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8:1-27절, 잡히시고 심문 당하심

[요 18:1-6절]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crossed the Kidron Valley) 거기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다.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 유다가 군대와 및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하속들을 데리고 등과 홰[횃불]와 병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가라사대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가라사대 내로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저희와 함께 섰더라. 예수께서 저희에게 내로라 하실 때에 저희가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 개역에서는 “내로라”인데, 개역개정에서는 “내가 그로라”로 번역하였다. 개역성경이 원문에 문자 번역을 수행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예수께서는 유월절 식사와 그 후에 제자들에게 주신 여러 교훈과 기도를 마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를 지나 건너편 감람산(830m) 겟세마네(Gethsemane) 동산으로 나가셨다. 기드론 시내는 예루살렘 북쪽에서 시작하여 사해로 이어지는 골짜기를 가리킨다. 이 시내는 평소에는 물이 없고 겨울의 우기(雨期)에 물이 흐르는 ‘와디’라는 시내이다. 예루살렘(해발 730m)은 기드론 시내(Valley of Johoshaphat, 예루살렘 동쪽)와 힌놈 시내로 나뉘어 있다. 예수와 제자들은 습관을 따라서 기드론 골짜기를 지나서 겟세마네 동산에 들어가셨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예수께서 그 밤에 그곳에서 약 3시간 기도하셨다고 증거한다(마 26:40, 44; 막 14:37, 41). 사람이신 예수께서는 그 밤에 간절하게 기도하신 것은 주의 제자들에게 모범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께서 기도하는 장소를 가룟 유다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2절).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에 속한 졸개들을 대동하여, 등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나왔다(3절). 다른 복음서들은 사람들이 강도라도 잡을 자들처럼 ‘검과 몽둥이’를 가지고 왔다고 증거한다. 요한복음에서는 기도하는 과정이 생략되었다.

예수께서 살벌한 군사들 앞에서 누구를 찾느냐?(4절)고 질문하셨다. 그들은 정확하게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고 답변했고, 예수께서 “내가 그(I am he, Ἐγώ εἰμι)”라고 말씀하셨다. 그 장면은 유다도 함께 있었다. 예수께서 “내가 그”라고 말씀하실 때에 그들은 물러서며 땅에 엎드려졌다(6 ). 5절에서 “내가 그(he)”라고 하신 것에서 원문에서는 "Ἐγώ εἰμι"만 있다.

내가 그다.

[요 18:7-11절]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저희가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로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의 가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니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이에 시몬 베드로(Simon Peter)가 검을 가졌는데 이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Malchus)라.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예수께서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선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너희는 누구를 원하느냐?)고 물으셨다(7절). 그들은 다시 나사렛 예수(Jesus of Nazareth)라고 하였고, 예수께서 내(ἐγώ εἰμι)로라고 하셨다(8절). 그런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잡히는 것을 용납하셨다(8절). 예수께서 그들에게 잡히신 것은 아버지께서 주신 자들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않으려는 것이다(9절).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심을 수동적으로 주장하려는 것은 요한복음에서 일치되지 않는다. 예수께서 온전하게 십자가로 가셨고 어린양으로 죽으셨다. 주께서는 과연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하셨고 아끼셨다(요 13:1). 자신보다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다. 주님의 사랑을 피동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좋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자신만을 체포하고 제자들은 보내도록 요구하셨다. 아버지께서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않기 위함이다. 가룟 유다는 예수와 함께하지 않았다. 예수와 함께한 제자들 중에서 베드로와 한 제자(아마도 요한)이 잡히신 곳으로 따라 갔고, 나머지는 도망쳐서 흩어졌다. 그럼에도 예수께서는 그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 자기 몸을 연약한 최강의 연합군대에 내 놓으셨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검을 빼어 말고(Malchus)라는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다. 베드로는 다른 제자들보다 용기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고 말씀하셨다(11절). 마태복음에 보면, 그는 또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두 영[약 72,000명]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이것까지 참으라”고 말씀하신 후 그 귀를 만져 낫게 해주셨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악인들의 악행에 대해 악으로 보복해서는 안 된다고 교훈하셨었다(마 5:39-40). 지금은 칼로 싸울 때가 아니라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셔야 하였다. 마태복음에서 베드로는 첫번째 죽음을 예고하실 때에 그 길을 막다가 꾸짖음을 받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칼을 휘둘러 주님께서 가시려는 길을 막았다. 그러나 예수께서 칼을 넣으라고 하셨고, 아버지의 잔(the cup the Father)을 마시겠다고 하셨다(11절).

