라 하는 도마(Thomas (also known as Didymus))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 디두모는 헬라어 소리이고 도마는 아람어식이다. 뜻은 쌍둥이다. 마태복음의 저자를 마태로 보지 않는 사람이 도마복음(Peuaggelion Pkata Thomas: The Gospel According to Thomas)의 저자는 인도에 간 도마의 쌍둥이가 썼을 것이라고 제언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다. 우리는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은 그 이름으로 한 저자가 기록하였다고 전제하고, 도마복음은 위경(僞經, 가경, Pseudepigrapha)으로 판정한다.

예수께서 나사로에게 즉각 가시지 않은 것은 제자들을 위한 것(pro vobis)이다. 그것은 모두를(pro multis) 우리를 위한(pro nobis) 것이다. 예수께서는 나사로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자신이 죽은 자를 살리는 주(主)인 것을 믿게 하기를 원하셨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랍비로 믿었기 때문에, 참 믿음을 얻어야 하였다. 그런데 제자들 중 한 사람인 도마는 다른 제자들에게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살리러 가는 예수께 함께 죽으러 가자고 선동한 것이다. 그는 가능한 가장 악한 상황 속에서 예수와 함께 죽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세 복음서에서는 베드로 사도가 그렇게 주장하였는데, 요한복음에서는 도마 사도께서 그런 주장을 한다. 도마의 결연한 의지는 결코 십자가 앞에서 유지되지 않았다. 십자가는 죽음보다 더 엄중한 사건인 것 같다.

[요 11:17-19절]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 많은 유대인(many Jews)이 마르다와 마리아에게 그 오라비(their brother)의 일로 위문하러 왔더니. 

※ 우리번역은 borther를 오라비, 오빠, 오라버니로 번역하였다. 중국어 兄弟, 일본어 兄弟로 번역하였다. 오라비는 오라버니의 낯춤말로 여자가 자기 남동생을 이르는 말이다(국어사전). “오라비”와 “오빠, 오라버니”는 같은 뜻이 아니다. 오라비는 여자의 남자 형제를 두루 이르는 말이다.

예수께서 베다니에 도착하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는지 나흘이 되었다(17절). 배다니는 예루살렘에서 5리쯤 되는 거리였다(18절). 배나디와 예루살렘 거리를 밝히는 것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예수를 주목하게 한다. ‘5 리’(σταδίων δεκαπέντε, two miles, fifteen stadia-192m)라는 거리는 약 3킬로미터이다.

나사로가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으니 그 몸은 부패되기 시작했을 것이다(39절). 모든 사람은 병에 걸리며 마침내 죽는다. 신자들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는 자들도 죽는다. 인간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이다(히 9:27). 모든 사람은 죽는다. 죽음은 인간의 죄 때문에 세상에 왔고 세상의 한 보편적 현상이 되었다. 모든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은 모든 사람이 죄인인 증거이기도 하며,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하고 구주가 필요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죽음을 준비해야 하고 죽음의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한다.

나사로가 죽어 장례를 치루기 때문에 유대인들이 마르다와 마리아를 방문하여 조문(console)하였다(19절). 유대에서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이내에 매장하였고, 애도하는 기간은 정확하지 않다. 그런데 나흘이 지나도 많은 유대인이 나사로를 조문한 것은 나사로가 상당한 명망이 있었다고 상상할 수 있다.

[요 11:20-24절]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말을 듣고 곧 나가 맞되 마리아는 집에 앉았더라. 마르다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원문)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 마르다가 가로되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

마르다는 예수께서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수께서 집에 들어오실 때에 마리아는 집에 앉아있었고, 마르다는 예수께 여쭈었다. 요한복음에서 마르다의 행동은 매우 적극적으로 정확한 의사 표현을 드러내고 있다. 마리아는 소극적인 모습인데, 요한복음 12장에서 가장 놀라운 행동을 한다.