누가복음에서 예수께서 베드로의 칼에 의해서 상해를 입은 병사를 치료하셨다(눅 22:5). 요한복음에서는 생략하였는데, 대신하여 그 상해받은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마이어 박사는 말고(Malchus)라는 이름이 이방인 혹은 아람 사람으로 제언했다. 그래서 개종한 유대인으로 보았다. 그래서인지 대제사장에게 충성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베드로 사도가 검을 휘두르는 것은 검으로 예수님을 보호할 것으로 생각했을까? 지금이 반역의 때라고 여겼을까? 검으로는 예수님을 보호할 수도 없고, 예수께서 세우시려는 나라도 세우지 못한다. 또한 예수는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으며 보호받지 않는 영광의 주이시다.  

 

사람에게 의탁하지 않고

보호받지 않는

영광의 주

[요 18:12-14절]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하속(下屬)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 먼저 안나스(Annas)에게로 끌고 가니 안나스는 그 해의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the father-in-law of Caiaphas)이라. 가야바는 유대인들에게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는 것이 유익하다 권고하던 자러라.

군대와 천부장은 로마 군인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유대인 군대의 장교로 보아야 한다. 로마 군대가 유대인들의 명령 체계에 들어가는 것은 부당하다. 군대는 헤롯의 군대일 수도 있다. 그리고 성전의 군병들, 그리고 바리새인의 하속들로 병력을 구성하였다. 유대의 총력 그리고 모두가 집합해서 예수님을 체포하였다.

사람의 군대가 하나님의 아들을 결박하였다. 사람이 하나님을 결박한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거꾸로 된 일이다. 온 세상의 심판자이신 그가 죄인들에게 결박을 당하시는 일이 역사상 실제로 일어났다. 이것이 악한 세상의 모습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 신비 중의 신비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체포하여 먼저 안나스에게 끌고 갔다. 다른 복음서들은 그들이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끌고 갔고 대제사장은 공회 앞에서 그를 심문했다고 증거했으나, 요한은 그들이 그를 먼저 안나스에게로 끌고 갔다고 보충적으로 증거했다. 안나스는 당시 대제사장 가야바의 장인이었다. 가야바는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해서 죽는 것이 유익하다고 주장하였다(14절). 가야바의 주장은 전형적인 희생염소(scapegoat) 구도이다. 그런데 가야바는 신성화를 주지 않으려고 로마의 반역자로 처절하게 죽이려고 계획하였다.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들은 유대 사회의 지도자들이었으나 부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항상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과 교통하므로 백성들보다 더 경건해야 했으나 부패되어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고 공모하였다. 젊은이들은 혹 믿음과 인격이 부족해서 잘못을 범할지라도 노인들이 바른 조언을 해야 할 터인데, 안나스가 이 모든 일을 조종하였던 것 같다. 자기 권리를 지키려고 성을 쌓는다면 그 성 안에서는 왕이 될 수 있지만, 성 안에 제한된 인생이 된다. 아무리 큰 성도 제한된 성에 불과하다.

사람에게 결박당함을

허락하신 하나님

[요 18:15-18절] 시몬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하나가 예수를 따르니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라. 예수와 함께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고 베드로는 문 밖에 섰는지라. 대제사장과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나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여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더니 문 지키는 여종이 베드로에게 말하되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하니 그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 하고 그때가 추운 고로 종과 하속들(the servants and officers)이 숯불(a charcoal fire)을 피우고 서서 쬐니 베드로도 함께 서서 쬐더라.

베드로와 함께 다른 한 제자가 예수님을 따랐다. 마태복음은 예수께서 잡히시는 때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고 베드로는 비록 멀찍이이었지만 예수님을 따라갔다고 증거했다(마 26:56, 58). 대제사장과 아는 한 제자가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해 베드로를 데리고 들어왔다. 그 한 제자는 아마도 요한이었을 것이다. 마이어 박사는 요한이 목격하였기 때문에 친절하고 자세하게 보도한다고 제시하였다.

그 밤에 베드로는 문 지키는 여종 앞에서 자신은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고 고백하였다. 요한복음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부인하는 모습이 상세하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부인한 뒤에도 그 뜰에 있었다. 그 밤은 추운 밤이었다. 종과 하속들도 숯불 근처에 모여 있었고 베드로 함께 쬐고 있었다(18절). 베드로는 추워서 숯불 앞에 섰다. 예수님은 괴로움의 장소에 있는데 베드로는 따뜻한 곳을 찾았다. 시험은 종종 성도가 예상치 못한 때에 닥친다. 사탄은 우리를 주목하며 틈을 노린다. 여종의 갑작스런 질문에 베드로는 실수를 했다. 그 밤에 깨어 기도하지 않았던 베드로는 주님의 염려대로 크게 실수하고 말았다(마 26:41).

[요 18:19-24절]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과 그의 교훈에 대하여 물으니(about his disciples and his teaching)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드러내어 놓고 세상에 말하였노라. 모든 유대인들의 모이는 회당과 성전에서(in synagogues or at the temple) 항상 가르쳤고 은밀히는 아무것도 말하지 아니하였거늘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내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 들은 자들에게 물어 보라. 저희가 나의 하던 말을 아느니라. 이 말씀을 하시매 곁에 섰는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가로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 잘하였으면 네가 어찌하여 나를 치느냐 하시더라. 안나스가 예수를 결박한 그대로 대제사장 가야바(Caiaphas the high priest)에게 보내니라

대제사장은 예수께 제자들과 교훈에 대해서 심문하였다(19절). 예수께서 가야바의 질문에 직접 대답지 않으시고 자신이 회당과 성전에서 사람들에게 드러내놓고 다녔고 가르쳤는데 묻는 이유가 무엇인지 반문하셨다. 다 알고 있을 내용을 왜 질문하였을까? 대제사장이 예수를 체포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마음은 이미 예수님을 정죄하였고 단지 그 정죄의 정당성을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그의 질문에 대답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고 그 앞에 비굴하게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려 하지도 않으셨다.

이 말씀을 하시자, 곁에 선 하속 하나가 손으로 예수님을 쳤다(22절). 그때 예수께서 친 자를 향해서 “내가 말을 잘못하였으면 그 잘못한 것을 증거하라”고 말씀하셨다(23절). 사람을 정죄하려면 먼저 그의 죄를 확증해야 한다. 죄를 확증하지 않고 남을 정죄하는 것은 그 자체가 큰 잘못이며 큰 악이다. 안나스는 예수님을 결박한 채로 대제사장 가야바에게 보내었다. 공관복음은 가야바 앞에서 되어진 일만 증거하지만, 요한은 그 내용을 생략하고 안나스 앞에서 되어진 일만 보충해 증거한다. 안나스가 모든 일을 주도하였지만 결정은 대제사장 가야바가 하였다.