마르다는 예수께 ‘주님(Lord)’이 계셨으면 자기 오라비(남동생)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였다(21절). 그리고 “이제라도” 주께서 하나님께 구하시면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고 안다고 주장하였다(καὶ νῦν οἶδα ὅτι ὅσα ἂν αἰτήσῃ τὸν Θεὸν δώσει σοι ὁ Θεός: whatsoever thou wilt ask of God, God will give it thee, 22절). 마르다의 요구가 상당히 묘하다. “하나님께 구하면,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이다. NIV는 하나님(God)이라는 단어는 한 번 사용하여 복잡성을 피하였다. 마르다는 예수의 표적(기적)이 예수께서 하나님께 구하여 이룩한 것으로 이해한 것이다. 마이어 박사는 마르다의 이해가 랍비에 대한 이해와 차이가 없다고 밝혔다(마이어, 486).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나사로의 부활을 말씀하셨다(23절). 마르다는 즉각 “마지막 날 부활 때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안다고 답변하였다(24절). 예수와 마르다의 큰 이견이 있는 것을 바로 알 수 있다. 마르다는 꾸준하게 안다(Οἶδα)는 말을 반복하고 있다. 기노스코(ginosko)와 오이다(oida)에서, 기노스코는 객관적, 이론적 지식이고 오이다는 주관적, 체험적 지식으로 분류한다. 그러나 오이다고 결코 약하거나 변동스러운 상태는 아니다. 우리는 마르다의 고백을 통해서 당시에도 부활 신앙이 있었는데 마지막 날에 몸의 부활을 믿었다는 것이다. 마르다가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에센파의 영향으로 평가하는 부류가 있다. 베다니 남매가 바리새파적인가 에센파적인가에 대해서 마이어 박사는 은둔하지 않고 시민활동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리새파적이라고 제시하였다(마이어, 497).

우리의 종말론은 마르다의 이해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나사로가 그 부활의 표적으로 실재로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었다.

[요 11:25-2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ὁ Ἰησοῦς 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ὁ 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 κἂν ἀποθάνῃ ζήσεται)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πιστεύων εἰς ἐμὲ)는 영원히[결코](원문)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예수께서 자신을 에고에이미로, 부활이요 생명(Ἐγώ εἰμι ἡ ἀνάστασις καὶ ἡ ζωή, 5th)이라고 밝히셨다(25절). 그런데 이번 에고에이미에서는 뒤에 더 긴 서술을 하시는데, 부활과 영생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예수께서 부활은 믿는 자는 죽어도 살고, 살아서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않음으로 말씀하셨다. 쉽지 않는 말씀이다. 예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며, 또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것인데, 나사로는 죽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께서 마르다에게 이것을 믿느냐(πιστεύεις τοῦτο)고 요구하셨다(26절).

[요 11:27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πεπίστευκα)[믿었나이다, 현재완료].

마르다는 예수의 질문에 그렇다(Ναί, Yes)고 답하며, “주는 그리시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음(Κύριε· ἐγὼ πεπίστευκα ὅτι σὺ εἶ ὁ Χριστὸς ὁ Υἱὸς τοῦ Θεοῦ ὁ εἰς τὸν κόσμον ἐρχόμενος)”었다고 고백하였다(27절). 에고 에이미에 에고 페피스테우카로 답변한다. 예수는 자존자요, 우리는 믿는자이다. 마이어 박사는 현재완료형에 대해서 성숙하고 사려 깊은 확신과 깨달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제시하였다(마이어, 500).

[요 11:28-32절] 이 말을 하고 돌아가서 가만히 그 형제 마리아를 불러 말하되 선생님이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하니 마리아가 이 말을 듣고 급히 일어나 예수께 나아가매 예수는 아직 마을로 들어오지 아니하시고 마르다의 맞던 곳에 그저 계시더라. 마리아와 함께 집에 있어 위로하던 유대인들은 그의 급히 일어나 나가는 것을 보고 곡하러 무덤에 가는 줄로 생각하고 따라가더니 마리아가 예수 계신 곳에 와서 보이고 그 발 앞에 엎드리어 가로되 [주여,](원문)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남동생]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하더라.

예수께서 마르다와 대화를 마친 뒤에 마리아를 불렀다(28절). 마리아는 집 안에 있었다. 부름을 받은 마리아는 급하게 예수께 나왔다. 예수는 화끈한 마르다 때문에 아직까지 집에 들어오지 못한 상태였다. 마리아가 밖으로 나오자 집안에 있던 유대인들도 마리아를 따라서 나왔다. 유대인들은 마리아가 무덤으로 곡하러 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따라 나섰다. 마리아는 무덤이 아닌 예수 앞에 섰다. 그리고 마르다와 동일한 내용을 말하였다(주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32절).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죄 때문에 죽는 것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죽음이 있다. 