[요 18:25-27절] 시몬 베드로가 서서 불을 쬐더니 사람들이 묻되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 베드로가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아니라 하니 대제사장의 종 하나는 베드로에게 귀를 베어 버리운 사람의 일가(一家, a relative of the man)라. 가로되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 이에 베드로가 또 부인하니 곧 닭이 울더라. ※ 26절. 일가와 친척의 차이. 일가친척(一家親戚), 일가는 동일 성씨로 엮인 친척이다. 친족은 직계 8촌, 모계 4촌이다. 직계는 아버지-아들-손자이고, 방계는 형제, 자매, 백부, 숙부, 조카 등이다. 친척이란 핏줄이 같은 친족과 인연으로 맺어진 내척(內戚), 외척(外戚), 인척(姻戚)등을 포함하여 일컫는 말로 살붙이라고도 한다.

그 과정에 시몬 베드로는 사람들과 함께 불을 쬐고 있었다(25절).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고 질문하였다(You aren’t one of his disciples too, are you). 베드로 사도는 아니(I am not, εἶπεν Οὐκ εἰμί)라고 답변하였다.

그 때 베드로에게 귀를 배어 버린 사람의 친척이 재확인하였다(26절). 그 사람은 자기 친척의 귀를 벤 베드로를 기억하여 그 곳에서 보았다고 증거하였다. 그런데 그의 질문이 매우 이상하다. 그것은 자기가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형, 보지 않았느냐?고 질문한 것이다. 그렇게 질문한 것은 베드로의 답변을 유도한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부인하였다(27절).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다른 복음서들에 보면, 그는 두 번째는 맹세하며 부정하였고,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정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매우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는데, 세번째에는 동산에서 베드로를 보았다는 증언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고 부정한 것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함으로 예수의 제자에서 벗어났는데, 그를 확인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질문하지 않았다. 베드로 사도의 부인은 4 복음서에 모두 등장한다. 12사도들 중에서 누구도 베드로를 원망, 비난, 책망하지 않았다. 이것이 교회의 한 아픔이고 인내이다. 교회는 배교자에 대해서 인내하는 방식을 취한다. 도나투스파는 배교에 대해서 엄격하게 적용하였다. 교회는 행위의 엄격함보다 복음 증진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교회의 거룩을 강조한다는 명분이 주의 이름의 증진보다 우선할 수 없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주님은 자기에게 속한 자를 전혀 잃어버리지 않으시며, 그 일을 위해서 기도와 죽음의 길을 가셨다. 주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가실 때에 기도로 가셨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려면 기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

둘째,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말자. 시몬 베드로는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오른편 귀를 베어버렸지만,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검을 집에 꽂으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는 말고의 귀를 고쳐주셨다(눅 22:51). 그는 자신을 잡으러 온 자에게도 선을 베푸셨다. 우리는 그의 교훈과 모범대로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끝까지 선을 베풀자. 육체의 일로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없다. 칼로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은 십자가로 한다.

셋째, 우리는 친구가 우리를 버려도 낙심치 말자. 시몬 베드로는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우리는 사람들을 신뢰치 말고 그들이 우리를 배신하거나 떠나갈 때라도 크게 낙심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언제나 또 끝까지 신실하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신뢰하며 섬기며 사랑하며 순종하자.

넷째, 그리스도인은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 예수께서 악한 자들에게 잡히시고 심문을 받으셨고 구타를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세 앞에서 비굴하지 않으셨고 육신의 목숨을 구걸하지도 않으셨다. 우리는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 때 항상 담대할 수 있다. 의인은 사자같이 담대하다(잠 28:1). 우리는 항상 담대하고 당당하게 살자.

제자의 삶

십자가의 길

요 18:28-40절, 빌라도의 심문

[요 18:28-32절]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官庭, the governor’s headquarters)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 관정, the palace of the Roman governor, the hall of judgment은 안토니오 요새-Antonio Fortrees으로, 빌라도의 법정이 그 안에서 일어났다. 헤롯왕이 그의 친구 안토니를 위해 지은 건물로 알려졌다.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1지점이다. 비아 돌로사는 14세기에 시작하여 18세기에 14지점으로 된 것이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대제사장 가야바에게서 로마 총독의 관정으로 끌고 갔다.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으로 확정한 예수를 왜 빌라도에게 끌고 갔을까? 그런데 그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는데, 유월절 음식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었다(28절). 그들이 도착한 시간은 새벽이었다. 그들은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는 일에 열심이 있었다. 그들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죽이려는 악한 계획을 이루기 위해 잠을 자지 않았고, 예수님도 재우지 않았다. 밤에 공회를 소집하여 예수를 심문했고 쉬지 않고 새벽에 로마 총독에게로 데려가 고소하였다.

그 날이 무교절의 첫날, 즉 절기 안식일이므로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않고 유월절 음식을 먹고자 하여 이방인인 총독의 관정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정죄하고 죽이려는 것보다 자신들을 더럽히는 더 큰 악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들은 무지한 자들이었거나 자신들의 이성과 양심을 억누르는 위선자들이었다.

빌라도는 밖으로 그들에게 나가서 말하였다.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그는 유대 지도자들이 끌고 온 예수의 정확한 죄목을 알기를 원하였다. 그들은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그들은 예수를 행악자라고 말했다. 예수께서 무슨 악한 일을 하셨는가? 그가 자신의 신분에 대해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악한 일인가? 빌라도가 말했다.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빌라도는 그 재판에 관여하려 하지 않았으나, 유대인들은 말했다.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이는 법적 권한은 없었지만, 자연으로 사람을 죽이는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것은 병력이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으며, 스데반을 돌로 쳐서 죽였다. 그런데 그들이 그러한 절차를 수행하지 않는 것은 예수께서 어떻게 죽으실지 아셨고, 그렇게 되었다.

[요 18:33-36절] 이에 빌라도(Pilate)가 다시 관정에 들어가 예수를 불러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Are you the king of the Jews)?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는 네가 스스로 하는 말이뇨? 다른 사람들이 나를 대하여 네게 한 말이뇨?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유대인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빌라도는 고소를 받아서 예수를 심문하였다(33절). 빌라도는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고 질문하였다(33절). 예수의 답변은 “스스로 하는 말”, 정확하게 인지하고 하는 말한 것인지 확인한 것이다. 빌라도는 “내가 유대인이냐?”고 반문하였다. 즉 유대인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를 유대인의 왕으로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빌라도는 너의 백성과 대제사장이 넘겼고, 그 과정에 대해서 질문하였다(35절).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의 나라(Regnum Christi)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답변하셨다(36절). 그리고 만약 예수의 나라가 세상에 속한 것이었으면 그들이 넘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셨다. 반복해서 예수의 나라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하셨다(36절).

[요 18:37-40절] 빌라도가 가로되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 하신대 빌라도가 가로되 진리가 무엇이냐(“What is truth?”)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 하니 저희가 또 소리질러 가로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Barabbas)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러라.

예수께서는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는 빌라도의 두 번째 질문에는 대답하셨다(37절). 예수는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고 하셨다. 예수는 왕이시다. 예수는 왕이 되시기 위해서 오셨다(ὅτι βασιλεύς εἰμι. ἐγὼ εἰς τοῦτο γεγέννημαι). 예수를 왕으로 모시는 백성과 예수를 왕이라고 고발하는 백성이 있다. 예수는 왕을 고발하는 것이 상식적인가?로 반문하고 있다. 왕을 고발하는 것은 밀고(密告)로 은밀해야 하는데, 왕을 고발하는 대대적인 고발단이 등장한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곧 하나님의 나라는 진리의 나라이다. 진리에 속하는 자는 예수를 고발하지 않고 예수를 온전히 왕으로 섬길 것이다. 그러나 진리에 속한 백성이 아닌 사람은 소리를 듣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다. 세상 나라는 거짓된 악인들이 다스리는 나라이므로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하나님의 말씀 곧 진리가 법이며 진리가 지배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나라의 왕이시며 진리를 위해 세상에 오셨고 진리에 대해 증거하셨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은 그의 음성을 듣고 그를 믿고 따를 것이나, 세상은 진리를 알지 못하고 진리에 대해 무관심하고 진리를 듣지 않고 받지 않고 도리어 배척한다.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고 말했다. 그런데 예수께서 답변하지 않았고, 빌라도는 고소한 사람들에게 죄를 찾지 못했다고 보고할 뿐이었다. 빌라도가 진리에 대해서 진정으로 갈망하였다면 무죄 선고보다 진리에 대해서 확인하는 것이 먼저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무죄에 대해서 판정함으로 자기 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알면 무죄한 예수가 아니라 왕이신 예수가 되었을 것이다.