우리가 비록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죽음을 당한다면 그것은 죄인이 아닌 의인의 죽음일 것이다. 어찌되었든지 우리의 몸에서 주의 영광을 위한 흔적이 나타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질병, 고통, 죽음이라는 현상으로 판단하지 않아야 한다. 그 현상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신 뜻이 이루어짐에 깊은 관찰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로 이끌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상, 상황은 결정이 아니라 생존의 근거일 뿐이다. 결정은 그것을 수용하는 본인에게 있다. 결정은 그 시간을 창조하시며 이끄시는 하나님께 있다.

둘째, 성도의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 

주께서 나사로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하셨다. 나사로는 나흘 뒤에 다시 살지만, 그럼에도 성도의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 죽은 자는 잠자는 자이다. 성도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누군가가 깨우면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 깨우는 자는 예수이시고, 깨움을 입으면 부활이다. 잠자는 자가 깨움을 받듯이, 죽은 성도들은 마지막 날에 영광스런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복된 천국에서 영광스러운 삶을 영원토록 누릴 것이다. 그런데 누구가 잠을 자다가 깨움을 받는다. 주의 영광 앞에서 기뻐하는 부활과 주의 영광 앞에서 변명과 이를 가는 부활이 있을 뿐이다.

셋째, 예수께서 부활과 생명이시다

죽음은 인간에게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며, 부활과 영생은 인간에게 가장 큰 복이다. 죽은 자의 부활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큰 은혜이며 영생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다. 요한복음 6:39-40,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을 얻고 또 몸의 부활과 영생을 얻는 진리를 전한다. 여기에 인간의 가장 불행한 문제인 죽음의 해결책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해결책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죽음의 해결자로 오셨다. 우리는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과 우리의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믿고 구원을 얻었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사람이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어야 한다. 예수를 믿음으로 영생과 부활에 이른다.

◎요 11:33-57절, 나사로야, 나오라

 

[요 11:33-34절]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心靈에 痛憤)히 여기시고 민망(憫惘)히 여기사(he was deeply moved in spirit and troubled) 가라사대 그를 어디 두었느냐? 가로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 나온 마리아는 울고 있었고, 따라온 유대인들도 울고 있었다. 예수께서 우는 마리아를 보시며 심령에 통분히 여기셨다. 마리아는 단순하게 집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울고 있었던 것으로 추축할 수 있다(마이어, 504).

‘통분히 여기다’는 헬라어(엠브리마오마이) 의미로는 ‘크게 요동하다’는 뜻이며, ‘민망하다’는 원어(타랏소의 수동태)는 ‘괴롭다’는 뜻이다. 그런데 ‘심령’(in spirit)가 쉽지 않은 서술이다. 예수께서 통분하시고 민망히 여기심이 전인격적인 모습임을 밝히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신이 살릴 나사로의 죽음과 그의 우는 것을 보시면서 분노하신 것은 죽음 자체에 대한 명확한 거부 의식이다.

‘죽음’은 사람 관계에서 이별이기 때문에 슬픔이지만, 하나님께는 자기와 자기 백성의 관계를 깨뜨린 결과인 죄 때문이다. 그러므로 죄와 죽음에 분노하신 것이다(마이어, 505). 사람들의 슬픔인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하심으로 기쁨을 회복하셨다. 그런데 말세에는 사랑이 식어감으로 죽음에 슬퍼하지 않은 삶의 구조가 정착된다. 강팍한 세상이 심판 대상이 아니라 신자가 존재하지 않는 세상이 심판 대상이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나사로의 무덤을 찾았고, 마리아는 예수를 나사로의 무덤으로 인도하였다.

[요 11:35-36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이에 유대인들이 말하되 보라, 그를 어떻게 사랑하였는가 하며.