빌라도는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말했다.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 유월절이면 내가 너희에게 한 사람을 놓아주는 전례가 있으니 그러면 너희는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주기를 원하느냐?”(39절) 빌라도는 예수를 무죄라고 판정하면서도 전례를 따라서 석방할 것을 의뢰하였다. 무죄이면 조건없이 석방되어야 한다. 그런데 그들은 소리를 높여 바나바, 강도 바나바를 놓아주라고 주장하였다(40절).

진리의 나라의

왕이신 예수

Pontius Pilate between Barabbas and Jesus, Mpcjp212
Pontius Pilate between Barabbas and Jesus, Mpcjp212

다음 장(19장)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의 무죄함을 두 번 더 말한다(19:4, 6). 그러나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고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들은 이미 예수를 죽이기로 작정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 대신 강도 바라바를 사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 의인 예수 그리스도를 강도보다 못한 악인으로 취급하였던 것이다. 바라바는 λῃστής, 강도(robber)라고 번역하기도 하였지만, insurrectionist. uprising(반역자, 폭도)로도 번역한다. Zealot(젤롯)은 광신자로 평가한 것이다. 마이어 박사는 바나바를 로마에 항거해서 싸운 유대인 독립운동가로 주장하였다. 바르아바는 아바의 아들이고, 고대 사본에서는 예수, 아바의 아들이 된다고 하였다(마이어, 792). 반역자(폭도)로 번역한다면, 유대인들은 반역자를 고소하고 반역자를 석방해달라고 주장하는 모순을 폭로하고 있다. 예수를 정치 혁명가, 종교적 광신자로 평가한 연구자들도 있다. 요한복음 본문에 근거하면 그러한 주장은 전혀 성경 증거와 연관성이 없다는 것을 명료하게 알 수 있다.

본문의 교훈은 무엇인가? 첫째, 무지한 열심과 탐욕이 만나면 가장 위험하다.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고 죽이고자 하는 데 있어서 열심이 있었다. 바리새인, 열심당의 무지한 열심과 사두개인, 헤롯당의 탐욕이 결합하였다. 그들은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해서 각각 모의하다가 결국 힘을 합하여 죽음의 자리로 몰았다. 사람에게 있는 무지와 탐욕을 없애기 위해서는 예수를 믿고 섬기는 것이 유일하다.

둘째, 타락한 종교인은 불신자보다 더 나쁘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긴다는 유대 지도자들은 이방인 빌라도보다 더 나빴다. 로마 총독 빌라도는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예수가 무죄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양심적으로 알았다. 빌라도는 로마 총독의 명예가 있어야 하는데 타협으로 나갔다. 공직자가 법의 정의를 세우지 못하는 것은 부당하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의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예수를 왕으로 고소한 사람은 예수를 왕으로 섬기지 않았다. 예수를 믿고 따르는 것은 진리를 믿는 것이며 왕으로 섬기는 것이다. 진리는 예수의 왕권을 인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의 왕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영접한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다. 성경은 그 나라의 법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는 도덕적인 나라이다. 그 나라의 행동지침은 의와 사랑이며 그 나라의 특징은 평안이다. 신약교회는 이 나라의 부분적 성취이다. 그 나라는 장차 주 예수의 재림으로 영광스럽게 완성될 것이다.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고경태 목사(형람서원, 한영대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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