ἐδάκρυσεν ὁ Ἰησοῦς(35절), 마이어 박사는 요한복음에서 가장 짧은 문장이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셨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는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셨다. 유대인들은 예수의 울음에 나사로에 대한 애통한 마음으로 이해하였는데, 예수는 죽음이 있는 세상에 대한 울음이다(마이어, 506). 그래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 참 사람임을 드러냈다고 보았다(마이어, 506).

[요 11:37-39절]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에 예수께서 다시 속으로 통분히 여기시며 무덤에 가시니 무덤이 굴이라. 돌로 막았거늘 예수께서 가라사대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가로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 굴과 터널(Tunnel vs Cave), 굴은 막힌 공간, 터널은 양쪽이 개방되어 이동이 가능한 지하 공간

유대인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사람인데, 죽지 않게는 할 수 없었다..라고 핀잔을 주었다(37절). 예수께서 친구 나사로가 죽지 않게 하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 인간은 한 번은 다 죽게 되어 있다. 이 세상에서 한번 죽는 죽음을 막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유대인들은 랍비가 죽지 않게 막을 수는 있겠지만, 죽은 자를 살리는 것까지는 도저히 상상하지 못하였다.

예수께서 유대인들의 속닥거림을 들으시며 다시 통분히 여기셨다(38절). 예수께서 세상에 죽음이 있는 것을 통분히 여기셨고, 그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끌 구주를 믿지 않으심을 통분히 여기신 것이다. 그러한 유대인을 향해서 자기가 생명의 주, 부활의 주인 것을 역사(시간과 공간)에서 밝히셨다(manifest).

사도 요한은 유대의 무덤 형태, 굴(a cave)로 된 것을 설명하고 있다(38절). 예수께서 무덤의 돌을 옮기라고 명령하셨다(39절). 죽은 자(나사로)의 누이(마르다)는 죽은지 나흘이 되어 벌써 냄세가 나는 상태라고 밝혔다(39절).

[요 11:40-42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신대 [그러므로 그들은 그 죽은 자가 놓여 있는 곳에서](전통본문)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가라사대 아버지여(εἶπεν Πάτερ),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예수께서 주저하는 마르다에게 믿음을 요구하셨다(40절). 믿으면(if you believe)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다(you will see the glory of God). 참고로 중세 스콭라 신학은 믿음와 이해 관계로 규정하여, 믿음이 이해를 위한 수단으로 연관 관계로 규정하였다. 17-18세기 후기 개혁파 신학은 지식을 이해와 연관하여 지식을 신학의 근본으로 삼았다. 그러나 믿음은 이해나 지식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끈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않는 지식은 사변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아들의 영광이며 아들의 이름이 전파되는 것이다. 마르다가 좋은 믿음을 갖고 있었지만 아직 부활의 주님에 대한 믿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부활의 주님은 예수이시다. 죽은 자를 살리시는 능력은 십자가 이전에도 예수께 있었다. 성육신하신 상태에서도 참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구약이나 예수 시대나 신약 후 교회 시대에도 믿음의 대상은 오직 성자 하나님이시다.

예수께서 열린 무덤 앞에서 아버지께 감사하였다(41절). 예수께서 아버지깨 아뢰는 것은 기도라기 보다는 대화로 보인다(41절). 많은 주석가들은 기도하는 것으로 주석하는데, 기도가 아니라고 제언하는 이유는 성자께서 부활의 주님이심을 명확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예수께서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신 이유는 유대인들이 자기를 믿도록 하기 위함(아버지께서 자기를 보내심)이었다(42절). 아버지께서 보내셔서 아버지를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를 믿도록 하셨다. 그래서 믿음은 예수를 믿는 것이고, 곧 아버지를 믿는다. 이것을 아타나시우스, 나지안주스 그레고리는 놀라운 교환(admirabile commercium, that is, a wondrous exchange)이라고 하였다.

[요 11:43절] 이 말씀을 하시고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예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너라” 하고 부르셨다. 죽은지 나흘되어 부패된 냄세가는 나는 나사로의 이름을 불렀다. 그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를 부르셨거나 아버지께 호소하신 것이 아니었고 자신의 권위로 나사로를 부르셨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도 친히 죽은 자들을 일으키실 것이다. 요한복음 5:28-29, “이를 기이히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마지막 심판의 날에 의인과 악인, 즉 믿고 순종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다. 데살로니가전서 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요 11:44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주의 음성을 들은 나사로가 베로 동인 채로 무덤에 나왔다. ‘베’라는 원어(케이리아)는 ‘붕대’ 혹은 ‘수의’를 가리킨다. 죽은 나사로는 수의를 입은 채, 얼굴에 수건에 싸인 채로 무덤에서 나왔다. 그는 예수께서 부르신 소리를 들었고 살아났다. 수의나 얼굴의 수건을 벗을 겨를도 없이 무덤 밖으로 나왔다. 이것은 표적이다. 이것은 부활의 주님을 계시하는 표적이다. 죽은 지 나흘이나 된 사람이 일어났다. 썩는 냄새가 나기 시작한 자가 일어났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신성(神性)과 자신이 부활과 생명이 되심을 증명하셨다. 그가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그는 전에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을 살리셨고(눅 7:11-17) 야이로의 외동딸도 살리셨다(눅 8:40-42, 49-55).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연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시요 우리의 구주이시다.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온 나사로의 수의와 수건을 풀어주어 자유롭게 하였다(44절).

[요 11:45-46절]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나사로 무덤 앞에 선 것은 마르다와 대화인데(39절), 요한 사도는 사람들이 마리아에게 와서(many of the Jews who had come to visit Mary) 예수께서 하신 일을 본 것으로 말하고 있다. 마이어 박사는 당시에 마르다보다 마리아가 더 잘 알려졌기 때문이라고 제시하였다(마이어, 515).

예수께서 하신 일(what Jesus did)을 본 많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믿었고(ἐπίστευσαν εἰς αὐτόν), 그 중에서 어떤 자들은 바리새인에게 예수께서 하신 일(what Jesus had done)을 보고하였다(46절).

예수께서 죽은 자를 살리는 기적(표적)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도, 그 사건을 보면서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으로 분리되었다. 그것도 마리아와 관계된 사람들 중에서 나뉘었다. 마이어 박사는 1세기 이스라엘에서 예수로 말미암아 분리가 발생하였고, 그것은 지금도 유효하다고 제시하였다(마이어, 516).

표적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고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방편이었다. 요한복음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그러나 믿지 않는 자들도 있었다. 똑같은 사건 앞에서도 믿는 자들이 있고 믿지 않는 자들이 있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에베소서 2:8-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2,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님이라.”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택하시고 때가 되어 부르시고 이끄시는 자들만 예수께로 나아와 그를 믿을 수 있다. 요한복음 6:37, 44,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요한복음 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요 11:47-48절] 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공회(συνέδριον, the council)를 모으고 가로되 이 사람이 많은 표적을 행하니 우리가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저를 이대로 두면 모든 사람이 저를 믿을 것이요 그리고 로마인들이 와서 우리 땅과 민족을 빼앗아 가리라 하니. * ‘산헤드린’(סַנְהֶדְרִין)이라는 말은 헬라어 ‘수네드리온’(συνέδριον)에서 나온 히브리 차용어(loan word)이다. 산헤드린은 예루살렘에서 대제사장을 수장으로 하여 70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이들이 재판관처럼 참여하는 최고법원(supreme court)의 역할을 하였다. 복음서에는 이 산헤드린의 구성원들을 다양하게 표현하는데, 막 11:27에는 대제사장들(ἀρχιερεῖς), 서기관들(γραμματεῖς), 장로들(πρεσβύτεροι)이 공회원임을 말한다(막 14:43; 마 27:41).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그들의 구성원은 바리새파 사람들과 사두개인들로 구성되었고, 바울에 대한 입장이 양자 간에 극명하게 갈렸음을 보여준다(행 23:7).(김범식, "공회(수네드리온)에 대하여"에서)

 보고를 받은 바리새인들은 대제사장에게 알려 공회를 열었다(47절).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은 한 마음이 될 수 없는 집단이었는데, 예수를 싫어하는 마음으로 한 공회를 개최하였다. 공회는 바리새인이 선동하여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당시 예수님에 대한 적들의 생각이 등장한다. “그는 마술을 행했고, 이스라엘을 유혹하고 미혹했으며 이들을 잘못된 길로 인도했다(b Sota 47a). 또한 그는 마술을 행했고 이스라엘을 미혹했고 폭발시켰다(b Sanhedrin, 43a). 바울과 동시대의 랍비 요하난은 예수님에 대해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린 것으로 유명한다. 그는 처음에는 선지자였으나 나중에는 마술사였다(b Sanhedrin, 106a)"(마이어, 517).

공회에서 합의된 내용은 ”사람들이 저를 믿을 것이며, 그러면 로마인이 와서 땅과 민족을 빼앗을 것“(48절)이다. 전자는 맞지만 후자는 틀리다. 전형적인 정치 행위이다. 본색은 ”사람이 저에게 마음을 주면 안 된다“이다. 그런데 공포, ”로마 군대가 침략할 것이다“를 배치하였다. 그런데 정작 그들은 로마 군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1차 유대 전쟁(70년), 2차 유대 전쟁(랍비 아키바 벤 요셉, 대장 바르 코크바, 132-135년)을 시도하여 그들이 피하고 싶은 전멸 상태로 가버렸다. 그들은 예수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위치에 대한 애착뿐이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은 그 기득권을 향해 돌을 던진 것이 아니라, 어찌 되었든지 유대인들 중에서 얼마를 구원하시려(자기를 믿도록 함) 하신 것이다.

[요 11:49-57절] 그 중에 한 사람 그 해 대제사장인 가야바(Caiaphas, who was high priest)가 저희에게 말하되 너희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에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 이 날부터는 저희가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유대인 가운데 드러나게 다니지 아니하시고 여기를 떠나 빈 들 가까운 곳인 에브라임이라는 동네(a village called Ephraim)에 가서 제자들과 함께 거기 유하시니라. 유대인의 유월절(the Jewish Passover)이 가까우매 많은 사람이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하여 유월절 전에 시골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더니(many went up from the country to Jerusalem for their ceremonial cleansing before the Passover) 저희가 예수를 찾으며 성전에 서서 서로 말하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저가 명절에 오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이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누구든지 예수 있는 곳을 알거든 고하여 잡게 하라 명령하였음이러라.

유대 지도자들은 공회를 개최하여 민족의 존망을 놓고 토론하였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공동체를 위해서 한 명을 희생시키는 것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르네 지라르는 이러한 구도를 희생염소(scapegoat) 구도로 밝혔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희생염소를 신성화하는 것도 거부하였다. 모든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한 사람을 희생하는 것, 곧 자기의 직위를 안전하게 유지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구도가 묘하게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어린양을 잡고 속죄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다. 묘한 오버랩이다. 예수는 유대인들을 피해 빈들 가까운 에브라임 동네에 머무셨다. 유대인의 유월절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수장절-수전절-유월절 순서이다. 유월절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하려는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지 않을 것이라고 숙덕거렸다. 이미 예루살렘에는 예수를 잡으려는 수배령이 내려졌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예수님의 눈물. 

예수께서 나사로를 사랑하셨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셨다. 예수의 하나님과 인간다운 모습이다. 하나님으로 죽음에 대한 슬픔이고, 인간으로서 죽음에 대한 슬픔이다.

둘째, 우리는 예수께서 죽은 지 나흘된 나사로를 살리신 일을 통해 그가 하나님의 아들, 참 하나님이심을 믿어야 한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많은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다. 성경 기록은 믿을 만하지 못한 어떤 것을 믿으라고 강요하는 미신적이거나 불합리한 교훈이 아니다.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주신 믿을 만한 증거들을 보고 믿으라고 말하는 복된 소식이다. 주께서는 죽은 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셨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우리의 생명을 다시 일으키실 신적 구주이심을 증명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

셋째, 은혜가 아니고서는 사람은 참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킨 표적을 보았다. 그럼에도 믿지 못하고 유대 지도자들에게 보고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그리고 그 보고를 받은 유대 지도자들은 많은 믿을 만한 증거들을 들었음에 불구하고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그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믿음은 육신의 눈으로 보거나 듣는 방식으로 취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 선물이다. 창세 전에 택하심을 받은 자들만 부르심을 입고 하나님께서 계신 것과 우리가 죄와 진노 아래 있는 것과 구주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께서 그 유대인들에게 믿도록 전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사람에게 예수 이름을 증거하며 전파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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